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6화 (206/250)
  • #206. 태양의 제국 (5)

    놀란 마음에 사무실로 뛰어온 경우에게 전해진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

    “아니, 음성이 삭제되었다니요?”

    다른 것도 아니고 오늘 밤 방송이 나가야 할 드라마 편집본의 음성이 일부 지워졌다는 거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편집본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드라마 편집을 맡은 조연출이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옆에 선 안청모가 그에게 있는 욕, 없는 욕까지 다 하고 있었으니 경우는 매형에게 저런 면이 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긴 드라마 앞에선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오히려 저런 반응이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를 일.

    경우 역시 화가 나는 것도 있었지만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오늘 밤 방송은 그야말로 방송 사고. 그나마 방송이 나가기 전 음성이 삭제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복원은 안 되는 겁니까?”

    “이런저런 방법을 다 찾아봤지만 복원이 안 됩니다.”

    “그럼 하는 수 없죠. 후시 녹음이라도 해야죠.”

    “그게…….”

    곤란해하는 김종수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주인공인 한대건 씨가 드라마 홍보차 예능 출연을 위해서 외국에 나가 있거든요.”

    “외국이요?”

    설상가상은 이럴 때 쓰는 말이라고 했던가?

    “오늘 밤 안으로 귀국한다고 하는데…….”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후시 녹음도 불가능하다, 이거죠?”

    드라마 작가로 일해 오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문제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송 전 촬영을 다 마쳐 이번엔 좀 여유롭게 진행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시작도 하기 전에 큰 문제가 벌어지고 말았으니.

    “이거 대박이 얼마나 나려고 이러는 건지…….”

    드라마를 찍을 때 사고가 일어나면 대박이 난다는 속설로, 경우는 가라앉은 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띄워 보려 했다. 자신까지 가라앉아 있어 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특히 경직된 상태에선 좋은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경우는 일단 음성이 삭제되었다는 부분을 확인했다. 소리가 나지 않은 상태에서 배우들이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잠시 그 장면을 돌려 보던 경우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자 마침내 방법이 떠올랐다.

    “일단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경우가 제시한 것은 2가지 안이었다. 하나는 후시 녹음.

    음성이 지워진 부분은 <태양의 제국> 1화 후반부. 다행히 주인공인 한대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배우들의 스케줄은 괜찮았다. 후시 녹음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괜찮다고 응해 줬으니 일단 다른 배우들의 녹음을 끝낸 뒤 드라마가 방송되기 전 한대건이 도착하면 한대건이 나오는 부분만 다시 녹음해 방송에 내보낸다는 방안이었다.

    “시간이 아슬아슬하기는 하겠지만 괜찮은 방법인 것 같네요.”

    과거 쪽대본과 당일 촬영이 난무하던 시절에 내려오던 스킬로, 70분 드라마를 반으로 나눠 전반부를 먼저 방송하는 동안 나머지 후반부를 편집해 방송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아슬아슬 방송 사고를 피해 방송을 해 왔던 경험이 있는 이들은 첫 번째 안이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역시 문제가 있었으니.

    “만에 하나 비행기가 연착되기라도 해서 한대건 씨가 늦게 도착하면 어떻게 하죠?”

    “그래서 두 번째 안을 준비해 놓을까 합니다.”

    두 번째 안이 뭘까 궁금해하던 그때 경우는 웃으며 이번 사건의 원흉이 된 조연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PD님은 저와 함께 가시죠.”

    “어, 어, 어디로……?”

    “어디긴요. 편집실이죠. 아무렴 지옥으로 끌고 가기야 할까요?”

    순간 조연출은 미소 짓는 경우가 지옥에서 온 사자보다 더 무섭다고 느껴졌다.

    * * *

    비행기가 연착된 것은 아니었으나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은 탓에 착륙하는 것부터 입국 수속까지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미 출발하기 전 스튜디오 글로리 측의 전화를 받았던 한대건은 마음이 바빴다.

    “형, 얼른 서둘러. 이러다 정말 늦겠어.”

    “같이 가, 대건아.”

    몸집이 있는 한대건의 매니저는 빠른 걸음의 그를 따라잡느라 숨이 찰 지경이었다. 축지법이라도 쓰는 건지 가뜩이나 사람 많은 공항에서 한대건은 앞으로 쭉쭉 나아가고 있었다.

    막 입국장을 나온 그 순간 한대건이 멈춰 섰으니 캐리어를 끌고 오던 매니저가 멈춰선 그와 부딪치고 말았다.

