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10화 (210/250)
  • #210. 공수래공수거 (3)

    지난밤 늦게까지 편집실에서 조연출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느지막이 출근한 경우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모기범이 한숨을 쉬고 있는 걸 보고는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땅 꺼지겠어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게…….”

    잠시 망설이던 모기범은 이내 입을 열었다.

    “저하고 친한 친구 중에 드라마 조연출하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런데요?”

    “밤샘 촬영하다가 다쳤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문병 다녀오는 길이에요.”

    “저런.”

    “근데 그렇게 스케줄 몰아붙인 건 제작사 탓인데 잘리는 거 아닌가 걱정하고 있더라고요. 좀 마음이 좋지 않네요.”

    “확실히 동종 업계 사람들이 일하다 다쳤다는 소리 들으면 남일 같지 않고 그렇죠. 거기다 모 PD님은 친구 분이시니 오죽하겠어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그 친구 분이 하는 드라마 제목이 뭔데요?”

    망설이던 모기범이 드라마 제목을 알려 주자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함께 타고 올라오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인사를 꾸벅한 모기범이 제작부 사무실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경우의 얼굴도 밝진 않았다. 자신의 사무실로 가려는데 라운지 TV에 나오는 <태양의 제국>을 심각한 얼굴로 보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신도현이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아, 작가님. 그게…… 이미 봤는데도, 재미있어서 저도 모르게.”

    “작가님이 재미있다고 하시니 제가 고맙네요. 아, 듣기론 요즘 밤 늦게까지 작업하신다면서요? 쉬엄쉬엄하세요.”

    “그렇게 열심히 한 건 아닌데…….”

    “참 도윤이 시험, 합격했다고 했죠? 제때 축하도 못 해 주고 좀 미안하네요.”

    “바쁘셨잖아요. 드라마 쓰시랴, 결혼하시랴. 저 같아도 정신없었을 것 같아요.”

    “그럼 도윤이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다니던 학교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어요. 학교 다닐 때도 새벽에 잠깐 보고 그랬는데 그나마 인턴으로 일하니까 한 달에 한 번 볼까, 말까 해요.”

    “이제 정말 의사 선생님이네요. 형 곱창 사 준다고 우연히 만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옛날 생각에 경우의 얼굴이 그제야 풀어졌다.

    “근데 작가님도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표정이 어두운데요?”

    “그냥…… 작가님 드라마 보다 보니까 자료 조사를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데 자료 조사가 쉽지 않네요. 인터뷰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에요.”

    “어떤 내용의 드라만데요? 여쭤봐도 돼요?”

    “그러니까…….”

    신도현이 조심스럽게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자 경우가 흥미롭게 듣기 시작했다.

    “오호, 정치 스릴러라. 흥미가 확 당기는 데요.”

    “일단 정치 스릴러긴 한데 아무래도 정치 쪽보다는 스릴러에 비중이 클 것 같아요. 정치 쪽은 솔직히 잘 모르겠거든요.”

    “관심은 많지만 은근히 접근하기 어려운 쪽이 정치죠. 익명이 보장된 곳이 아니면 자기 의견을 표출하기도 쉽지 않고요. 괜히 의견이 달라 다툼이 생길 수 있잖아요. 확실히 자료 조사만으로는 한계가 있겠어요.”

    “지금 어떤 정치인 자서전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위인전 같아서 집어 던―, 하하, 덮어 버렸어요.”

    말을 바꾸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살짝 웃었다. 그러다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 제가 아는 국회의원 한 분이 계시거든요.”

    “국회…… 의원이요?”

    “자고로 어떤 인물에 대해 알려면 그 사람보다는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과 친해지는 게 제일 현명하죠.”

    “……예?”

    “혹시 이번 주 주말에 시간 돼요?”

    “네. 별일 없기는 한데…….”

    “그럼 저랑 어디 좀 가죠. 작가님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

    경우의 말에 신도현은 누굴 만나게 될지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 * *

    경우를 따라 도착한 곳은 신도현도 이미 뉴스에서 봐 어느 정도 익숙했던 국회의원 한석인의 북 콘서트였다. 두 사람은 행사가 끝나자 찾아온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는 한석인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향했다.

    경우의 얼굴을 발견한 한석인이 반갑게 맞았다.

    “하하, 민 작가. 여기까지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다른 분이라면 모를까, 의원님 북 콘서튼데 와야죠. 질문이 꽤 수준 높던데요? 날카로운 질문도 재치있게 받아치시고 정말 대단하세요.”

