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9화 (209/250)
  • #209. 공수래공수거 (2)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박현호는 냅다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와장창 소리를 낸 쓰레기통이 바닥을 굴렀다. 마침 따라 들어온 김재열 대리가 쓰러진 쓰레기통을 정리했다. 슬쩍 눈치를 보자 박현호가 아직도 씩씩거리고 있었다.

    “하여간 그놈의 찌라시 흘린 놈 잡히기만 해 봐, 내가 가만두나!”

    김강철과 내통해 박현호의 스폰서 문제를 찌라시에 터트리는 데 일조한 김 대리는 그만 뜨끔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그가 물었다.

    “왜요, 사장님 방에서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놈의 송 사장인지 송사린지 재수없게 굴잖아!”

    채널 DBN이 대진일보 사옥에서 더부살이를 마치고 신사옥으로 옮길 때 부사장으로 취임한 송추환은 이제 사장이 되어 채널 DBN을 쥐고 흔들었다. 그의 뒤엔 박현호를 견제하는 그의 형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송 사장이 비록 월급쟁이 사장이라 해도 사주의 아들인 자신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다.

    “그놈의 찌라시만 아니었다면 부사장을 거쳐 지금 사장 자리에 있을 사람은 그 송사리가 아니라 나라고!”

    “그, 사장님이 이번엔 뭐라고 하셨는데요?”

    “나보고 가만히 있으란다. 아무것도 하지 말래!”

    “왜요? 혹시 이성현 PD 때문에요?”

    “에이씨! 그놈의 재수없는 자식, 이름도 꺼내지도 마.”

    개국 후 몇 년이 지난 지금 다행히 처음보다 드라마나 예능의 시청률이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오른 시청률이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케이블 채널인 QVN은 이미 지상파 채널의 시청률을 따라잡고 있는데 채널 DBN은 한계에 이른 것처럼 멈춰 있으니 박현호는 그것을 깰 뭔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스타 PD.

    어쨌거나 드라마를 만드는 건 사람이었으니, 누가, 어떤 드라마를 만드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시청률이 더 잘 나오는 작가와 PD가 있기 마련. 스타 작가, 스타 PD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이들이 있었으니 박현호는 그런 인재들로 변화를 꾀하고 싶었다.

    마침 그의 생각에 충실한 PD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성현 PD였다.

    SBC 소속의 그는 유학파 출신에 실력 있는 PD였다. 평범한 드라마에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영상미를 뽑아내는 그라면 유니언 스튜디오 소속 작가들과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를 채널 DBN으로 데려오기 위해 수차례 접촉한 박현호는 결국 거액의 연봉을 제시해 데리고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시청률을 끌어올려 줄 거라 예상했던 그는 드라마국이 아닌 보도국의 시청률만 올려 줬으니.

    “하필 뽕쟁이일 건 뭐야?”

    외국 유학 시절 호기심에 시작한 마약을 끊지 못한 그는 몰래 입수한 마약을 하는 것도 모자라 중간 브로커에게 건네받은 마약을 클럽으로 유통하기까지 한 사실이 적발되고 말았다. 그와 함께 채널 DBN의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물론 SBC의 PD들까지 줄줄이 엮여 들어갔으니 방송가는 또 한 번 난리가 나고 말았다.

    ‘이번 마약 스캔들만 아니었어도 우리 채널 DBN의 평판이 이렇게 떨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도대체 이성현 PD, 스카우트 한 사람이 누굽니까?’

    ‘크흠, 크, 바, 박 전무…….’

    기침 소리에 섞여 박현호가 거론되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 제가 알고 그런 것도 아니고…….’

    ‘박 전무, 전에 내가 그랬죠. 당분간 자숙하라고.’

    ‘하지만 사장님―.’

    ‘회사를 생각하는 박 전무의 뜻은 알겠어요. 그런데 자숙하라는 내 말을 들었다면 오늘날 이와 같은 꼴은 안 당했겠죠.’

    ‘…….’

    ‘자숙, 자숙하세요. 제발!’

    “내가 그 자식이 뽕쟁이인지 알았겠냐고!”

