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3화 (213/250)

#213. 공수래공수거 (6)

드라마 제작사 협회를 탈퇴한 소규모 드라마 제작사 대표들이 모여 협회를 규탄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으니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현재 제작사 협회는 드라마 제작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기존 제작 방식을 답습하기에 급급할 뿐 아니라 오로지 제작사의 수익성만 따지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이에 우리는 드라마 제작사 협회를 탈퇴함과 동시에 새로운 드라마 제작사 협회를 만들어 드라마 제작 환경을 개선하는 데 노력할 것입니다.”

단상에서 발표하는 사람이 힘을 주어 성명문을 읽고 있었다.

물론 드라마 제작사들 중 손에 꼽히는 유니언 스튜디오나 스튜디오 글로리가 있었다면 모를까 소규모 제작사 몇이 모인 성명 발표라 그런지 받아 적는 기자들도 몇 안 돼 분위기 자체가 썰렁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발표하는 사람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불려 나온 대진일보 연예부 이성철 기자는 그 성의에 열심히 받아 적었다.

“우리는 달라진 환경을 고려해 새로운 제작 방식을 도입하는 한편 드라마 제작 환경을 개선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함께 드라마를 만드는 수많은 스태프, 작가, 연기자의 입장이 균형 있게 반영된 표준 계약서 가이드를 제시하겠습니다. 방송사와의 불공정한 계약 방식과 수익 배분 구조가 공정하게 보장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마치 선거 연설을 하는 듯 열의에 찬 발표자의 연설에 이성철은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으니 문구만 잘 다듬으면 기사가 생각보다 잘 빠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데스크로 가져간 그의 기사는 곧바로 킬 당하고 말았다.

“왜요? 언제는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열심히 취재하라면서요? 열심히 취재해 왔는데 자꾸 이렇게 빠꾸 놓으면 어디 기사 쓰겠어요?”

“그래. 이 기자 마음 내가 모르는 거 아니지. 근데 위에서 기사 내지 말라는 데 어떡해?”

“위요? 누구요? 설마 또 박현호 전무요?”

“전무님이 너랑 친구냐?”

“크흠. 아무튼 그 양반은 나갔으면 자기 방송국이나 잘 챙길 것이지 왜 우리 기사까지 참견이래요? 가만 보면 사장님보다 그 양반이 더 난리야.”

“넌 목이 몇 개길래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혹시 나 모르게 딴 주머니 찼냐? 아니면 재벌집 숨겨진 아들이라도 돼?”

김강철에게 뒷돈을 받으며 과거 유니언 스튜디오에 대한 안 좋은 기사를 썼던 것은 물론, 박현호의 찌라시를 퍼트리는 데 일조한 이성철은 뜨끔한 마음에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딴 주머니라니요,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기자도 때려 쳤죠. 부장님 앞이니까 이런 소리도 하는 거죠. 부장님 믿으니까요.”

“날 뭘 믿고?”

“미운 정?”

“하여간 입 다물고 있으면 밉지나 않지. 그러고 보니 너, 전에도 전무님한테 불려 가지 않았냐?”

“제가 언제요? 그런 적 없는데요.”

“아닌데, 분명 그런 적 있었는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부장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이성철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근데, 전무님은 왜 그렇게 이번 일에 신경을 쓰는 건데요?”

“그러는 너는 어떻게 알고 거기 갔는데?”

“저야, 오다가다 취재 때문에 아는 드라마 제작사 대표가 있었으니까 부탁받아 어쩔 수 없이 간 거였죠.”

“하긴. 그쪽에선 인맥이라도 동원해 사람들 관심을 받고 싶을 테지. 근데 자본력도 없는 그런 소규모 제작사 몇 모인 거 가지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겠어? 그런데도 전무님이 신경을 쓰는 걸 보면 협회장한테 무슨 언질을 받은 게 아니겠냐?”

“지금 협회장을 그 자리에 앉힌 게 전무님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에요?”

“어디서 들었냐?”

“사실이구나? 그러니까 지금 제작사 몇이 협회를 탈퇴하니까 협회장이 전무님한테 이른 거네.”

“어째 말이 짧다.”

“죄송합니다.”

