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8화 (208/250)
  • #208. 공수래공수거 (1)

    꼭 참석해야 할 시상식이라고 해서 상을 받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대통령 표창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도 문화 체육 관광부가 주최한 꽤 공신력 있는 시상식에서.

    오기 전 투덜댔던 일이 민망할 정도로 상을 받은 경우는 무척 기뻤다.

    그동안 스튜디오 글로리가 만든 여러 편의 드라마가 해외로 수출된 덕분에 해외시장 개척과 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상이었으니까.

    “이래서 나보고 꼭 참석하라고 하셨구나.”

    새삼 의미있는 자리에 자신을 보내 준 김종수에게 경우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보람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상패를 매만지며 여운에 잠겨 있는 그때 분위기를 확 깨는 목소리가 들렸으니.

    “이게 누구신가? 요즘 주식 시장에서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는 스튜디오 글로리의 민경우 대표?”

    “박현호, 네가 여긴 웬일이냐? 너도 상 받으러 왔냐? 근데 왜 난 못 본 거 같지?”

    비아냥대는 건 저쪽이 먼저였다. 그래서 경우는 일부러 그의 속을 긁는 말을 늘어놨다. 덕분에 박현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기는 했으나 의외로 되받아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인 만큼 절제하는 것일 테지.

    “내가 아니라 우리 프로듀서가 상을 받았거든. 아랫사람이 상을 받는데 대표가 격려해 주는 건 당연한 거 아냐?”

    그러고 보니 채널 DBN의 프로듀서 한 사람이 상을 받는 거 같더니 그 일을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제 사람을 챙기는 모습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긴 한데…… 네가 대표는 아니지 않냐? 그…… 너네 대표님 따로 있잖아. 송추환 사장님이었던가?”

    순간 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 듯 보였으니 아픈 곳을 적절히 건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쯤했으면 그냥 돌아갈 법도 하건만 화를 누른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참, 결혼했다며? 축하해. 바빠서 결혼식 참석은 못했다. 미안.”

    “애초 부른 적도 없는데 뭘. 그래도 고맙다.”

    이게 어른들의 대화라고 하던가?

    내용은 평범했지만 서로 말 속에 담긴 의미는 그렇지 못했으니 경우는 잠깐 동안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시상식 후 파티가 있다고 하더니 파티고 뭐고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럼 직원 격려 잘하고 다음에 보자. 보다시피 내가 좀 피곤하네.”

    경우는 그렇게 돌아섰다. 다행히 그가 따라 붙지는 않았다. 피차간에 편한 사이도 아닌데 처음부터 적당히 피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알다가도 모를 놈이야.”

    그렇게 돌아서는 경우를 보며 박현호는 생각했다. 도대체 저놈의 뭐가 특별한 거냐고. 지금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경우였다.

    미국에서 데려온 서필진을 뺏어 가지 않나, 영입하려는 작가들까지 번번이 저놈에게 빼앗겼다. 그것도 모자라 드라마가 경쟁 시간대에 붙기라도 하면 결국 시청률과 화제성까지 가로챘으니 생각할수록 짜증나는 상대였다.

    ‘도대체 저딴 자식의 뭐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아쉬운 사람도 자신이었고 결국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으니 박현호는 문득 지난번 오연옥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 * *

    유니언 스튜디오와 처음 합을 맞춘 <핏빛 와인 잔>이 시청률 참패를 겪은 이후 송지현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오연옥은 처음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당시를 떠올렸다.

    다른 건 없었다.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서 내가 직접 쓰자 했던 게 그 시작이었으니까. 그런데 드라마를 연이어 히트 치고 일일극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자 드라마에 대한 재미보다 시청률, 기록에만 집착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이럴 때마다 부르짖는 게 초심이라 하지만 그 별거 아닌 것이 힘을 발휘할 때가 있었으니 그때가 딱 그랬다. 그렇게 절치부심, 오연옥은 새 드라마에 올인했다. 덕분에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주말 드라마의 시청률을 다시 30퍼센트대로 올려놓았으니 히트작 제조기, 오연옥의 컴백이라 말할 정도였다.

    그 이후로도 유니언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한 드라마가 연이어 히트를 쳤다. 물론 그 드라마 모두 채널 DBN이 아닌 지상파에서 방송되었다는 점에 박현호는 아쉽기는 했으나 어쨌든 오연옥으로 인해 유니언 스튜디오의 영업이익이 올랐으니 박현호는 우선 그걸로 만족해야 했다.

    한때 그녀를 우습게 여기기도 했으나 오연옥이라는 이름값은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었다. 그 역시도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묶어둘 수 있는 계약 기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진원 대표를 통해 재계약을 제안했지만 돌아오는 건 거절뿐. 몸값을 높이려는 수작이라 생각한 그는 직접 오연옥과 만나 담판을 짓기로 했다.

    “좋습니다. 작가님이 지금 받으시는 고료에 30퍼센트를 더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고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저를 붙잡고 싶으신 건가요?”

    최고 몸값을 자랑했던 송지현의 고료를 이미 뛰어넘었다. 거기다 30퍼센트까지 더 올려 준다니 반응이 온다고 생각한 박현호는 역시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님 아니십니까? 어떤 제작사든 그런 작가님과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저를 그 정도로 생각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작가님의 실력은 누구보다 제가 인정하죠.”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거절하죠.”

    “예? 왜요? 설마 고료가 작은 겁니까? 좋습니다. 얼마를 원하시죠?”

    “아니요,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당신과는 더 이상 같이 일할 생각, 없습니다.”

    당신?

    순간 이 여자가 잘 나간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대어를 놓칠 수 없었던 그는 솟아오르는 화를 누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솔직히 말하죠. 당신은 최소한, 기본적으로 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거든요.”

