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3화 (203/250)
  • #203. 태양의 제국 (2)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들 탓에 민지선은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대로 두고만 보고 계실 작정이십니까?”

    민정현은 회장 직무 대행이 된 직후 인사 이동을 단행했다. 주로 자신의 편에 서지 않은 사람들이 그 대상이 되어 한직으로 발령받았다. 반발하는 사람들에게는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결국 사표까지 받아 낸 탓에 혹시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을까 벌벌 떨던 이들은 결국 민지선을 찾아와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녀라고 뚜렷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정현이 생각보다 지능적이었던 게 무조건 자신의 편이 아닌 사람만 골라낸 게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실적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골라냈다. 창립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은 회사를 정상화한다는 명분으로. 그 때문에 함부로 반기를 들 수도 없었다.

    “보고 있지 않으면요? 우리가 지금 뭘 할 수 있죠? 긴급이사회에서 주주들의 회의를 거쳐 정식으로 회장 직무 대행이 되었어요. 그런 사람을 끌어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으십니까? 이미 다수의 주주들이 그가 직무 대행의 자리에 오르는 걸 찬성했다고요.”

    민지선의 지적에 다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칼바람이 불어 대고 있는데 언제 자신의 목이 떨어져 나갈지 알 수 없는 이들은 이렇게라도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그래도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여러분들 목까지 쳐내진 않을 겁니다.”

    “저…… 회장님은 차도가 없으십니까?”

    “아직은 별다른 변화가 없네요. 그렇지만 곧 일어나실 겁니다. 회장님이 얼마나 강한 분임을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 상황이 가장 답답한 건 오히려 그녀였다. 다들 돌아가자 민지선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맥주 한 캔을 완전히 비운 김강철이 답답하다는 듯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지선 누님, 진짜 힘들어하셔. 솔직히 누님이라고 별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오죽했으면 정현이 형한테 쫓아갔다니까?”

    “누나가?”

    “그럼 하루가 멀다하고 사람들이 찾아와 하소연 하는데 누님이 그냥 보고만 있을 사람이냐?”

    “자기 사람은 챙기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형은 뭐래는데?”

    “한마디로 딱 잘라 거절하더라고. 회사에 손해만 끼치는 인간들은 정리해야 한다나 뭐라나. 나 정현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소름 돋았잖아.”

    “너도 갔어?”

    “응. 그때 박 실장님이 바쁜 일이 있어서 내가 따라 갔어. 정현이 형 만나러 간다는데 누님 혼자 보낼 수 있어야지. 뭐 안에는 못 들어가고 밖에 서 있었는데 밖에까지 다 들리더라. 완전 차갑데. 하여간 이번에 다시 봤다니까.”

    “원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잖아.”

    분명 이야기를 들으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며 적어도 같이 화를 낼 줄 알았던 경우가 의외로 담담한 모습을 보이자 김강철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야, 넌 그게 다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라니.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너 준호 형이랑 정현이 형 뒤에 사람 붙여서 감시하던 놈이야. 두 사람이 일을 내면 뒷일까지 대비하던 놈이라고. 그런데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듯이 하고 있으니 내가 기가 안 막히겠냐?”

    김강철의 지적에 경우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막상 아버지가 쓰러지시니까 생각이 많아졌어. 아버지는 깨어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형제들끼리 다투면 안 되잖아. 아버지가 깨어나셨을 때 자식끼리 싸우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효자 노릇을 했는데?”

    “…….”

    “그래, 형제간에 우애 좋지. 그럼 지선 누나는? 누나라고 괜찮을 것 같아?”

    “새명 유통은 어차피 계열 분리가 되었으니까―.”

    “지금 새명 유통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난 그래도 최소한 너를 도와준 지선 누나한테 네가 이러면 안 된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누나는 내가 아니더라도 잘 이겨 낼 거야. 그리고 부탁인데…… 그동안 준비해 뒀던 거 누나한테는 비밀로 해 줘.”

    “하아. 그래,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심부름꾼은 하라는 대로 따라야지.”

    결국 김강철은 답답하다는 듯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가 가고 나니 집안엔 적막이 감돌았다. 경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는 건 그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의 부탁을 받은 거였으니.

