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태양의 제국 (6)
새명 그룹 창립 기념일에 쓰러졌던 민 회장이 드디어 회사에 복귀했다. 가장 먼저 그를 반기는 건 민 회장의 두 손이나 다름없는 손 실장과 박 비서였으니 박 비서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꽃다발을 건넸다.
“누가 보면 금의환향한 줄 알겠군.”
“금의환향도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지요. 건강을 되찾아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하긴, 나 아니었으면 두 사람 다 끈 떨어진 연 신세나 매한가지 아닌가.”
“어디 저희 뿐이겠습니까? 새명에 딸린 식구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꼭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 어쨌건 돌아왔을 때 환영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구먼.”
오랜만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민 회장은 자신의 책상 위 명패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패를 바꿨군. 전에 건 어쩌고?”
“그게…….”
거짓말에 능통하지 못한 박 비서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민 회장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장남 정현이 자신을 대신해 이 자리에 앉을 때 자신의 명패는 어딘가에 버려졌다는 것을. 다시 돌아왔으니 버려진 걸 되찾을 수도 없고 새로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눈에 훤했다.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건 사람이나 명패나 똑같군.”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뭐 있나. 어쨌든 내가 이렇게 돌아왔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 그래, 나 없는 사이에 회사가 어떻게 굴러갔는지 확인해 봐야겠으니 그동안 정현이가 처리한 서류 전부 가지고 와.”
웃고는 있었으나 평소 민 회장을 곁에서 지켜봐 온 손 실장은 약간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이 일이 어떻게 끝이 날지 걱정될 정도. 어쨌거나 민 회장은 첫 출근을 하자마자 그동안의 서류를 전부 훑어보기 시작했다.
김강철이 그랬듯 새명 그룹 사람들에게 가장 궁금한 점은 그거였다. 민 회장이 복귀한 뒤 아들이 처리한 인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민 회장이 부재한 탓에 민정현 파와 민지선 파로 나뉘었지만 어쨌든 모두 민 회장과 함께 회사를 키워 온 사람들이었다. 자연히 그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말 현명하십니다.”
“또 뭐가 말이야?”
“직무 대행이 처리한 인사를 그대로 두는 대신에 계열사 시찰을 명목으로 인사 이동된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격려하셨으니 인사 처리에 불만이 있었다는 걸 에둘러 표현하신 게 아닙니까?”
“손 실장, 혹시 나 없는 사이에 아부 학원이라도 다닌 거야? 손 실장이 그렇게 말을 잘하는 줄은 처음 알았네.”
“칭찬으로 받겠습니다.”
넉살이 좋아진 손 실장의 모습에 웃었으나 금세 민 회장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회장님?”
“자네 혹시 우리 막내 드라마 봤나?”
“아, 이번에 시작한 드라마 말씀이죠? 아직 못 봤습니다.”
“언제 시간 나면 한 번 봐. 꽤 괜찮더군. 뒤통수가 얼얼하기도 하고 말이야.”
“…….”
“원작 소설을 드라마화했다지? 자네, 그 원작 소설, 읽어 봤나?”
“죄송합니다.”
“하긴. 상사 아들이 한 드라마도 바빠서 못 보는데 소설을 봤을 리가 없지. 괜한 걸 물어 되려 내가 미안하군.”
“아닙니다. 그런데 경우가 처음에 드라마 할 때 빼고는 통 그런 말씀이 없으시더니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이번 드라마가 회장님께 특별했나 봅니다.”
“암, 특별했고 말고. 발가벗고 거리로 나간 기분이었다네. 원작 소설이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면 이놈이 집안 망신시키려 했다고 생각했을 거야.”
“집안 망신이라니요? 듣기론 복수극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그래, 복수극이지. 복수극이고 말고.”
민 회장은 지난 주말 첫 방송을 시작한 <태양의 제국>을 떠올렸다.
* * *
“살펴 가세요.”
늙은 주인장의 인사를 받으며 이 회장은 밖으로 나왔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시간을 내 찾아오는 곳이었으나 결국 이번에도 아들을 보지는 못했다. 사랑했던 여자가 남기고 간 자신의 핏줄, 그 아이를 보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이었건만 이 회장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회장님, 무슨 근심이 있으십니까?”
꽤 오랫동안 자신의 기사를 하고 있는 오 기사가 물었다.
“일은 무슨. 그냥 노을이 예뻐서.”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내일도 날씨가 맑을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겠어.”
칼국수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기찻길이 하나 있었으니 마침 기차가 오는지 안전바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 회장의 차가 그 앞에 멈춰섰다.
문득 창밖을 보다 저 앞을 본 이 회장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저 멀리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었다. 아예 못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라도 아들의 얼굴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여기던 그때였다.
“어? 저 차 왜 저래?”
기사가 무심코 내뱉는 소리에 문득 그곳을 보니 차 하나가 좌우로 흔들리며 돌진하고 있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달리는 것처럼.
아닐 거라고 여기면서도 기차가 곧 다가온다는 경고음이 이 회장의 심장을 옥죄기 시작했다. 차는 멈추지 않은 채 달려오고 마침내 저쪽에서도 기차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회, 회장님!”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멈추지 않은 차가 이 회장이 탄 차를 향해 돌진한 것은.
* * *
쾅!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듯 달려가는 차. 때마침 달려오는 기차와 부딪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기차가 오기 직전 차는 기찻길을 건너고 말았다. 대신 맞은편에 대기를 하고 있던 차를 피할 수는 없었으니.