    “그러게요. 사장님이 좀 너무하시기는 했어요.”

    “일부러 그런 거야, 나 물먹으라고. 그런다고 내가 기죽을 것 같아!”

    “근데, 이성현 PD한테 이미 지급된 돈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10원짜리 한 개 남기지 않고 다 털어 와야지.”

    이미 변호사를 시켜 소송을 준비한 그는 자신의 뒤통수를 친 이성현에게 손해배상까지 청구해 알거지로 만들 준비를 모조리 마친 상태였다.

    “잘 봐 두라고. 내 뒤통수치면 어떻게 되는지.”

    박현호의 살기에 불안을 느낀 김 대리는 괜히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들켜선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요, 전무님. 어차피 우리는 종편이잖아요. 솔직히 처음 개국할 때만 해도 종편은 아예 안 보겠다고 했던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잖아요. 그때에 비하면 시청률도 많이 올랐고 종편이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도 줄어들었는데 전무님이 굳이 지상파에 버금가는 시청률에 집착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집착? 김 대리는 그걸 집착이라고 봤나 봐?”

    “죄,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잠시 뜸을 들인 그가 입을 열었다.

    “난 그저 그런 종편 채널에 만족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강력한 미디어 채널의 수장이 될 거거든. 그러려면 누구나 쉽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드라마로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리고 그걸 지금 방해하는 게 송추원이고!”

    어쨌든 송추원 뒤에서 그를 꼭두각시로 이용하고 있는 형이 채널 DBN까지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술수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으려는 형을 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절대 가만 안 둬. 두고 봐. 일내고 만다, 내가!”

    이렇게 된 이상 경우를 반드시 데리고 와 채널 DBN의 드라마를 성공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일단 사람을 잡으려면 그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일의 시작. 스튜디오 글로리로 쳐들어가면 좋겠지만 그러기엔 아직 박현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또 무슨 짓을 꾸미려나 불안감에 휩싸인 김 대리는 자신을 향한 박현호의 매서운 눈빛에 흠칫 놀라 불안하게 떨어야 했다.

    “왜, 왜 그렇게 보시는 건지……?”

    “스튜디오 글로리 민경우 대표 스케줄 좀 알아봐.”

    “예? 누구요?”

    “왜 그래? 뭐 찔리는 거라도 있어?”

    “하, 하하, 찌, 찔리다니요. 아무렴 제가 그쪽이랑 내통이라도 했다 그런 말씀이세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

    이런 걸 두고 자기 무덤을 판다고 했던가? 자신을 보는 박현호의 날카로운 시선에 김 대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 들키는 건가 싶었으나 다행히 박현호는 이내 관심을 꺼 버렸다. 평소 아부나 떠는 하찮은 김 대리가 차마 자신을 배신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 * *

    어디선가 날아온 서늘한 기운에 경우는 몸을 떨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아요? 혹시 감기 걸린 거 아니에요?”

    “감기는 아니고…… 그냥 좀 한기가 들어서요.”

    경우의 말에 강희주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정말 열은 없네.”

    “괜찮다니까 그러네. 어서 드라마 봐요.”

    경우의 말에 강희주가 다시 드라마의 집중하기 시작했다.

    결혼 전엔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그녀였지만 그래도 최근엔 경우의 드라마를 함께 보기 위해 드라마가 하는 날이면 일찍 퇴근하는 그녀였다. 경우는 나름 자신을 신경 써 주는 그녀가 고맙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을 둘러싼 비밀을 알게 된 드라마였기에 괜찮은 건지 걱정이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빤히 쳐다본 탓인지 강희주가 돌아보며 물었다.

    “왜요? 왜 그렇게 보는데요?”

    “아니, 그…….”

    “하여간 거짓말 참 못 해. 아니지, 글로 쓰는 거짓말은 잘하면서 왜 말로 하는 건 잘 못하는데요?”

    “…….”

    “아직도 신경 쓰여요? 내가 저 드라마 때문에 안 좋은 생각 떠올릴까 봐?”

    “아니라곤…… 못 하겠어요.”