    “그랬습니까? 근데 이분은…….”

    “저희 회사 소속 신도현 작가님입니다.”

    새명 유통이 처음으로 고정시에 복합 쇼핑몰을 열게 되면서 지역구 국회의원인 한석인과 인연을 맺은 경우는 그 뒤로도 그와 가끔 연락을 주고받으며 힘든 일이 있을 때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북 콘서트 말미에 얼굴도장만 찍고 갔을 테지만 오늘은 특별히 신도현을 위해 북 콘서트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했으니 어쨌든 국회의원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신도현에게 기분 전환이 되길 바랐다.

    “작가님이라고요? 난 드라마 출연하시는 배우 분인 줄 알았어요.”

    “과, 과찬이십니다.”

    “참, 그러고 보니 <제로섬> 쓰셨던 작가님이죠? 그 이후에 민 작가랑 <뫼비우스> 쓰셨고요. 최근엔 <페르소나>를 쓰시지 않았습니까?”

    “그, 그걸 어떻게……?”

    국회의원들은 일이 바빠 TV 볼 시간도 없고 뉴스만 겨우 본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뭘 하느라 그렇게 바쁜지는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최신 유행하는 것도 보좌관이 알려 주는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이 어떻게 여기 올 줄 알고 보좌관이 그런 것까지 챙기나 싶은 생각을 하던 중 경우가 귓속말로 답을 알려 줬다.

    “사모님이 스릴러 마니아시거든요.”

    “아!”

    “앞으로도 좋은 드라마 부탁합니다.”

    “네.”

    그렇게 얼굴 도장을 찍은 두 사람은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 이런 곳 처음 와 봤어요.”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뭐, 알아 두면 나쁠 건 없죠.”

    신도현은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한쪽 테이블엔 책이 가득 쌓여 있었고 그 옆에 모금함이 있었으니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모금함에 넣고 책을 받아 가는 모습이 색다르게 보였다.

    “시작하기 전에도 사람이 많더니 끝나도 사람이 많네요.”

    “북 콘서트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어쨌든 출판기념회거든요. 선거 전에 합법적으로 선거 자금을 모금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죠.”

    “선거? 아, 그러고 보니 올 4월에 선거가 있죠?”

    “네, 90일 전까지만 가능한 거라서 요즘 다른 국회의원들도 출판기념회니 북 콘서트니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경우는 자연스레 신도현이 보고 있던 테이블로 다가갔다. 미리 준비해 온 봉투를 두 개 넣은 경우가 책 두 권을 가지고 와 한 권을 신도현에게 건넸다.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저도 준비를 해 왔을 텐데요…….”

    “누가 준비하든 상관없잖아요. 저쪽에 성의 표시를 하는 게 중요한 거죠.”

    봉투 속에 그가 얼마나 넣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그것 때문에 잘못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근데 저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뇌물죄 같은 거로 걸리지 않을까요? 보니까 봉투에 이름도 적어 넣었던 것 같던데…….”

    “결혼식에 축의금 내는 거라 생각하면 돼요. 축의금이 결혼식 할 때 친척, 지인들이 십시일반 돕는다는 개념이잖아요. 누가 얼마 냈는지 적어뒀다가 갚는 것처럼 선거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선거자금 모으고 도움받은 만큼 보답하는 거죠. 특별히 문제될 건 없으니까 걱정 말아요.”

    그 유명한 김영란 법이 제정된 게 작년이었다. 3만원 이상 식사 대접도 처벌 대상이 되는 마당에 이런 출판기념회는 규제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게 어이없긴 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이런 걸 두고 한 말인가?

    경우는 그 뒤로도 이번 행사에 대해 설명했다.

    “봐요, 책값이 1만 5,000원인데 거스름돈 받아가는 사람은 없잖아요.”

    “아까보니까 봉투만 내고 책은 안 받아가는 경우도 많더라고요.”

    “아마 바빠서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들 대신해 오는 심부름꾼도 많을 거에요. 저기 저 학생 있죠? 저 친구는 북 콘서트 할 때도 질문 엄청 했잖아요. 캠프에 합류하고 싶은 학생일 거예요. 날카로운 질문에 한 번, 저렇게 봉투에 인상을 남겨 또 한 번 눈도장 찍으려는 거죠. 쉽진 않겠지만.”

    “어떻게 그런 걸 다 아세요?”

    “어쩌다 보니 주워들은 게 많거든요.”