“뭐 여기까지 말이 나왔으니 현상만 보지 말고 그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 기자로서 능력 좀 보자.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언제는 뭐 생각하고 기사 썼어요? 쓰라는 대로 불러 주는 대로 쓰니까 생각할 겨를이 없었죠.”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뭐, 모처럼 짱구를 굴려 보자면…… 혹시 드라마 제작 환경 개선, 뭐 그런 거 때문인가? 전에 스튜디오 글로리가 주 52시간 근무한다고 했을 때 협회에서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반발한 적이 있었잖아요.”

“아예 돌대가리는 아니구먼. 근데 그것만 있는 건 아냐.”

“그럼요?”

“솔직히 지금의 드라마 수익 구조를 보면 제작사보다 방송국에 유리한 건 사실이잖아. 다른 것도 아니고 그걸 손보겠다고 나선 거고.”

“오호.”

현재 방송국에서는 외주 제작을 맡길 때 제작비의 절반 정도만 주는 실정이었다.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하기 위해 제작사들은 어쩔 수 없이 PPL로 메꿀 수밖에 없었다. 사정을 모르는 시청자들은 과도한 PPL이 드라마의 흐름을 깬다며 반감을 가지지만 제작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미국은 방송국이 드라마 방송하는 권리만 가져. 그러니 대박 드라마 한 번 나오면 제작사는 노다지 캐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방송국이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가는 실정이고. 판권이라도 내놔야 수출로 숨통이 트일 텐데 방송국이 쉽게 내주겠냐?”

“하여간 결국 돈 문제다, 이거죠?”

“그렇지. 어쨌거나 협회장 자리에 앉혀 준 사람이 전무님인데 그 뜻에 반하면 되겠냐?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야지. 괜히 미운털 박혀서 방송국에서 방송 안 내보내겠다고 하면 어떡해? 그 길로 그 제작사는 망하는 거야. 괜히 제작사가 방송국에 밉보일 필요 있겠냐?”

“그럼 그 제작사들은 무슨 배짱으로 그런 거래요? 큰 제작사들도 몸을 사리는데?”

“한마디로 현실감이 없는 거겠지. 이왕 거기까지 갔으니 잘 봐 둬. 반기를 든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기자 회견장에 기자가 몇 안 되더라고요. 그나마도 이름 모를 인터넷 신문사 기자 몇 명에 개인 방송하는 사람들 있죠? 그 사람들이 거의 다더라니까요. 보니까 저만 부탁받은 건 아닐 텐데 메이저 신문사에선 나온 건 저뿐이더라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이 기자의 모습에 부장은 염려스러운 듯 물었다.

“행여나 어디 가서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고. 알았냐?”

“입에 자물쇠 채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근데 나는 너만 보면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괜한 걱정이십니다.”

이성철은 부장의 앞에서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이미 그가 쓴 기사는 다른 소규모 인터넷 신문사를 통해 퍼지고 있었다.

불길이 번지듯 이번 일이 알려지는 건 아니었지만 아예 불씨를 꺼버리고자 했던 바람과 달리 과거의 사건들까지 거론되면서 협회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로 분위기가 시끄러워지자 박현호는 그전에 서둘러 경우와 계약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 * *

경우를 만난 박현호는 계약서부터 내밀었다.

“뭐가 이렇게 급해?”

“내가 원래 성격이 좀 급해서. 그리고 우리 사이에 마음에도 없는 괜한 이야기 늘어놓는 것보다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계약서를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박현호는 혹시 협회의 일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그런 그의 눈치를 알아챈 건지 경우는 계약서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면 해. 괜히 눈치 보지 말고.”

“아니, 그게…… 요즘 협회가 좀 시끄러워서. 그거 신경 쓰는 건 아니지?”

“협회?”

그제야 계약서에서 시선을 뗀 경우가 박현호와 눈을 마주쳤다. 순간 싸늘한 경우의 시선에 박현호는 오금이 저리는 것 같았다. 저 녀석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기껏해야 아무 영향력 없는 소규모 제작사 몇이 성명 발표한 거?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하냐? 어차피 내가 협회장이 되면 다 해결될 문제 아닌가? 그런데 왜 내가 그걸 신경 써야 하지?”

“듣고 보니 그러네. 신경 쓸 일도 아니었는데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다. 어서 계약서 마저 살펴봐.”

