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202화 (202/250)

#202. 태양의 제국 (1)

“아, 끝났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것으로 경우는 <태양의 제국> 대본을 끝마쳤다.

늘 느끼는 거지만 대본 집필을 끝내고 나면 후련한 마음이 드는 한편 허무한 기분도 들었다. 오랫동안 정성을 들인 일을 끝내는 건 여러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아직 드라마 촬영이 많이 남아 있었으니 혼자서 끝났다는 기분에 심취해선 안 될 일이었다. 사무실을 나간 경우가 제작부를 찾았다. 마침 PD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작가님, 어쩐 일이세요?”

“대본을 끝냈거든요.”

“벌써요?”

“네, 파일 보냈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지금 <태양의 제국> 어디서 촬영해요?”

“오늘은 야외 촬영이 있어서요, 잠시만요……. 아, 여기 근처 공원이네요.”

“잘됐네요. 시간이 없어서 간식 차는 그렇고, 커피라도 사서 현장에 가 봐야겠어요.”

안 그래도 촬영장 가 본 지가 꽤 되기도 해서 경우는 멀지 않은 곳에서 촬영한다는 소리에 촬영장으로 향했다.

정확한 장소를 알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는 곳이 촬영장이었으니 경우는 일단 그리로 향했다. 드라마 촬영을 한다니 신기한 마음에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혹시나 소음으로 촬영에 방해가 되진 않을까 진행 요원이 사람들에게 촬영 협조를 구하고 있었다.

경우는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촬영이 진행되는 걸 지켜보기 시작했다.

마침 <태양의 제국> 주인공인 한대건과 임사빈이 함께 나오는 씬을 찍는 중이었다. 복수를 위해 거침없이 내달리며 점점 괴물로 변해 가는 이찬수를 안타까워한 최솔미가 그와 추억의 장소에서 만나는 씬이었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니 색다른 기분이기는 했다. 가끔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쓴 드라마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자신이 밤을 새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쓴 대본이었음에도 낯선 기분이 들었는데, 그럴 때일수록 작가로서 더욱 몰입하고 있었다는 의미였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촬영이 한차례 끝이 나고 잠시 휴식 시간이 되자 경우는 지금이면 괜찮을 것 같아 촬영장 안쪽으로 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저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한 남자가 그의 진입을 막았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드라마 진행을 돕는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생각이 들자 경우는 자신을 소개했다.

“아, 저 민경우라고 합니다. 이 드라마 쓴 작간데요.”

하지만 경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아저씨, 알 만하신 분이 거짓말하시면 안 되죠.”

대본 집필 막바지를 앞두고 한창 집중하느라 집에도 못 간 탓에 몰골이 추레하기는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씻고 올 걸 그랬단 생각을 하던 경우는 어쨌든 구구절절하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저기…… 그렇게 안 보이시겠지만 민경우 맞습니다. 제가 대본 쓰느라 잘 못 씻어서, 아, 휴대폰에 제 사진이라도 보여 드릴까요? 말끔하게 나온 거 있는데.”

“아저씨, 아무렴 제가 작가님 얼굴도 못 알아보겠어요? 핑계 좀 그만 대시고 거기서 구경이나 하시라고요.”

“아니, 내가 진짜 민경운데…….”

절대 안 된다고 손을 내젓던 그 순간 누군가 그의 뒤통수를 강하게 쳤다.

“얀마, 작가님을 막으면 어떡해?”

다행히 이쪽 상황을 본 모기범 PD가 달려왔으니 그의 말에 남자는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지, 지, 진짜 작가님이에요? 이, 아저씨가?”

끝까지 아저씨 타령하는 진행 요원 탓에 경우가 민망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놀란 그는 쉽게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작가님 죄송합니다. 아르바이트생이라 작가님 얼굴에 익숙하지 않았나 봐요.”

“뭐, 그럴 수도 있죠. 어쨌든 일은 참 잘하네요.”

경우가 입에 발린 칭찬을 하자 얼어붙은 진행요원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죄, 죄송합니다. 진짜 작가님이신 줄 몰랐어요. 저 원래 정말 팬인데…….”

