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2화 (212/250)
  • #212. 공수래공수거 (5)

    “협회에 가입된 제작사가 한 마흔 곳 정도 돼. 너네 회사처럼 가입하지 않은 곳이 한 열다섯되거든. 다 합하면 쉰다섯. 근데 갑자기 제작사는 왜? 너도 무슨 몸집 키우기 하냐?”

    “몸집 키우기는 어떻게 하는 건데?”

    “재벌들 흔히 하는 수법 있잖아. 건실한 작은 회사 코 꿰어서 잡아먹는 거. 투자한답시고 돈 주고 결국 그걸 빌미로…….”

    신나게 말을 하던 김강철이 문득 말을 멈추더니 경우를 쳐다봤다.

    “왜 갑자기 말을 하다 말어? 그리고 나는 왜 그렇게 보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렇잖아. 너 지금 회사 대표될 때도 투자한답시고…… 응? 이제 보니 이 자식 완전 선수네. 누가 재벌집 아들 아니랄까 봐. 아앗, 왜 때려?”

    “이게 사람을 뭘로 보고! 그래서 내가 김 대표님 쫓아내고 회사 먹었냐? 회사 설립한 사람들 쫓아내기라도 했어?”

    “그런 거 아니라면 갑자기 드라마 제작사들은 왜 묻는데?”

    “그래, 네 말대로 몸집 좀 키워 보려고 그런다.”

    “거봐. 이실직고할 거면서 아닌 척하기는.”

    “그냥 몸집만 키우는 건 아니고 판을 좀 흔들어 볼까 하거든. 원래 뭐든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 아니겠냐?”

    “오호, 뭔가 또 재미있는 일 벌일 모양인데?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되는데?”

    “그러니까…….”

    경우의 부탁에 드라마 제작사 현황을 알아 왔던 김강철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니 두 사람은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경우가 드라마 작가로 일한 지 올해로 8년째였다.

    그가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드라마를 썼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면 제작 환경이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열악한 제작 환경이 전해지면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덕분이었다.

    스튜디오 글로리 역시 그래서 만들어졌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드라마를 만들 수 있도록.

    처음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경우가 주 52시간 근무를 주장했을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반발하는 제작사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완 분위기가 달라졌으니 그만큼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우는 지금이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좋은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명을 받은 김강철이 돌아가자 경우는 내일 프로덕션 정명도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저 민경웁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언제쯤 시간이 되시죠?”

    경우는 가장 먼저 정명도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 * *

    평소 다금바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박현호였지만 오늘은 그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먹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 박현호는 괜히 형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형은 그와 달리 맛을 제대로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어서 먹지 않고. 뭘 그렇게 자꾸 보는데?”

    “이상하잖아. 갑자기 전화해서 같이 밥이나 먹자니. 형이 할 소리야?”

    “섭섭하게,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해? 원래 형제끼리 같이 밥 먹을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냐?”

    “그거야 남의 집 이야기고. 우린 아니잖아. 좋은 형 코스프레는 그만하고 본론부터 말해. 용건이 뭔데?”

    박현호는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형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딱히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피해 버리면 진짜 뭐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렇게 잠시 동생을 바라보던 형이 호출벨을 누르자 곧이어 따끈하게 데워진 청주가 들어왔다. 주전자를 들자 박현호는 자연스레 잔을 받았다. 따끈한 청주는 형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 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술 생각이 났으니 얌전히 잔을 받았다.

    “너 요즘 무슨 일 꾸미는 거 있어? 그런 거라면 자중해.”

    그놈의 자중, 자중! 짜증이 치솟은 박현호는 잔에 가득 채워진 술잔을 비우고도 형 손의 주전자를 빼앗아한 잔 더 들이켰다.

    “내가 하긴 뭘 했다고 다들 이러는 건데? 나 자중하고 있어. 요즘 여자도 안 만나. 형도 알 거 아냐? 날 감시할 목적으로 송 사장을 심어 놓은 걸 테니까! 송 사장뿐이겠어? 뒤에 사람 붙여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내가 어디서 뭘 하는지 일일이 확인할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감시해? 솔직히 네가 사고 쳐 주면 나야말로 땡큔데 그럴 필요가 없잖아. 안 그래?”

