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4화 (204/250)
  • #204. 태양의 제국 (3)

    졸음도 쫓을 겸 휴식이 필요했던 김강철은 휴게실로 나왔다. 자판기 안에 들어있는 게 커피가 아닌 맥주였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을 하며 단추를 누르자 커피가 아래로 떨어졌다. 한 모금 마시고 돌아서던 그때 그 앞 테이블 위에 누군가 보다가 놔두고 간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하필 1면을 차지한 민정현의 사진에 김강철은 결국 자리까지 잡고 앉아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한때 민 회장의 부재를 새명 그룹의 위험 요소로 인식했던 외국인들이 주식을 매도해 주가가 휘청였지만 민 회장의 장남인 민정현 이사가 민 회장을 대신해 회장 직무 대행을 맡으면서 회사가 빠르게 안정화되고 있다. 이거 용비어천가가 따로 없구만. 회사가 어수선한데 안정은 무슨. 기자가 새명에 와 보기나 하고 기사를 쓴 거야? 지 생각을 적어 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현실과는 다른 기사의 내용에 어이가 없었던 김강철은 어디 신문인지 확인했다. 다름 아닌 명하일보, 민정현의 장인이 운영하는 신문사였다.

    “준호 형이라면 모를까 정현이 형이 이럴 줄은 정말 몰랐네. 진짜 너무한 거 아냐? 하긴, 기사에 진실이라는 게 어딨어? 다 짜고 치는 세상에.”

    김강철이 그렇게 투덜대던 그때 마침 대표실에서 나오는 한 무리의 양복쟁이들이 우르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투덜대는 그들의 모습에 또 하소연을 하려 찾아온 새명 그룹의 이사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경우 말마따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름만 새명을 쓰고 있을 뿐 계열 분리가 돼서 새명 그룹과는 다른 회사이건만 매일같이 찾아오는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 과장이 보기에도 답답한가 봐?”

    갑작스러운 소리에 돌아보니 그곳엔 박 실장이 서 있었다. 농땡이를 친 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현장을 딱 들킨 김강철은 당황했다.

    “박 실장님. 저 그러니까…… 식곤증이……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 일에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니까. 나 그렇게 꽉 막힌 사람 아냐.”

    평소 용건이 아니면 박 실장과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김강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잔뜩 얼고 말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박 실장 역시 캔 커피를 하나 가지고 와 김강철 옆자리에 앉았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사들이 떠나자 둘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리로 향했다.

    “김 과장이 보기에 이해가 안 되지? 그렇게 걱정되면 이 상황을 해결할 다른 해결책을 찾을 것이지 애들처럼 매일같이 찾아와 떼쓰기나 하고 말이야.”

    “솔직히 그렇죠. 어차피 여기 온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요.”

    “저거 대표님을 향한 은근한 압박이야.”

    “압박이요?”

    “그래. 대표님 편에 서서 그 꼴을 당했으니 뭐라도 하라는 압박. 뭐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서겠다는 경고. 어쨌든 저렇게 돌아가면서 주기적으로 찾아와야 대표님이 뭐든 액션을 취할 거 아냐? 생각 같아선 아마 회장님 병실까지 찾아가고 싶었을 거야. 흔들어 깨워서라도 회장님을 일어나게 하고 싶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밥줄이 달렸잖아.”

    “저 사람들 심정 모르는 건 아닌데요, 그래도 지금은 대표님이 더 힘든 거 아니에요? 저 사람들은 그냥 밥줄일 뿐이지만 대표님은 아버지 일이잖아요.”

    “그러게. 원래 남의 눈에 들보보다 내 눈에 티끌이 더 커 보이는 법이거든. 그래도 결국 회장님이 깨어나시면 해결될 일 아니겠어?”

    “만약에요. 회장님이 깨어나시면 그땐 어떻게 하실까요? 정현이 형, 아니, 민정현 직무 대행님이 그동안 했던 일을 그대로 밀고 갈까요, 아니면 원상 복귀할까요?”

    “글쎄, 그건 회장님만 아시겠지?”

