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1화 (211/250)
  • #211. 공수래공수거 (4)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경우가 재차 물었다.

    “드라마 제작사 협회 협회장?”

    “그래. 너 그동안 협회하고 사이 안 좋았잖아. 다른 제작사들이랑 갈등도 좀 있었고. 그런데 네가 협회장이 된다고 해 봐. 다른 제작사 대표들이 너한테 넙죽 엎드리지 않겠냐?”

    협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센 건 유니언 스튜디오라던 내일 프로덕션의 정명도 대표의 말을 떠올린 경우는 다른 제작사와 갈등을 부추긴 게 정작 누구였는지 묻고 싶어졌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위에 올라 군림하기 좋아하는 녀석의 눈엔 자신이 겨우 그 정도로 보였나 싶었다. 감투 따위 별로 상관없었기에 거절하자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던 박현호가 뒷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사이가 왜 안 좋았던 거냐? 아, 맞다. 근무시간 뭐 그런 거 때문에 그러지 않았던가? 협회장이 되면 그런 거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협회장 입김이 생각보다 쎄거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현호가 저런 말을 하자 경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는 너는?”

    “나? 나 뭐?”

    “너는 그런데 관심 없어? 협회와 사이 안 좋았던 나를 협회장으로 올려 줄 만큼 협회에 영향력이 큰 것 같은데 차라리 네가 협회장이 될 생각은 없냐고?”

    “내가 협회장? 아니, 왜?”

    “왜라니?”

    “그래. 이미 까발려진 사실이니까 얘기하지만 유니언 스튜디오, 거의 내 회사나 다름 없어. 내 지분도 상당하고. 그렇지만 내가 거기 대표는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채널 DBN의 전무일 뿐이지. 대표도 아닌데 제작사 협회장을 내가 어떻게 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그럼 너네 바지 사장 앉히면 되잖아.”

    “아, 오 대표? 오 대표 그런 말 안 하던데? 하고 싶었으면 자기가 진작 했겠지. 근데, 해서 뭐해? 협회장이 되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는데? 그리고 그런 자리는 원하는 사람이 앉아야지?”

    “…….”

    “그래서 난 너를 추천한 거야. 잘나가는 드라마 작가에 제작사 대표, 거기다 최연소 협회장. 그림 괜찮네.”

    “그림? 무슨 그림?”

    “뭔가 진취적으로 일을 해낼 거 같은 그런 거. 넌 모르겠냐?”

    그래, 모르겠다.

    본인 역시 드라마 제작사를 하고 있으면서 자기와는 관련 없다는 듯, 남의 얘기하듯 하는 박현호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모기범의 친구가 밤샘 촬영을 하다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게 불과 일주일도 안 된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친구가 속해있던 드라마 제작사가 유니언 스튜디오였다.

    협회장 입김이 세다면 정해진 안건에 뒷말 없이 따를 생각은 있는 건지 어차피 제작비 핑계, 제작 환경 핑계 대면서 주 52시간은 불가하다며 협회장을 허수아비로 취급하려는 건 아닌지 되묻고 싶었다. 경우는 새삼 유니언 스튜디오가 드라마 업계에서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스튜디오 글로리에 조금 밀리긴 했어도 이전 생이나 지금이나 유니언 스튜디오는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그런 드라마 제작사였다.

    이전 생에 그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왜 다들 유니언 스튜디오를 가고 싶어 하냐고.

    ‘업계 최고잖아.’

    ‘솔직히 그건 말장난이고 연봉이 세거든. 뭐, 드라마를 만드는 게 평생의 꿈이었다, 나는 돈도 뭣도 상관없다,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쨌거나 일을 하는 것도 다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니겠어? 어차피 어딜가나 일 많은 거 똑같아. 그러니 어차피 할 일 이왕이면 한 푼이라도 더 받는 곳에서 일하고 싶잖아. 안 그래?’

    하지만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하는 게 있었으니 동종 업계 다른 제작사보다 연봉을 많이 받는 건 오직 잘나가는 최상위 10퍼센트의 사람들에게만 그랬다. 나머지 90퍼센트의 사람들에겐 그다지 친절하다고 할 수 없는 회사였다.

