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5화 (205/250)

#205. 태양의 제국 (4)

자식들은 물론 며느리에 사위까지 모두 모여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팔자에 없는 연극을 하려니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며 이골이 난 한 박사도 살짝 긴장이 되었다. 간단한 진찰을 마친 그가 민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컨디션은 좀 어떻습니까?”

“푹 자고 일어난 기분이야. 거뜬해. 언제 아팠나 싶게 괜찮아.”

“다행이군요.”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 준호가 물었다.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하셨잖아요. 정말 괜찮은 겁니까? 나중에라도 후유증이 있거나 그런 거 아니냐고요?”

“준호야. 한 박사님께 무슨 말버릇이야?”

“죄송해요. 그렇지만 어머니, 아버지가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건 사실이잖아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다 보니까―.”

“그럴 거 없다. 한 박사 만큼은 믿어도 좋아. 내 주치의로 있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잖냐.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다만, 한 박사한테 너무 그러지 말거라.”

“……네, 아버지.”

그렇게 분위기가 정리되자 한 박사가 입을 열었다.

“회장님은 혈관 쪽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앞으론 술도 줄이시고 특히나 담배는 안 됩니다.”

“그래도 그렇지, 갑자기 인생의 낙을 끊으라고 하면…….”

“인생의 낙이 아니라 독입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라면 끊으셔야죠.”

“한 박사, 이제 보니 저승사자가 따로 없구만. 하하.”

“술은 줄이시고 담배는 반드시 끊으셔야 합니다. 병원에서 정해 준 날짜에 정기 검진만 오시면 앞으로 20년은 더 일을 하는데 문제없을 겁니다.”

“20년이라……. 20년이면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나?”

“20년 뒤에 여든은 지금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회장님. 하지만 지난번처럼 제 경고를 무시하시고 담배를 계속 피우신다면 그땐 저도 도리가 없습니다. 앞으로 담배 권하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저승사자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참 살벌하게도 말하는 군.”

“그러니까 당신도 이번엔 한 박사님 말씀 좀 들어요.”

“알았어. 알았다니까.”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던 민 회장은 한쪽에 말 없이 서 있던 장남을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정현이는 내가 20년 더 일한다니까 아쉬운 눈치 같구나.”

“네?”

“아니에요, 아버님. 이이가 아버님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요.”

“농담이다, 농담. 내가 아무렴 정현이를 모를까. 형만 한 아우 없다고 얼마나 걱정이 많았으면 자식들 넷 중에 정현이 얼굴이 제일 헬쓱해졌겠어? 여보, 정현이 약 한 제 지어 주지 그래?”

“알았어요. 당신 거 지으면서 정현이 것도 하나 짓죠.”

“아무튼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아버지.”

“그러게요. 안 깨어나셔서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몰라요.”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능청스럽게 말하는 경우의 모습에 민 회장이 살짝 웃었다.

“왜? 내가 안 깨어났으면 결혼식 못 할까 봐 걱정했던 건 아니고?”

“무슨 그런 말씀을. 그런 거 아니에요. 전 이때쯤이면 아버지가 깨어나시겠구나 싶어서 그렇게 걱정도 안 했다고요.”

“그래? 너한테 그런 신통력까지 있는 줄 몰랐구나.”

농담 한마디 씩 하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는데 민정현만이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 배예원이 남편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 바람에 정신이 든 민정현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참, 정현이 네가 나 대신 직무 대행 자리에 올랐다면서?”

“……네, 네?”

이제 자신은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순간, 민 회장이 내놓은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당분간은 그대로 직무 대행을 맡는 게 어떨까 하는데?”

다들 예상 외의 대답에 놀랐으나 특히 민정현이 가장 놀랐다.

“지금…… 이대로 있어라, 그 말씀이세요?”

“그래. 한 박사는 괜찮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회사에 복귀하는 건 그렇지 않겠냐?”

“네. 그, 그렇죠. 알겠습니다.”

민정현은 지옥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민 회장이 다음 말을 덧붙이기 전까지.

“대신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내게 말해 주려므나. 네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

* * *

상왕을 알현하는 세종의 마음이 이랬을까, 아니면 뒤에 앉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정사를 돌본 사도 세자의 기분이 이랬을까?