    “…….”

    “그리고 전에도 말했잖아. 송 사장은 아버지 뜻이었다고. 아버지가 요즘 걱정이 많으셔. 너도 알지? 아버지 소원.”

    “알지. 자기 손으로 대통령 만드는 거잖아. 하여간 욕심도 많아. 자기가 못 될 것 같으니까 자기 손으로 대통령까지 만드시겠다, 이거잖아? 근데 대통령이 그렇게 아무나 쉽게 돼? 아무리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지만 그건 좀 아니지.”

    “대통령까지는 힘들어도 국회의원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어?”

    “뭐야? 진짜 뭐가 있긴 한 거야? 나 모르게 무슨 일을 꾸미는 건데?”

    “그러게, 너도 사고 안 치고 가만히 있었으면 아버지가 너를 이렇게 내놓은 자식 취급하시진 않으셨을 텐데.”

    하여간 사람 속을 살살 긁는 건 형만 한 사람이 없다고 경우는 형의 발끝도 못 따라갈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고른 게 누군데?”

    “편집국장으로 있었던 봉민철.”

    “봉민철? 지금 여당 미디어 본부장하고 있는 그 봉민철?”

    “잘 아네. 경선 없이 공천 받기로 당 대표하고도 이야기 끝내 놓은 상태거든.”

    “솔직히 봉민철은 좀 아니지 않아? 그 양반 펜대는 좀 굴리긴 해도 쇼맨쉽은 없잖아?”

    “행여 아버지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아버지 뒷목 잡으셔.”

    “알았어. 하여간에 그러느라 돈을 또 얼마나 쏟아부으셨을 거야? 진짜 노인네 추진력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고 선거가 다 돈인 줄 알았지만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갈 줄 몰랐다, 현호야. 그러니까 본전은 뽑아야지 않겠냐?”

    “그래서?”

    “사고 치지 말라고. 길게도 갈 거 없어. 4월, 선거 전까지만 조용히 있자.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누가 들으면 내가 사고뭉친 줄 알겠네.”

    “그러게. 예전에는 말도 잘 듣고 똑똑한 우리 동생이 왜 이렇게 됐을까?”

    “…….”

    “여자 만나고 싶으면 만나. 하고 싶은 일도 있으면 해. 대신에 다른 사람은 모르게. 너도 더는 아버지 실망시키고 싶지 않을 거 아냐? 아버지 소원이라는데 그 소원 이뤄 드리진 못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알았어. 사고 안 치고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근데…… 봉민철 그 인간을 대통령감으로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본인은 지금 바람 잔뜩 들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눈은 있는데 대통령은 뭐 아무나 하냐?”

    “하긴.”

    그동안 언론인 출신의 국회의원은 더러 있었다. 인맥과 후원금으로 친분을 유지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국회의원도 꽤 되었다.

    하지만 아예 기획부터 한 건 처음이었으니 잘만 한다면 여의도에 말 잘 듣는 강아지를 들여놓는 거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역시 오늘도 아버지께 한 수 배운다고 생각한 박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봉민철이 공천 받은 지역구가 어딘데?”

    “고정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곳이란 생각이 들 때쯤 김 대리로부터 문자가 왔으니.

    “뭔데?”

    “별거 아냐. 친구 안부 문자.”

    경우가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는 소식과 함께 인터뷰 내용이 짤막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경우를 경쟁 관계에 있는 드라마 제작사 대표로만 인식했는데 이렇게 인터뷰하는 걸 보면 확실히 화제성이 있는 드라마 작가라는 사실이 실감됐다.

    경우가 했다는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던 박현호의 입꼬리가 자신도 모르게 올라갔다. 인터뷰 중 그의 시선을 끄는 대목이 있었던 탓이었다.

    * * *

    찰칵찰칵.