    경우는 그날 일을 떠올렸다.

    * * *

    경우는 대본 집필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매일 병실을 찾아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선가 이렇게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계속 이야기를 해 주는 게 도움을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경우는 일부러 병실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쓰는 드라마며, 방송가의 뒷 이야기, 첫 드라마를 찍었을 때 시간이 촉박해 편집하느라 방송 사고가 날 뻔했던 일까지.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아버지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으니 급기야 형 민정현이 긴급 이사회를 소집한다는 소리에 경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어머니. 우리 병원을 옮기는 게 어때요?”

    “그게 무슨 말이니?”

    “아버지가 안 깨어나시는 건 어쩌면 의료적인 과실이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수술 중 실수가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런데도 수술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쉬쉬하는 거라고요. 제가 지금 당장 다른 병원 알아볼게요.”

    그런 경우의 손을 잡는 건 어머니 윤정숙이었다.

    “경우야! 대한민국 최고의 의료진들이야. 난 그들을 믿어.”

    “그게 아니면요? 정말 실수가 있었다면요?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요. 혹시 모르잖아요. 다른 의료진들 의견도 들어 보자고요.”

    병실 밖으로 나가려는 그를 다시 붙잡는 이가 있었으니.

    “수술엔 아무 문제가 없어.”

    갑자기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얼어붙은 경우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버지인 민 회장이 눈을 뜬 채 그를 보고 있었다.

    “아, 아버지! 정신이 드세요? 깨어나신 거예요? 으, 의사, 의사를 불러와야겠어요.”

    달려 나가려던 그를 향해 윤정숙이 입을 열었다.

    “그럴 거 없다니까 그러네. 너희 아버지 깨어나신 거 한 박사도 다 알고 있으니까.”

    어머니의 말을 순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눈만 끔뻑이더니 놀란 듯 입을 벌렸다.

    “그, 그럼 혹시 두 분이 연기를 하신…….”

    “이 아버지 연기 솜씨가 괜찮았냐?”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오세요? 저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요? 깨어나셨으면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내가 네 어머니한테 부탁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왜요?”

    민 회장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윤정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자간에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좀 나가 있을 게요.”

    경우는 어머니가 어쩐지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윤정숙이 나가자 민 회장이 경우의 손을 빌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괜찮지 않아.”

    “아버지…….”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도 고되구나. 회사 일이 힘든 줄 알았는데 회사 일은 어려운 축에도 못 들어. 그리고 넌 웃기는 이야기 좀 작작하지. 내가 웃음 참으려고 얼마나 애쓴 줄 아냐?”

    평소 답지 않은 민 회장의 엄살에 경우는 어이가 없었다.

    “아버지! 놀랐잖아요! 도대체 어떻게 되신 거예요? 혹시 수술했다는 것부터 다 거짓말인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냐? 수술하고 이틀 뒨가? 그때 깨어났지.”

    “그럼 꽤 오래 전인데…… 왜 그동안 아무 말씀도 안 하신 거예요?”

    “위기의 순간이 닥쳐올 때 그 사람의 면면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하더니, 난 그 말을 네 어머니한테 실감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창립 기념 파티를 가려고 준비했던 것까진 기억이 나. 근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된 건지 기억이 없어. 그냥 깊은 잠을 잔 것 같은데 어디서 누가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민 회장은 그러면서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울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내 윤정숙이었다. 결혼한 이후로 한 번도 그런 약한 모습 본 적이 없었다. 숨어서 울었으면 울었지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아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에 민 회장은 놀랐다. 달래 주고 싶었지만 몸이 생각처럼 말을 듣지는 않았다. 의식은 있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윤정숙이 고해성사를 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었는데…… 그때 당신한테 말하려고 했어요. 박경덕 어르신 말이에요. 당신이 그분 찾고 있다는 거 알고 내가 먼저 찾았어요. 그래서 당신 몰래 그분 숨겼어요. 미안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당신한테 얘기하는 건데…….’

    ‘진심으로…… 하는…… 말…… 이야?’

    ‘여, 여보? 당신 정신이 들어요?’

    ‘진심이냐…… 고…… 물었…… 어.’