매일 퇴근을 한 후 민정현은 아버지 집으로 찾아가 그날 있었던 회사 일에 대해 보고 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갑작스러운 방해물이 등장했을 때 그걸 인지하고 급정지를 제대로 할 수 있냐는 문제죠. 그 문제만 해결된다면 자율 주행이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겁니다.”

“그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회사 말이다.”

“씨랩스요?”

“믿을 만한 사람들이냐?”

“그럼요. 휴대폰 음성 인식 기술을 개발해 낸 사람들이에요. 실력에 있어서 만큼은 실리콘밸리 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실력을 묻는 게 아니다.”

“네? 그럼……?”

“인수합병을 너무 성급하게 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이런 일을 할 때는 신중을 기했어야지.”

경음 그룹은 물론이고 사돈이 될 재경 그룹 역시 그들과 접촉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그렇게 신중을 기하다간 다른 사람 손에 빼앗겨 손가락만 빨고 있을 지도 모를 일. 아버지는 너무 신중해서 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명동의 홍 사장도 비슷한 말을 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충분히 잘 알아보고 결정한 일이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회사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점 하나는 명심해라. 서류에 사인을 할 때는 수십 번 더 생각하고 해도 늦지 않아.”

“네, 아버지. 명심할게요.”

그렇다는 건 자신에게 이대로 새명 그룹을 물려주겠다는 뜻인가?

그는 애써 아버지께 미소를 지었다.

* * *

“늦었어요, 늦었어. 어떡하지?”

아침부터 강희주가 정신을 못 차리고 덤벙대고 있었다. 벌써 며칠 째 같은 모습을 봐서 그런지 경우는 덤덤하게 차 키를 건네고 가방을 내밀었다.

“이제 다 됐죠?”

“역시 경우 씨는 내 인생의 빛이야!”

“차 키 좀 찾아 줬다고 빛까지는―.”

“참, 오늘 <태양의 제국> 첫방송이죠? 나 늦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첫 작도 아닌데요.”

“그래도 결혼하고 처음 방송되는 드라마잖아요. 될 수 있는 한 방송 시작 전까지는 올게요.”

“알았어요. 조심해서 출근해요. 일도 열심히 하고.”

“네.”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강희주를 보며 경우는 다시 침대로 들어갔다.

민 회장이 퇴원을 한 뒤 한 달 반 정도 지난 후 크리스마스에 예정대로 결혼식을 치렀다. 제주도에 있는 재경 그룹 김 회장의 별장에서 친척 몇 명과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한 조촐한 야외 결혼식이었다. 한겨울이었음에도 제주도 날씨는 생각보다 포근한 덕에 야외 결혼도 문제 없었다.

물론 드라마 촬영 또한 막바지였고 강희주도 바빴던 탓에 신혼여행은 봄으로 미룬 상태였으니 제주도 호텔에서 2박을 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야 했다. 그나마 크리스마스가 금요일이었던 탓에 토요일과 일요일까지 쉴 수 있어 다행이었다. 날짜가 날짜인 만큼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릴 일은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경우가 살던 오피스텔에 신혼 살림을 차리는 게 좋다고 했으나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 그럴 수는 없다며 어머니 윤정숙이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강희주의 직장과 멀지 않은 서초동에 새 아파트를 마련했다. 두 사람 다 달라진 생활 환경에 적응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다른 건 다 조금씩 적응한다 쳐도 가장 큰 문제는 두 사람의 생활 사이클이 전혀 맞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출근 때문에 새벽형 인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강희주와 달리 낮밤이 바뀐 경우는 야행성이었다. 덕분에 이른 아침 출근을 하는 강희주 탓에 번번이 아침 일찍 일어나야 했으니 전보다 더 피곤한 것도 사실. 이참에 건강을 위해서라도 아내에게 맞춰 생활 습관을 바꿔 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 생각한 그는 다시 포근한 이불 속에서 잠을 청하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김종수였다. 어제 드라마 촬영도 마쳤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던 경우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표님?”

“작가님, 큰일 났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또 무슨 일이 터진 건가 싶은 경우는 한숨부터 나왔다.

* * *

“여보, 과일 좀 드세요.”