    “뭐, 뭐야? 왜 그래?”

    갑자기 멈춰선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던 그때 한대건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공항에 설치된 TV였으니 <태양의 제국> 1화가 방송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울리는 한대건의 전화.

    “여보세요? 아, 작가님. 네,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었죠?”

    [아닙니다. 저희가 배우님께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거죠.]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어도 좋았을 텐데…….”

    [혹시 걱정하실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방송은 무사히 나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라고요.]

    “그래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배우님 연기 괜찮다고 실시간 반응 장난 아닌데요? 촬영하느라 힘드셨을 텐데 댁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쉬세요. 다음에 뵙죠.]

    “네, 작가님.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는 그에게 매니저가 들러붙어 물었다.

    “민 작가야? 민 작가가 뭐래?”

    “다 해결됐으니까 올 거 없다고 가서 쉬래.”

    “해결이 돼? 아니, 주인공도 없이 어떻게 녹음을 했길래 쉬래?”

    다 죽어 갈 것처럼 말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괜찮다고 하는 건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는 매니저는 한대건이 아까부터 그 자리에 선 채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처럼 첫 주연을 맡은 드라마의 첫 방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이라 여겼던 그가 한대건의 어깨를 다독였다.

    “가자. 첫 주연인데 본방 사수 못 해서 아쉽긴 하다만 다시 보기로 보면 되지.”

    “그게 아니라…….”

    그는 여전히 TV화면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드라마가 대본이랑 좀 달라졌어.”

    “뭐?”

    “저걸 저런 식으로 해결했구나.”

    감탄하며 보고 있는 한대건의 모습에 의아한 매니저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 * *

    녹음실에선 안청모의 지휘 아래 배우들의 녹음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편집실에선 혹시 모를 두 번째 안이 진행되고 있었으니.

    가뜩이나 거의 밤을 새운 편집 탓에 눈알이 빠질 듯 아프고 졸음이 밀려왔던 조연출은 커피로 달아나려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다. 경우의 눈치를 보며 몰래 하품을 하던 그는 지은 죄가 있어 경우가 뭘 하는지 묻지도 못한 채 경우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경우는 그날 촬영했던 부분을 전부 보고 있었다. NG가 난 장면이나 씬 촬영이 아니더라도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부분까지 전부 돌려 보는 중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들여다보던 경우가 입을 열었으니.

    “PD님, 여기 이 부분하고 이 부분을 잘라서 여기다 이어 붙여 보죠.”

    “어? 그렇게 되면 원래 대본 내용하고는 달라지는데요?”

    “일단 제 말대로 해 보세요.”

    경우가 말한 대로 장면들을 편집해 이어 붙이고 거기다 잔잔한 배경 음악을 깔았다. 그리고 후시 녹음을 했던 다른 배우들의 대사가 배경음과 함께 들어가자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장면이 연출되고 말았으니, 놀란 조연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 작가님 이거…….”

    “다행히 생각보다 장면이 잘 어울리는 거 같죠?”

    “어울리다마다, 이게 원래 장면보다 더 나은 것 같은데요? 아니, 그냥 배경음을 깔았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죠?”

    “정말 슬픈 장면에서는 오히려 감정을 절제하는 게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거든요. 어른들은 소리 내서 우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애들이 그렇지. 그래서 더 슬프게 느끼는 거예요. 찬수가 울음을 삼키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원래 장면은 삼촌이 다쳤단 소식에 서둘러 병원에 간 이찬수가 죽은 삼촌을 발견하고 오열하는 장면이었다. 삼촌과 같이 시위에 참가했던 상가 사람들의 대화로 삼촌의 상태를 알게 되면서 이찬수의 분노가 더욱 커지는 씬이었다.

    그런 장면을 삼촌이 숨지기 전 병원에 도착한 찬수에게 마지막 말을 전하는 장면으로 탈바꿈되었다. 촬영본을 살펴보던 경우는 두 사람이 원래 대본상에는 없었으나 긴장을 풀기 위해 즉흥 연기를 하던 장면을 활용하기로 했다.

    ‘삼촌, 이대로 가시면 저녁은 뭘로 먹으라고요?’

    ‘고, 곱창…….’

    ‘사, 삼촌!’

    이랬던 장면을 대화 소리를 죽이고 배경음으로 대화 내용을 덮어 버리니 삼촌의 임종을 지켜보는 조카의 슬픈 장면으로 탈바꿈했다. 애초 분노에 맞춰졌던 초점이 슬픔으로 이동한 거였으니 편집만으로 명장면이 연출되었다.