    돈을 더 주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오랜 시간 일해야 했으니 무리하게 일하다 결국 피로가 쌓여 사고가 나는 건 다반사였다. 책임을 져야 할 제작사는 제대로 된 보상도 해 주지 않으면서, 스탭들의 노고로 드라마 흥행이 되면 성과만 챙기기에 급급했다.

    그런데도 박현호는 대진일보 계열의 인터넷 기사를 이용해 유니언 스튜디오가 업계 최고이며 최고의 대우를 해 준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덕분에 사람들은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이상은 언제나 현실과 달랐다. 그리고 죽었다 깨어나도 그 현실은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향해 실실 웃고 있는 박현호를 보던 경우는 이내 마음을 바꿔 먹었다. 어차피 판이 벌렸으면 한판 제대로 놀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너도 알다시피 그런 제안 쉽게 받아들이기 그렇잖아.”

    박현호는 그 말이 자신의 자존심도 있으니 이 자리에서 오케이 할 수 없을 뿐 내 답은 정해져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역시 자신의 제안이 먹혔다는 생각에 의기양양 해진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물론이야.”

    그렇게 박현호를 겨우 떼어 낸 경우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릿속으로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야기를 끝내고 다가온 신도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작가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표정, 완전 무서워요!”

    * * *

    오랜만에 잠을 푹 잔 덕분인지 상쾌하게 일어난 박현호는 출근길이 내내 즐거워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침내 어두운 터널이 끝나고 밝은 햇살을 맞는 기분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나 봅니다, 박 전무.”

    자기 기분에 취해 룰루랄라하고 있던 박현호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 그곳엔 송추원 사장이 서 있었으니.

    “아, 사장님.”

    “박 전무가 그렇게 웃는 거 참 오래간만이네요. 좋은 일 있으면 말해 보세요. 축하하면 기쁨도 두 배가 된다고 하잖습니까?”

    “좋은 일이 있다기보다…… 그런 말이 있잖아요. 웃을 일이 있어야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면 웃을 일도 생긴다고. 좋게 생각하려고요. 그래야 좋은 일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한동안 얼굴에 그늘이 져 있더니 밝은 모습 보니까 아주 보기 좋아요.”

    “안 좋은 날도 있으면 좋은 날도 있어야죠.”

    “맞는 말입니다.”

    이놈이 엘리베이터 왜 이렇게 더디게 올라가는지 아예 시간이 아예 멈춰 버린 기분이었다.

    “근데 내 말 잊지 않았겠죠? 자중하라는 말, 내 입으로 하긴 했지만 회장님 특별 지시였단 거 알죠?”

    “…….”

    “하여간 회장님도 참 걱정이 많으시지. 근데 요즘 들어 회장님을 이해할 것 같아요. 박 전무만 보면 왜 이렇게 불안한지…….”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송추원 사장이 내렸다. 문이 닫힐 때까지 박현호는 멀어지는 그의 뒤통수를 째려보고 있었다.

    곧이어 다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박현호는 씩씩대며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미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 대리가 그런 그의 모습에 서둘러 일어나 서류를 챙겨 들고는 전무실로 따라 들어갔다.

    “하여간 사람 기분 잡치게 하는데 뭐 있어.”

    “예?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송사리 말이야. 내가 기분 좋은 것도 눈꼴 시린 모양이더라고. 하여간 별 걸 다 트집잡는다니까! 두고 봐. 내가 이번에 드라마 성공시켜서 아버지께 말해 날 방해만 하는 저딴 놈을 확 날려 버릴 테니.”

    “그렇다는 건…… 전무님, 드디어 민 작가를 설득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박현호잖아. 협회장 준다니까 놈이 덥석 물더라니까.”

    “민 작가가요……? 역시 전무님이십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 대리는 어쩐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지만 김강철을 통해 느낀 그라면 절대 박현호와 같이 일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받아들인 걸 보면 진짜로 협회장이 하고 싶었던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 스케줄 어떻게 돼?”

    “아, 네.”

    김 대리는 가지고 온 서류를 보며 박현호의 스케줄에 대해 보고 했다. 듣고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켜진 컴퓨터 화면. 인터넷을 접속하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나 지난번 방송됐던 <태양의 제국> 관련 기사였다.