    경우의 말에 신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 왔으니 우리의 소임을 다 해야죠.”

    “예? 이제 끝난 거 아니에요?”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았어요. 저기 저 사람 보이죠? 저 사람이 오늘 작가님이 공략해야 할 사람이에요.”

    경우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한 남자가 열심히 전화를 받고 있었다. 바로 한석인 의원의 보좌관인 주영규였다. 경우는 그에게 다가갔다.

    “보좌관님 안녕하세요.”

    “아, 민 작가님도 오셨군요. 여기 이분이……?”

    “네, 제가 전화로 말씀드렸던 신도현 작가님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주영규라고 합니다.”

    “신도현입니다.”

    국회의원 본인보다 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보좌관이라 할 수 있었다. 돈 봉투에 신도현 이름으로 정치 후원금도 두둑이 넣어 놨겠다, 받은 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될 수 있는 한 신도현의 물음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세상이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킨 경우는 이곳저곳 구경을 하다 반갑지 않은 인물과 마주하게 되었다.

    “요새 자주 본다?”

    “박현호, 네가 여기 웬일이냐?”

    “웬일은? 너도 왔는데 나라고 못 올 이유 없잖아?”

    그러고 보니 한석인이 방통위 소속이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어쨌든 종편에 드라마 제작사까지 가지고 있는 마당에 방통위 소속 의원과 친분을 다져 두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놈은 지난번부터 왜 자꾸 아는 척을 하는 건지 경우는 그곳을 벗어날 생각 밖에 없었다.

    “저쪽에 의원님 계시니까 가서 얼굴도장 확실히 찍어. 그럼 난 이만 간다.”

    “저, 저기…….”

    붙잡아 놓고는 말이 없는 박현호의 모습에 눈썹이 꿈틀거린 경우가 물었다.

    “왜?”

    “그게…… 그 너네 드라마 좋더라. <태양의 후예>.”

    “하! <태양의 제국>이거든.”

    “아…… 그렇지. 제국. 맞다. 내 실수. 미안.”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왜 저러나 뭘 잘못 먹기라도 했나 싶어 경우가 빤히 쳐다보자 머리를 긁적이던 박현호가 안 되겠나 싶었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차피 이왕 말할 거 뜸 들여서 뭐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게. 나, 너한테 부탁이 있어.”

    “나? 네가 나한테 부탁이 있다고?”

    “그래. 그러니까…… 저기…… 우리 채널 DBN하고 같이 드라마 하는 건 어때?”

    “나랑? 드라마? 너 혹시 어디 아프냐? 오다가 교통사고라도 당한 거야? 야, 이게 몇 개로 보여?”

    손가락 두 개를 펴 흔드는 경우에게 박현호는 결국 인상을 쓰고 말았다.

    “사고 안 났고 나 제정신이야. 멀쩡해. 드라마 작가 민경우한테 채널 DBN의 전무로서 제안하는 거야. 장난 아니고 진지하다고. 내 말 알아듣겠냐?”

    “어, 그래…….”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얼굴까지 시뻘게져 씩씩대는 박현호를 보며 경우는 잠시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야, 근데 너 뭐 잘못 먹었냐? 네가 같이 일하자고 하면 내가 오케이 할 것 같아? 막말로 내가 우리 방송국 놔두고 왜 너네 종편에서 드라마를 하는데? S&Media가 우리 새명 쪽 케이블 방송사인 건 알고 있냐?”

    이미 나올 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건지 박현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지 그 미소가 불길하게 느껴졌다.

    “알아. 근데 너 앞으로 QVN에서만 드라마 방송할 거 아니잖아. KBC, SBC, MBS랑도 같이 일 할 거 아냐? 거기에 우리 채널 DBN이 포함된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데?”

    “그거야 그렇지만 ―.”

    “어차피 이 바닥에 있다 보면 좋으나 싫으나 앞으로도 이렇게 얼굴 마주할 일이 있을 텐데 과거야 어떻든 앞으로는 서로 좋게좋게 지내자는 거지. 물론 세상에 공짜가 어딨겠냐?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여 준다면 나도 네가 혹할 만한 제안 하나 할까 하는데.”

    솔직히 박현호와 같이 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그 조건이 뭔지 궁금했던 경우는 일단 들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조건이 뭔데?”

    “드라마 제작사 협회, 협회장으로 내가 널 밀어줄까 하는데 어때?”

    이 정도면 너도 넘어올 수밖에 없을 거란 박현호의 생각과 달리 경우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이게 지금 장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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