    뭐가 되었든 당분간 새명에 바람 잘 날 없다는 건 확실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대표실에서 민지선이 밖으로 나왔다. 외투까지 입은 게 어딘가 외출할 차림새였다. 그 모습에 박 실장과 김강철이 서둘러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대표님, 어디 가세요?”

    “아무래도 병원을 좀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은 이대로 퇴근할 테니까 뒷일은 박 실장이 알아서 해 줘요.”

    “알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민지선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자 남은 두 사람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워커홀릭 민지선이 이 시간에 퇴근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든 탓이었다.

    * * *

    “저 왔어요.”

    “이 시간에 웬일이야?”

    “웬일은요. 걱정돼서 와 봤죠. 아버진 오늘도 그대로세요?”

    “응. 보다시피.”

    “어서 깨어나셔야 할 텐데 큰일이에요.”

    “곧 일어나실 거야. 회사는 괜찮아? 새로 쇼핑몰 세우려면 시간도 많이 들고 일도 많을 것 같은데?”

    “한 번 해 본 일이라 그런지 이번엔 그렇게 어렵진 않아요.”

    민지선은 자신이 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던 어머니가 관심을 보이자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결혼할 때까지만 해도 마음에 안 들어하는 모습이 눈에 보일 정도였는데 달라진 어머니 모습이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저렇게 되신 후로 어머니 역시 약해진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었다.

    “요즘도 이사들이 찾아와서 괴롭히니?”

    “그 얘긴 어디서 들으셨어요?”

    “왜? 병원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어?”

    “그건 아니고…… 그런 일까지 살피실 겨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말을 하는 딸의 얼굴이 어두웠으니 굳이 보지 않아도 상태가 어떤지 알 것 같았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가 꽤 많이 힘드셨을 거란 생각이요. 다들 아버지만 바라보고 있었잖아요.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 같아요.”

    윤정숙은 말을 하는 대신 딸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어깨에 올린 손을 통해 전해지는 어머니의 온기를 처음 느낀 민지선은 어머니가 자신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별 다른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딸이 돌아간 후 윤정숙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선이가 많이 힘든가 봐요. 듣기론 이사들이 찾아와 뭐라도 해 주길 바라는 모양인데 정현이 쪽에 선 주주들이 많으니 아무래도 힘들겠죠.”

    민 회장도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 정현이 직무 대행이 된 이후로 병원 안 찾아왔던 거 알아?”

    “……바빠서 그럴 거예요. 어쨌든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는 거잖아요. 잘하고 싶겠죠.”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 몰랐어.”

    “내가 낳진 않았지만 정현이 내가 키웠어요. 그렇게 막 키우지 않았다고요. 뭐, 관심을 꺼 버리긴 했지만 당신이 생각한 그 정도로 막돼먹은 아이…… 아니에요. 내가 낳은 자식 만큼은 아니더라도 정현이에 대해 아예 모르지 않아요.”

    살짝 후회의 빛을 내민 아내의 손을 다독였다.

    “알아. 알지. 근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네. 아는 건데도 서운해.”

    “그럼 그만 일어나요. 긴 병에 효자 없어요. 당신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을 작정인데요?”

    “글쎄. 오랜만에 이렇게 쉬는 것도 나쁘진 않은데?”

    “쉬는 게 나쁘지 않다는 사람이 그렇게 한숨만 쉬어요? 만날 일하던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려니 더 힘든거죠. 그만큼 했으면 충분해요. 이제 당신 자리로 돌아가요.”

    “이참에 애들한테 아예 맡기고 나도 당신이랑 같이 여행이나 다닐까? 전에 당신이 말했던 러시아 미술관도 가 보고, 갈 때마다 꼭 들른다는 이탈리아 맛집도 가 보고 싶어.”

    “그런 것도 해 본 사람이 하는 거죠. 천천히…… 천천히 조금씩 해요.”

    “그래, 그러자고.”

    아내의 말에 민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연극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다.

    * * *

    경우는 뉴스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새명에 관한 기사가 쏟아지고 있는 탓이었다.