    힘겹게 입을 연 민 회장의 물음에 윤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어르신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알게 됐어. 살아있을 땐 찾기 어려웠던 사람이 오히려 죽고 나니까 찾기가 더 쉽더라. 너도 갔다며? 장례식장.”

    “죄송해요…….”

    “됐다. 이미 지난 일인데. 아무튼 그때 생각했다. 네 어머니처럼 자기 속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저렇게 자기 민낯을 드러내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싶더구나.”

    “그래서 일부러 깨어나셨는데도 그러고 계신 거예요?”

    “그래.”

    “자식들 놀래키고 재미있으셨어요?”

    “자식들도 나를 꽤 놀래키더구나. 지금쯤이면 긴급 이사회 시작했겠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당분간은 지켜볼 생각이야. 기회가 좋잖니. 내가 죽은 후에 새명…… 어떻게 될 건지 궁금했거든.”

    결국 경우는 아버지의 부탁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꼭 전래 동화에 나오는 임금님 의관을 만드는 복두장이 된 기분이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여도 말을 할 수 없는 이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민지선이나 김강철만큼 자신 역시 답답하다는 생각에 경우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꽤 잘 어울리네.”

    민정현의 집무실을 찾은 민준호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게 진심인지 아닌지 상관없다는 듯 민정현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제자리를 맞게 찾은 거지.”

    며칠 만에 달라진 형의 모습에 민준호는 떨떠름했지만 한 배를 타기로 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만 했을 뿐.

    “형도 제 자리를 찾았으니 나한테도 자리를 찾아 줘야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왜 모른 척 해. 물산으로 발령 내줘. 내가 형 옆에 있어야 형을 보좌하지 않겠어?”

    “이렇게 갑자기? 지금 건설일 바쁘지 않아?”

    “이거 왜 이래? 이미 끝난 이야기 아니었어? 형 열심히 도와서 형이 그 자리에 앉게 해 줬으면 나한테도 그에 맞는 보상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누가 아니래? 단지 지금은 시기상조라 이거야. 지금까지 우리한테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쳐냈어. 그런데 갑자기 널 물산으로 불러들이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저러려고 그 사람들을 쳐냈나 씹지 않겠어? 이건 그쪽한테도 빌미를 주는 거라고.”

    “그럼 어쩌라고?”

    “네가 그랬잖아. 명분이 중요하다고. 지금까지 인사이동은 어쨌거나 명분에 맞는 일이었어. 하지만 넌 아니라 이거야. 안된다는 게 아니라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가뜩이나 지금 건설 쪽 바쁘잖아.”

    “솔직히 그것 때문에 더 화가 나. 이번에 화정시에 세울 복합 쇼핑몰, 지난번 고정시 쇼핑몰 보다 규모가 더 커진 건 알고 있어?”

    “그랬어?”

    “지금 우리 건설사 인력 거의 절반에 그쪽에 매달리고 있다고. 하루가 멀다하고 누나가 찾아와선 자신이 직접 챙기는데 고정시도 그런 식으로 했다며 내가 할 일을 야금야금 가로챈다고. 덕분에 내 꼴이 아주 우스워졌어. 형은 알기나 해?”

    “복합 쇼핑몰은 유통 쪽에도 큰 프로젝트니까. 네 사정은 알겠어. 어차피 인도 쪽 일이 아예 끝난 건 아니니까 조금만 더 참아. 상황 봐서 안정되면 그때 너 부를게.”

    “형, 혹시 벌써 딴 생각하는 거 아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내가 의리도 없는 사람으로 보여? 내가 왜? 너한테 나밖에 없듯이 나한테도 너밖에 없어. 다른 뜻은 없단 거 너도 잘 알잖아.”

    “그 말이 형의 진심이길 바라. 그래, 형 말대로 조금 더 기다려 보지.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 형도 알잖아. 내가 참을성이 없는거.”

    그렇게 민준호가 나가고 나자 홀로 남은 민정현은 이를 부득 갈았다. 물산으로 들어와 어떻게든 세력을 넓힐 생각인가 본데 그게 생각했던 것만큼 쉽진 않을 거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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