퇴원을 한 이후 민 회장은 아내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 중이었다. 최근 집에서 지내고 있으니 삼시 세끼 영양소를 골고루 챙긴 식단에 맞춘 식사를 하는 건 물론이고 혹시나 밖에서 먹을 때도 비서가 챙겨 윤정숙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채소와 과일을 적정량 챙기는 건 기본이었다.

아내의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는 민 회장은 결국 담배를 끊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건 대접을 빙자한 감시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슬슬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아내가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회사는 정현이한테 맡겨 놓을 생각이에요?”

“왜? 내 밥 챙겨 주기 이제 귀찮은 건가? 아, 집에서 삼시 세끼 챙겨 먹는 남편들 보고 삼식이 새끼라고 한다지? 당신도 그런 거야?”

“누가 그렇대요? 오히려 당신이 집에만 있어서 힘들어 하니까 그렇죠. 해도 바뀌었는데 이제 그만 출근해요. 그리고 애 좀 그만 괴롭히고요.”

“괴롭히다니. 내가 언제?”

“매일 집으로 퇴근 도장 찍으러 오라고 하고선 숙제 검사하듯이 그러는데 그게 괴롭히는 게 아니고 뭐겠어요? 그만하면 정현이 차라리 직무 대행 그만두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할 걸요?”

“…….”

“설마 당신 일부러 그런 건 아니죠?”

“일부러는 무슨. 괜한 사람 잡지 마.”

“내가 보기엔 당신, 정현이가 문병 몇 번 안 왔다고 삐친 거 지금 화풀이 하는 거 같은데요?”

“크흠, 당신은 날 뭘로 보고. 내가 그렇게 속 좁은 인간으로 보여?”

하지만 거짓말에 그리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으니 속내를 들킨 민 회장의 얼굴에 윤정숙도 그만 웃고 말았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정말.”

“참, 오늘 경우 드라마 방송 시작한다는 거 알고 있어?”

“벌써 그렇게 됐어요? 시간 한번 빠르네요.”

“당신 그동안 경우 드라마 제대로 챙겨 본 적 없지?”

“아무렴 내 자식 일인데 내가 그 정도의 관심도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전부는 아니더라도 간간이 보기도 했고 또 무슨 드라마를 했는지 정도는 확실히 알고 있다고요.”

“참 의외군. 당신은 드라마 같은 거 안 보는 사람인 줄 알았지.”

“당신이 나를 너무 몰랐던 거죠.”

정곡을 찌른 말에 민 회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려고 한 말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남편의 모습에 윤정숙의 가슴 속 응어리진 마음이 조금씩은 풀리는 것 같았다.

“당신이랑 같이 보는 건 처음인가?”

“아, 어쩌죠? 나 조금 있다가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저녁 시간 다 됐는데 어딜 간다 그래?”

“재필이 막내가 이번에 대학 합격했다나 봐요. 같이 식사나 하자고 해서요. 저녁 먹고 나면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요.”

“처남한테 가면서 지금 나만 쏙 빼놓고 당신 혼자 가겠다는 거야?”

“이런 일도 평소 참석을 했어야죠. 나도 재필이네 식구들 만나는 거 오랜만이에요. 당신까지 오면 부담스러워서 안 돼요. 그리고 당신 분명 거기 가면 술 마실 텐데 당분간은 절대 안 돼요.”

강하게 거절하는 통에 더 청하지도 못한 민 회장은 혼자 남아 함양댁이 챙겨 준 저녁을 쓸쓸히 먹어야 했다. 아내가 없는 집은 어쩐지 텅 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드라마가 시작할 때까지 무척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마침내 9시 30분이 되자 재미없는 뉴스를 보던 민 회장이 채널을 돌렸다. 막 <태양의 제국> 타이틀이 뜨기 시작했다.

“케이블이라 드라마가 일찍 시작하는 건 좋네.”

오프닝을 마치고 광고가 끝나자 그토록 기다리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민 회장은 드라마에 빠르게 몰입했다.

하지만 70분이 지난 후 드라마가 끝이 나자 민 회장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들은 드라마를 이렇게 만든 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아무래도 이제 그만 회사에 복귀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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