    “새명 자동차가 음성 인식 비서 ‘리즈’의 핵심 개발 인력들로 구성된 미국 실리콘밸리의 AI 스타트업 회사 씨랩스를 인수합병했습니다. 앞으로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의 개발을 위해―.”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사인한 민정현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곧이어 사인을 마친 씨랩스의 대표와 서류를 주고받으며 악수를 한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동안 민정현이 내부 단속에 들어갔다면 다음은 외적인 일이었다. 아직 민회장의 장남으로 알려졌을 뿐 제대로 된 성과를 보이지 못한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차기 회장이 될 거라는 걸 각인시키려 새명의 미래 먹거리를 찾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하고 있었다.

    명하일보 산하 종편이 가장 먼저 보도하자 그 뒤를 따라 다른 종편과 뉴스 채널에서도 이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경우는 이 모든 게 역시 준비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아직 새명 그룹의 혼란만 인식하고 있을 테니 빠르게 신사업을 대중에 공개하는 것으로 성과를 보이겠다는 속셈이 눈에 뻔했다.

    “형이, 머리를 아주 잘 썼네.”

    뉴스를 보며 감탄을 이어 가던 그때 경우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네, 지금 뉴스 보고 있어요. ……그럼요. ……아, 그래요? 그럼 저도 출발할 게요. 이따 봬요.”

    전화를 끊은 경우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 형, 모처럼 주목받고 기분 참 좋을 텐데 이러다 우는 거 아냐?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대본을 조금 더 천천히 쓰는 건데……. 아니다, 여차하면 수정해야지, 뭐.”

    지금 한창 촬영 중인 드라마 <태양의 제국>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경우는 웃고 말았으니 형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 마음에 서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

    * * *

    경영기획본부에서 직속 부하로 함께 일하며 과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윤 부장이 민정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떻게 화면발은 잘 받는 것 같습니까?”

    “그럼요. 이사님이야 워낙 인물이 좋으시니 화면에 나오는 것만 봐도 빛이 나죠.”

    칭송하는 말을 건넸지만 어쩐지 돌아오는 그의 눈빛은 싸늘했으니 윤 부장은 금방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아, 회장 직무 대행님.”

    그제야 흡족하다는 듯 민정현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온 것을 보고서야 윤 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도 전보다 능글맞아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 들어서 민정현이 더욱 뻔뻔해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미처 몰랐던 그의 모습을 더 알아 가는 것 같아 윤 부장은 어쩐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줄 하나는 잘 섰으니 이대로 민정현이 회장까지 오르고 자신의 앞길도 탄탄대로가 이어지길 바랐다.

    “어쨌든 윤 부장님 수고 많았어요. 듣기론 2030년?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하려면 아직도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들 하죠?”

    “그거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우리 새명의 자본력이 있고 씨랩스의 기술력이 있는데 분명 그것보다 더 빨리 완전 자율주행이 가능할 겁니다.”

    “우리가 실리콘밸리에 그 많은 머리 좋은 사람들 보다 더 빨리 자율주행을 개발할 수 있다면 시장 선점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죠?”

    “당연한 말씀을요.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새명 자동차를 타고 다닐 겁니다.”

    희망에 들떠 있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상관없었다. 원래 꿈은 크게 가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게 단순한 희망 만은 아닐 것 같다는 확신 같은 게 들었다.

    그렇게 한참 들떠 있는 사이 민정현의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민정현이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회장 직무 대행님?”

    윤 부장의 말에도 민정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하지 못했다.

    * * *

    서둘러 아버지가 계신 병실까지 오긴 했으나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민정현은 자신이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으니 그는 천천히 호흡을 내뱉었다. 잠시 후 조금 진정되자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환한 빛이 쏟아지기라도 하는 듯 눈이 부신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곧이어 눈을 뜨자 보이는 광경에 얼어붙고 말았으니.

    “정현이 왔냐?”

    “아, 아버지…….”

    “그래, 오느라 수고 많았다.”

    쓰러지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아버지가 침대에 앉아 계셨다. 자신을 향해 웃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민정현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자신은 아버지가 이대로 깨어나지 않길 바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