    인터뷰 진행 도중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담기 위해 누르는 셔터 소리가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경우는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 척 인터뷰를 이어 나갔다.

    다행히 드라마가 생각보다 시청률이 잘 나온 덕에 인터뷰 요청이 끊이지 않았던 경우는 그중 새명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내놓는 작품마다 시청률 기록을 세우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 비결이 뭘까요?”

    “글쎄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죠.”

    “겸손함까지 겸비하신 민 경우 작가님, 듣기론 <태양의 제국> 촬영까지 모두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럼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다음 작품 준비하는 중입니다.”

    “아직 드라마 끝난 게 아닌데 벌써요? 좀 이른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이번 작품을 벌써 손 놓았다는 건 아니고요. 어떻게 보면 이번 작품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다음 작품은 저로서는 색다른 도전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시간이 있을 때 미리 준비하려 합니다.”

    “색다른 도전이라 그게 뭘까요?”

    “음, 다 알려 드리는 건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고요. 이렇게만 말씀드리고 싶네요. 지금까지 제가 했던 환경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드라마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궁금해지는데요?”

    “<태양의 제국> 마지막 회가 방송되는 날, 차기작에 대한 것들도 발표할 예정이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경우의 인터뷰가 공개되자 사람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특히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어디선가 경우의 차기작이 지상파나 QVN이 아닌 채널 DBN에서 방송된다는 말과 함께 경우가 채널 DBN의 관계자와 만나는 것을 봤다는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그와 같은 소문은 경우의 인터뷰를 본 박현호가 지시해 은밀히 흘린 내용이었으니 소문이 퍼지자 진실을 알아내려는 기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드라마국 비상이랍니다. 민경우 작가 차기작이 우리 쪽에서 방송되는 거 맞냐고 확인 전화가 그렇게 온다고 하더라고요. 편성까지 확정된 거냐고 묻는데 곤란한 모양이에요.”

    “시키는 대로 했겠지?”

    “네. 긍정도 부정도 안 하고 애매하게 대답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 난리가 난 거잖아요.”

    애매한 대답을 긍정적인 신호로 본 기자들은 특종 욕심에 제대로 확인도 해 보지 않고 관련 기사를 쏟아 냈다. 덕분에 기사를 본 김 대리의 얼굴은 걱정으로 울상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고 있는 박현호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민경우 작가의 새 드라마는 채널 DBN과 함께’

    ‘주인공으로 박재현 물망’

    ‘종편까지 접수하는 민경우 작가, 시청률 흥행 이어 갈까?’

    관련 기사가 결국 채널 DBN의 주가 상승에도 영향을 미치자 박현호는 새삼 작가로서 경우의 위력을 실감했다.

    “인기 작가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근데 전무님, 괜찮을까요?”

    “뭐가?”

    “그렇잖아요. 아직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고 민 작가가 우리랑 같이 일하기로 확정된 것도 아닌데 전 괜히 걱정이 됩니다.”

    “이봐, 김 대리. 민 작가가 한 인터뷰 기사 못 봤어? 색다른 도전이라잖아. 우리랑 같이 일하는 게 아니면 민 작가한테 색다르게 도전할 일이 뭐가 있는데? 안 그래?”

    “그래도…….”

    “하여간 김 대리는 걱정이 너무 많아 탈이야.”

    그동안 김강철과 내통하며 아주 조금 죄책감에 시달렸던 김 대리는 이만하면 자신은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 모든 건 박현호의 잘못이고 그가 판단을 잘못 내린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김 대리의 전화벨이 울렸으니.

    “오진원 대표님인데요?”

    “무슨 일로? 어쨌든 빨리 받아 봐.”

    “네.”

    김 대리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예? 뭐라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느낀 박현호는 김 대리가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물었다.

    “뭔데? 무슨 일이야?”

    “그…… 드라마 제작사들 몇이 협회를 탈퇴하겠다고 합니다.”

    “탈퇴? 갑자기 웬 탈퇴?”

    “그러니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는지 박현호는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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