걱정했던 것과 달리 경우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아 박현호는 내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잠자코 경우가 계약서를 다 보길 기다리고 있는데 별안간 그가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왜?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쓰는 표준 계약선데 무슨 문제 있어?”

“그게 아니라…… 내가 이런 법률엔 좀 약해서 말이야. 우리 변호사보고 살펴보라고 해야겠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뭘 저렇게 자세히 들여다봤나 싶었던 박현호는 애써 미소 지으며 물었다.

“변호사도 오라고 한 거야?”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할 이야기? 뭔데?”

“혹시 이번 일, 너네 쪽에서 흘린 거야?”

“이번 일이라면……? 아, 네 차기작이 우리 채널 DBN에서 나온다는 거? 그거 일부러 흘린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너는 무슨 일을 그렇게 해?”

싸늘한 경우의 목소리에 박현호가 흠칫 놀랐다.

“그 일 때문에 내 사정이 얼마나 난처해졌는지 알아?”

“난처해지다니. 무슨 말이야?”

“우리 드라마 아직 안 끝났어. 근데 벌써부터 차기작을 거론하면 어쩌자는 거야? 배우도 PD도 드라마 끝날 때까지는 드라마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거 몰라? 그런데 드라마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작가라는 사람이 차기작 한다고 설친 게 돼서 내 꼴이 우습게 됐어. 내 차기작 소문 때문에 우리 드라마 화제성이 밀렸다고!”

“그 정도였어? 그런 줄은 몰랐지.”

“그나마 내 회사니까 이대로 넘어가는 거지, 이거 꽤 심각한 문제야. 그 일로 내가 우리 대표님한테 얼마나 잔소리 들었는 줄 알아?”

“너도 대표잖아? 듣기론 네 지분이 제일 많다면서 눈치를 본단 말야?”

“당연한 거 아냐? 대표건 직원이건 회사의 이득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우리 회사가 드라마 만드는 회사지 내가 사적으로 유용하는 회사도 아니잖아. 설마 너네 회사는 안 그러냐? 네 마음대로 하고 그래?”

“……그럴 리가. 우리 회사도 같아.”

“그래서 말인데 지금 당장은 이 계약서에 사인 못 하겠다. 드라마 끝나면 하자.”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슨 이런―.”

“그러게 왜 설레발을 쳐? 그것만 아니었어도 조용히 넘어갔을 텐데 왜 그랬냐? 설마 주가 띄워 보려고 그런 건 아니지?”

“야, 무슨 그런 말을……. 어쨌든 일이 그렇게 돼서 미안한데, 어차피 계약서에 사인하고 입 꾹 다물면―.”

“변호사는? 변호사 입도 막게? 어차피 계약할 때 변호사 끼고 해야 되는데 내가 이 계약서에 사인하면 바로 대표 귀에 들어갈 거고 그럼 나는? 넌 내가 회사 내에서 입지가 어떻게 되든 드라마만 하면 상관없다는 거냐?”

“누가 그렇대?”

오늘 만나서 사인만 하면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깐깐하게 구는 경우의 모습에 박현호는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탓할 수도 없는 게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세 치 혀에서 비롯되었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전이라면 모를까 오너의 아들임에도 송 사장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서글픔을 느낀 탓에 뭐라 탓할 수만도 없었다.

“그럼, 드라마 끝나면 계약서에 사인할 수 있다는 거지?”

“물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이해해 주니 고맙다.”

생전 남의 비위라곤 맞춰 본 적 없었던 박현호는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갑질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드라마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결국 계약서를 집어넣었다.

“참, 계약서 봤으니까 알겠지만 제작은 유니언 스튜디오에서 하는 거야.”

“물론. 그쪽은 PPL 어떻게 하려나? 우리는 광고대행사 안 거치고 웬만한 건 새명하고 직접 일했거든.”

“아, 우리는 광고대행사를 끼고 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던 경우를 보며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참, 그러고 보니 너네 무슨 쇼핑몰이 고정시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스타 필드?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아니…… 혹시 고정시 지역구 의원에 대해 아는 거 있나 해서?”

“한석인 의원? 잘 아는 건 아니고…… 그냥 몇 번 얼굴 본 게 다야.”

박현호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봉민철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도록 돕는다면 그동안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없어?”

뜬금없이 한석인에게 관심을 쏟는 그의 모습에 경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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