    드라마에 대한 이해? 이해 같은 소리 하네.

    사람들이 심심할 때, 할 일 없을 때 보는 게 드라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해랄 게 뭐 있나?

    애초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면 인문학을 공부하면 되는 거지 드라마를 보며 공부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엔 감독의 작가주의가 존재하지만 드라마엔 그런 게 없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시청자들을 자극하는 클리셰만 있을 뿐.

    박현호는 오연옥이 거절하기 위해 괜한 소리를 하는 거라 여겼다. 아니면 있는 척해 보고 싶었다거나.

    “전무님은 드라마를 수단으로 보시죠? 돈을 벌 수단. 히트작을 내고 광고비를 많이 당겨 제작비를 건지고 영업이익을 내고. 맞아요. 그런 부분에서 보면 드라마 자체가 돈이라고 할 수도 있네요. 하지만 저한테 드라마는 꿈이에요.”

    꿈.

    현실에선 시궁창 인생을 사는 평범한 여자 앞에 백마 탄 왕자님 같은 건 나타나지 않는다. 평범한 줄 알았던 자신이 재벌가의 숨겨진 자식이라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학창 시절 나를 괴롭혔던 일진, 혹은 군대에 있을 때 죽이고 싶었던 선임을 다시 만나 복수하는 일 따위는 더더욱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오연옥은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는 거라 여겼다.

    내가 한 번도 꿈꿔 본 적조차 없는 일들이 드라마 속에선 가능하니까. 주인공과 같이 웃고 같이 울 수 있었던 건 그에게서 나를 보고 대리 만족을 느낀 덕분이었으니.

    “소설이라면 모를까 드라마는 혼자 만드는 게 아니죠. 팀이 같이 만들어 가는 겁니다. 그러니 같이 일하는 사람이 드라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저한테는 아주 중요해요. 그런데 전무님은 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하나도 없어요. 그게 제가 거절하는 이유입니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긴 했지만 결국 완곡한 거절. 박현호는 그녀가 최근 앙숙과도 같았던 송지현과 자주 어울린다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근 송지현 작가랑 자주 어울린다는 소문이 있던데 설마 스튜디오 글로리로 가려는 건 아니겠죠?”

    “그거야 말로 내 마음인데 신경 쓰실 일은 아니지 않나요?”

    결국 스튜디오 글로리에 가기 위해 개소리를 늘어놓는 거란 생각에 화가 치솟았다. 하지만 오연옥이 이후 계약을 체결한 곳은 의외로 스튜디오 글로리가 아닌 내일 프로덕션. 그나마 스튜디오 글로리에 가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겼다.

    생각해 보면 오연옥만 그랬던 게 아니었다. 다른 작가들도 한 번 일해 보고 나면 재계약을 꺼렸다.

    “도대체 뭐가 문젠데? 그렇게 좋아하는 돈 더 준다잖아? 돈이면 장땡이지 뭘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아?”

    투덜대던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태양의 제국>. 극본을 쓴 작가의 이름을 본 그는 어이가 없었으니.

    “또 민경우야?”

    1화를 보지 않았음에도 이해가 되는 전후 내용은 물론, 흡입력 있는 전개, 다음 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결말까지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를 앉은 자리에서 집중하고 말았다.

    같은 시간대는 아니었으나 비슷한 시간대의 채널 DBN의 드라마와는 관심도부터가 달랐다. 경쟁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대결. 신경 쓰는 사람은 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진이나 작가도 아닌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사실이 더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자식들 간에 다투는 막장 스토리밖에 더 돼?”

    하지만 아무리 깎아내리려 해도 정신 승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주가 총액도 스튜디오 글로리가 앞서 버린 상황에서 이러다 드라마 명가라는 타이틀마저 빼앗기는 건 아닌가 싶은 위기감이 들었다.

    물론 이미 다른 사람들은 뺏겼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민경우, 그 자식보다 더 잘 쓰는 작가를 데리고 오는 수밖에. 그런데 누가 있지?”

    누군가의 개입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소신이 있는 작가, 작품성도 인정받으면서 대중성도 있는 작가, 무엇보다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는 그런 작가를 데리고 와 드라마를 성공시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근데 그런 작가가 어디 있냔 말이지? 일단 신도현이나 오연옥은 안되고, 김준원도 지난번에 시작은 좋았지만 막판에 시청률이 망했단 말이야……. 드라마 시청률이 한 번도 떨어진 적 없이 승승장구한 작가는 역시나 송지현 밖에 없나?”

    하지만 이미 송지현을 영입하려다 실패했던 전적이 있었던 터, 거기다 그가 알기로 스튜디오 글로리와 계약 기간이 더 남아있었기에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말 우리나라에 인재가 이렇게 없었단 말이야? 할리우드에서 데리고 올 수도 없고…….”

    그 순간 박현호의 머릿속을 치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가만, 시청률이 한번도 떨어진 적 없고 승승장구한 작가, 작품성도 인정받으면서 대중성도 인정받은 작가가 한 사람 더 있잖아.”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

    “민경우.”

    그가 찾던 작가가 사실은 경우였다는 사실에 박현호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어차피 전속 계약을 할 것도 아니고 드라마 한 편쯤 같이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제안 같은데?”

    소속 작가의 드라마를 소속된 제작사에서 모두 제작하는 건 아니었다. 여건이 되지 않을 땐 다른 드라마 제작사의 힘을 빌리기로 했으니 박현호는 그런 식으로 경우에게 채널 DBN의 새 드라마를 맡겨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동지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박현호는 경우에게 어떻게 제안을 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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