    “작가님, 이제 보니 편집에도 소질이 있으셨네요?”

    “소질이 있다기보다 드라마를 쓸 때 한 장면을 두고도 여러 각도로 생각을 하니까요.”

    그 말은 이미 그 장면을 쓰면서 이와 비슷한 장면도 생각했다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생각과 비슷한 장면을 발견했으니 알맞게 쓴 거였고.

    조연출은 그런 경우를 보며 도대체 이 드라마 한 장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는 건지 그의 머릿속엔 뭐가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한대건의 귀국이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두 번째 안이 방송에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 누구도 그 장면에 이런 비하인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명장면이 되었다.

    * * *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칠게 넥타이를 푸는 남편의 모습에 배예원은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남편이 퇴근 후 다녀오는 곳은 바로 본가. 아버지를 만나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을 테니 무슨 일이 있었다면 당연히 거기서 있었음이 분명했다.

    “아버님이 뭐라 하셔? 왜? 일 못했다고 난리야?”

    “그게 아니라…… 복귀하시겠대.”

    “그거야 아버님 깨어나셨을 때부터 이미 예상한 일이었잖아. 이렇게 매일 아버님께 불려 가고 꼭두각시처럼 일하는 것도 못 할 짓이라며? 그냥 한 소리였어?”

    “그게 아니라…… 사장을 시켜 주신다네.”

    “사장? 사장이면 좋은 거 아냐? 얼굴이 왜 그러는데?”

    “물산 사장이 아니니까 그렇지.”

    “물산이 아니라니……. 그럼? 아버님이 당신 보고 물산에서 나가라고 하신단 말이야? 아니, 어디로?”

    역시나 놀란 아내의 반응에 민정현은 조금 전 본가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마침 씨랩스 인수합병을 추진했으니 이참에 새명 자동차를 맡아서 해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사장 자리를 주마.’

    누가 들으면 꿀 빠는 자리, 그것도 사장 자리에 올랐다며 부러워했을지 모르지만 민정현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직 새명 물산밖에 없었다.

    동생인 지선이나 준호가 유통과 건설에서 일했던 것과 달리 그는 처음부터 새명의 지주 회사였던 새명 물산에서 일했다. 지난번 준호가 물산에 들어오고 싶어 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물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후계자라는 인식을 이사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물산을 나가라는 건 그게 아무리 승진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입장에선 좌천이나 마찬가지. 이제 동생들과 똑같은 위치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버지가 날 더 이상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으신 걸까?”

    “그럴 리가 있어? 당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해 왔는데?”

    “그럼 뭐야? 왜 나를 쫓아내는 거냐고?”

    “쫓아내는 게 아니야. 생각해 봐. 전무나 부사장이 아니라 사장이야. 어쩌면 당신이 그동안 직무 대행으로 일해 왔던 걸 높이 사신 걸 수도 있어. 이번에 아예 자동차를 맡겨서 당신의 능력을 제대로 보려는 게 아니실까? 난 그렇게 생각되는데?”

    “정말? 아버지 뜻이 정말 그런 걸까?”

    “그렇다니까. 그룹의 후계자가 되는 일이야. 평생 아버님 밑에서 일만 하다가 회장 자리에 올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셨을 게 분명해. 아마 아버님 이번에 쓰러지고 생각이 많으셨을 거고. 그래서 당신한테 사장 자리를 맡기신 게 아닐까?

    “…….”

    “내 말 믿어. 계열사 하나 맡아보지 않고 그룹을 경영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어. 솔직히 지선 아가씨 새명 유통 대표가 된 뒤로 날개 달린 듯 날아올랐잖아. 당신에게도 그런 모습이 보고 싶으셨던 걸 거야.”

    “당신 말대로라면 좋겠는데…….”

    민정현은 쓰러지듯 아내의 무릎 위로 누웠다. 그러자 진정하라는 듯 배예원이 남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이 그동안 직무 대행 맡아 왔잖아. 제대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사장까지 맡길 리 없었겠지. 당신한테 힘을 실어 주고 싶으셨을 거야. 이번 프로젝트만 제대로 성공한다면 다음은 새명 그룹의 회장이 될 테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

    “알았어. 당신 말대로 할게. 고마워, 여보.”

    배예원 역시 새명 물산이 새명 그룹에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불안해하는 남편을 다독이는 게 급선무. 남편을 달랬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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