이찬수는 그 앞을 지나기는 기차 때문에 시야가 가려 초조하게 발만 구르고 있었다. 평소 몇 초면 지나가는 기차가 오늘만큼은 굉장히 더디게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마침내 기차의 꼬리가 지나가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이찬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보세요? 거기 119죠? 여기 사고가 났는데요, 여기가 어디냐면 말이죠…….”
이찬수는 전화를 걸면서도 다급하게 사고가 난 차 쪽으로 달려갔다. 정면으로 받아 버린 탓에 이미 운전자석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로 그때.
“으으, 으…….”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에 이찬수가 몸을 돌렸다. 뒷좌석에 한 남자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아직 살아있어!
이찬수는 구겨져 제대로 열리지 않는 문을 겨우 열어 노신사를 밖으로 빼냈다. 그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사고난 차량에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노신사는 물론 자신까지 목숨을 잃을 뻔했다며 놀라던 그때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으니.
희미하게 눈을 뜬 노신사가 이찬수의 얼굴을 있는 힘을 다해 쓰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손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르신!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어르신!”
마지막 순간이나마 아들의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긴 이 회장은 먼저 떠난 사랑하는 여인을 드디어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마침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 *
“네? 아버지가요?”
소식을 들은 이 회장의 자식들이 병원으로 향했다. 이미 긴급 수술에 들어간 상태였으니 자식들은 수술실 앞에서 아버지의 수술이 끝나기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야기 들었어? 오 기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군.”
“도대체 어떤 자식이야?”
“어떤 미친 놈인지는 몰라도, 직장에서 해고되고 아무나 죽으라고 액셀을 밟았던 모양이야.”
“그 새끼는 어떻게 됐는데?”
“목숨이 간당간당 붙어있나 보더라고. 차라리 잘됐지. 아버지를 이 꼴로 만들고 제깟 놈이 편히 죽었으면 안 되잖아.”
“그나저나 아버지는 그런 외진 곳에 왜 가신 걸까?”
“그러게…….”
이 회장의 자식들은 아버지가 어딜 다녀왔는지, 사고를 낸 미치광이에게 어떤 복수를 해야 할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물론 모두 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만은 아니었다.
“누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까부터 심각한데 혹시라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야?”
“그럴리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리가 없잖아. 안 그래?”
“하긴, 저승사자가 눈앞에 나타나도 쫓아낼 양반이지.”
“그게 아니라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글쎄. 내가 보기엔 너희들도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 그래?”
이화영의 되물음에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게 그들 역시 누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태양 그룹. 태양 제국이나 마찬가지라 불릴 정도의 대한민국 제일의 기업 태양 그룹의 수장이 쓰러졌다. 그렇다는 건 그를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
이 회장의 자식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하느라 그 뒤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 * *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맞아. 손가락을 깨물면 다 아픈 법이야. 근데 그 중에 더 아픈 손가락도 있기 마련이지.”
“정현이 얘기군요.”
민 회장은 이찬수를 보며 큰아들 정현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찬수와 정현이는 닮은 점이 많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남기고 간 혈육. 같은 자식이었지만 어미를 잃은 그 아이가 안 됐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편애했다. 아니, 알고 그랬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물려주기 위해.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덕분에 정현이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새명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낳게 했으니까.
“내 죄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어.”
“회장님…….”
“그 드라마에 나 같은 멍청이가 하나 나오더군.”
후계를 정해 놓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당한 사고. 그리고 단 하나 남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자식들. 예기치 못한 이 회장의 부재는 회사의 혼란을 야기했다. 곧 아비규환이 될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
제대로 된 후계를 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이미 알아 버렸다.
“자네 그거 아나? 난 내가 특별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어.”
“특별…… 하시죠. 대한민국의 경제를 이끌어 나가는 대기업의 주인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말 어디가서 했다간 욕먹어. 회사는 회장의 것이 아니라 주주들의 것이라고 시민 단체에서 누누이 떠들고 있지 않은가.”
“그렇긴 합니다만.”
“알아.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런데 이번에 알게 됐어.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사실은 통속극에 나온 이야기 속 주인공과 하등 다를 게 없다고 말이야.”
“…….”
“난 이미 이번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었어. 전에 경우가 그랬거든. 사심 없이 우리 새명을 제대로 이끌어 갈 후계자를 뽑으라고 말이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가슴으론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
“자식들 중 하나를 고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이 자식이 괜찮다 싶으면 다른 자식이 마음에 걸리는 게 부모 마음입니다.”
“그래. 그래서 이번엔 제대로 해 볼 생각이야.”
민 회장의 눈빛에서 어떤 의지를 읽은 손 실장은 이제야 제대로 된 후계 경쟁이 시작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이놈의 나라엔 무슨 행사가 이렇게도 많은 건지 경우는 투덜대고 있었다. 이런 날은 그냥 집에 가서 좀 쉬었으면 좋으련만 김종수까지 나선 마당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네? 평소엔 대표님이 가셔 놓고서 왜 저한테……?’
‘그동안 작가님이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은 제가 다 참석했죠. 그치만 이번만큼은 작가님이 가셔야 할 것 같아서요.’
대외적인 행사에 참석하던 김종수 대표가 이번만큼은 자신이 가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으니 못 하겠다고 할 수 없는 노릇. 언제 준비했는지 갈아입을 정장이며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김강철까지 대기해 있었다.
“근데 시상식 이름이 뭐라고 했지?”
“한국 컨텐츠 대상이라던가?”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 시상식 참 많아. 들어 보기 전까지는 그런 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내 말이. 도착했다, 그만 내려.”
잠시 대화를 나누던 사이 어느새 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에 리모델링을 했다고 하던데 경우는 그 전이나 이후나 코엑스는 처음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