    검색어를 쳤더니 관련 기사가 줄줄이 쏟아졌다.

    태양 그룹 이 회장이 쓰러진 직후 이 회장의 최측근이었던 비서실장 최경식은 이 회장의 숨겨진 자식인 이찬수를 데리고 들어온 것부터 3, 4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재개발 문제로 삼촌이 죽음에 이르도록 만들게 한 이들에게 복수할 결심에 비서실장과 손을 잡은 이찬수는 태양 그룹의 말단 직원으로 시작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이 회장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동료들은 낙하산인 그를 못마땅해하며 따돌리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던 이찬수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한다.

    처음엔 짠내 나는 이찬수의 회사 생활도 조금씩 적응하면서 낙하산이라고만 여겼던 동료들의 인정을 조금씩 받는 그의 모습에 웃음 짓는 것도 잠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찬수를 이용하려는 최경식의 본심이 드러나면서 드라마는 겉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진다.

    기사는 배우들의 호연은 물론이고 각 캐릭터로 대표되는 다양한 인간의 노골적인 욕망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호평이 주를 잇고 있었다.

    박현호는 기사의 제목만 읽는 것으로도 드라마를 다 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뭘 그렇게 보세요?”

    “<태양의 제국> 기사 난 거. 드라마 한 번 나왔다 하면 난리가 나는 구만.”

    “민경우 작가 아닙니까. 이런 말씀 드리긴 뭣하지만 민 작가가 쓴 드라마는 항상 그랬습니다.”

    “그래?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예전에 이런 기사 보면 막 짜증 나고 그랬는데 이젠 아무렇지도 않네.”

    “왜요?”

    “곧 한솥밥 먹을 식구니까. 앞으로 이런 기사가 우리 채널 DBN 드라마의 기사가 될 거 아냐?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고 관심 없는 것보다 어쨌든 관심받는 게 더 좋지 않아?”

    “그야, 그렇죠.”

    기사를 읽다 무언가 떠오른 박현호가 김 대리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그랬지? <태양의 제국> 대본 작업은 다 끝났다고 말이야.”

    “예. 추가 촬영을 한다면 모를까 현재로썬 촬영도 다 끝났으니 더는 대본 작업할 건 없을 겁니다.”

    “그럼 새로 드라마 대본 작업하는데 얼마나 걸리려나?”

    “작가님들마다 다르겠죠. 준비 기간만 꽤 걸리는 작가님들도 계신 걸요. 못해도 1년은 걸리지 않을까요?”

    “그렇게나? 그럼 좀 늦을 것 같은데……. 그냥 뚝딱뚝딱 쓰면 안 되나?”

    “왜요? 민 작가님 대본만 나온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편성 잡으시게요? <태양의 제국> 방송 시작한 지 겨우 2주밖에 안 됐는데요?”

    “그러니까! 4회 밖에 안 나왔는데도 저렇게 난리니 이왕이면 이 화제성을 그대로 이어가고 싶다, 뭐 그런 거지.”

    “그럼 차라리 작가님한테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언제쯤 대본 나올 것 같냐고요. 듣기론 이미 써 둔 대본도 상당하다고 하던데요.”

    “그래? 써 놓은 것도 많대?”

    “네.”

    “그럴 줄 알았으면 자존심 접고 물어볼 걸 그랬나? 아니다, 같이 일 하자는 것도 겨우 꺼냈는데 거기까진 너무 나갔지.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닌데 언제 대본 줄 거냐고 독촉하는 건 영 폼이 안 나.”

    “계약서 도장…… 안 찍으셨습니까?”

    “말만 꺼냈다, 말만. 그것만 하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진짜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들어서야, 원.”

    그럼 그렇지.

    어쩐지 일이 너무 쉽다 생각했는데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면 앞으로도 달라질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혼자 들떠 있는 박현호의 모습에 김 대리는 그가 김칫국을 너무 빨리 마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도 모르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

    그 순간 김 대리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김 대리, 민 작가한테 줄 계약서 하나 준비해 놔.”

    “알겠습니다. 그럼 고료는 어떻게 할까요?”

    “음…… 최고 수준으로 해 줘. 어쨌든 이름값하는 작간데 제대로 해 줘야 하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김 대리는 전무실을 나오자마자 김강철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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