    “괜찮아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냥……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우리 할머니 생각하니까 다른 건 다 그냥 용서가 되더라고요.”

    “정말…… 이요?”

    “내가 거짓말을 왜 해요. 걱정 말아요. 그리고 경우 씨가 옆에 있잖아요.”

    그녀의 말에 경우가 미소를 지었다.

    “참, 윤 비서 언니 소식은 알아요?”

    <태양의 제국> 원작자이자 오랫동안 비서로 일했던 윤혜승의 행방을 강희주는 궁금해했다.

    “외국으로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미국으로 출국한 것까지는 확인했는데 그 이후는 모르겠어요.”

    “잘 지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참 원망했을 텐데 우리 집에 있는 동안 해코지한 적 한 번도 없었어요. 일도 열심히 했고.”

    “할머니는 아직 모르시는 거죠?”

    “윤 비서 언니가 누구 딸인지요? 모르세요. 앞으로도 할머니는 모르시게 할 생각이에요. 알아 봐야 좋을 거 없으니까.”

    그녀의 말에 경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음…… 요즘은 회사에 붙어 있고 별다른 스케줄은 없다, 이거지?”

    “촬영이 다 끝나서 편집에 신경을 쓰는 중이랍니다. 편집까지 직접 챙긴다는 모양이에요.”

    “작가가 드라마 썼으면 됐지, 뭐하러 편집까지 신경을 써?”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아…… 이래가지고는 도통 만날 수가 없겠는데…….”

    “예?”

    이 인간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혹시라도 자신을 향한 괜한 의심을 하지 않을까 걱정한 김 대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스케줄은 아니긴 하지만 이번 문체부에서 주관하는 컨텐츠 대상에 스튜디오 글로리가 상을 받기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기 참석하지 않을까요? 물론 대외적인 행사엔 공동대표인 김종수 대표님이 주로 참석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잖아요.”

    “흠, 확실히 그럴 듯하기는 하네.”

    어쨌든 그렇게 일단락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박현호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지금 뭐라고 했어? 컨텐츠 대상? 그거 지금까지 우리가 받았던 거 아냐? 스튜디오 글로리가 받는다면 우리는?”

    “저, 그게…… 오 대표님이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이럴 땐 남한테 떠넘기는 게 제일이었으니.

    “후우, 알았어. 나가 봐.”

    “네. 아, 유니언 스튜디오는 상을 못 받지만 우리 쪽 프로듀서 하나가 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래? 그건 다행이네.”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싶었던 김 대리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은 박현호는 다시 생각에 잠겼으니.

    “컨텐츠 대상이라……. 축하한다는 핑계로 우연히 만나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으나 막상 경우를 만나고 나선 생각했던 것들이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살살 남의 비위를 건드는 그놈의 자식 때문에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훗날을 위해 꾹꾹 참았던 그는 정작 필요한 용건은 꺼내지도 못했다.

    시상식이 끝난 후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박현호는 한쪽에 숨겨 놓은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머리를 헝클었다.

    “하아, 근데 이 자식을 어떻게 꼬시지?”

    보통의 작가들을 데리고 올 땐 일단 그쪽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돈을 제시하면 열에 일곱은 넘어왔다. 가끔 자존심이 세 자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 어쩌고 하는 걸 싫어하는 작가들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인간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대는 보통의 작가가 아닌 민경우. 마음은 아프지만 냉정하게 따지면 박현호보다 민경우의 재력이 더 빵빵했다.

    그가 인수한 것으로 알려진 S&Media가 소속된 새명 홈쇼핑의 최대 주주이자 현재 공동대표로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의 주가 총액도 유니언 스튜디오를 넘었으니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자신보다 경우가 조금 더 돈이 많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놈한테 고료 30퍼센트 올려 주겠다고 하면 콧방귀나 뀌겠어? 아니, 애초에 그놈 고료가 얼만지도 모르잖아?”

    돈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에 맞닥뜨리고 말았으니 그는 경우가 넘어올 수밖에 없는 카드가 뭐가 있을까 밤새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첫 번째 기회를 날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운 좋게도 경우를 만날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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