팬이라는 말이 되려 비수가 되어 가슴에 와 박혔으나 경우는 애써 괜찮다며 그를 다독이고는 모기범과 함께 겨우 촬영장 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근데 저 이러고 돌아다니면 못 알아볼 정도예요?”

은근히 신경 쓰였던 경우의 한마디에 모기범이 빵 터졌다.

“저 친구가 아직 어려서 뭘 잘 몰라요. 작가님 보도 사진만 봐서 그런 거죠.”

“아닌 거 같은데…….”

“신경 쓰지 마세요. 그래도 저 친구, 작가님 드라마 보고 PD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답니다. 아직 일머리는 없는데 열심히 하려고 노력은 하는 친구예요. 공부할 시간도 빠듯할 텐데 학비 번다고 저렇게 틈나는 대로 아르바이트하는 것만 봐도 기특하잖아요.”

“그러네요. 난 저 나이 때 뭐 했는지……. 참, 여기 오기 전에 커피 주문했는데 조금 있으면 도착할 겁니다.”

“그냥 오셔도 되는데. 제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나눠 주겠습니다. 참, 탈고하셨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네요.”

“어디 있든 제작부 소식은 다 제 손바닥 안에 있거든요.”

자신만만한 모기범의 모습에 경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경우가 입을 열었다.

“참, 이세길 부장님 소식 들으셨어요?”

안 그래도 아내의 병으로 이세길이 미국으로 떠난 이후 소식을 들을 수 없어 궁금해하던 모기범에게 경우는 간병인을 통해 들은 소식을 전해 줬다.

“사모님이 다행히 차도를 보인답니다. 많이는 아니지만 전보다 더 나아진 모양이에요. 생각보다 희망적인모양이더라고요.”

“정말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자기 일처럼 기뻐하던 모기범은 더 열심히 일해야겠다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천천히 현장을 둘러보던 경우는 휴식 시간 동안 자신의 차에 대기하러 가던 임사빈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이 흘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느껴졌다. 먼저 입을 연 건 임사빈이었으니.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자신의 차로 향하는 그녀를 경우가 붙잡았다.

“괜찮으시면 저랑 커피 한잔하실래요?”

경우의 말에 차마 됐다고 할 수 없었던 임사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배달된 커피 하나씩을 든 채 임사빈의 차 안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막상 자신이 붙잡아 놓고도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더욱 그랬다.

그러자 이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던 임사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그날은…….”

“네? 무슨 날이요?”

“회식 때…….”

“아, 회식! 무슨 일 있었습니까? 술이 너무 많이 취해서 제가 그날은 거의 통째로 기억이 없어서요.”

물론 간간이 떠오르긴 했지만 차라리 기억 안 하느니만 못했다. 어차피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에 별일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 경우는 아예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별…… 일 없었어요. 그…… 너무 취하신 것 같아서 댁에 잘 들어가셨는지 걱정이 돼서요.”

“아, 네. 잘 들어갔죠. 임사빈 씨도 잘 들어가셨죠?”

“네.”

또다시 정적.

이대론 안 되겠단 생각에 할 말을 정리한 경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가 최솔미 역에 임사빈 씨를 뽑은 이유, 알고 계십니까?”

“네? 작가님이 저를…… 뽑으셨어요?”

“그럼요. 저는 최솔미 역에 임사빈 씨가 제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분명 소속사 대표는 오디션에서 간당간당했는데 자기가 푸쉬를 엄청 해서 겨우 캐스팅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니 정여희의 활약에 더욱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기가 알고 있는 게 거짓이라는 생각에 화가 나는 한편 왜 자신을 뽑았는지 궁금해졌다.

“이번 드라마에서 최솔미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할 거예요. 여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

“그렇지만 전에 임사빈 씨가 말씀하셨던 것처럼 중심을 잡아 주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될 캐릭터이기도 하죠. 다들 불완전한 존재라면 최솔미만 완전한 존재로 설정했거든요. 결국 이찬수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존재죠. 전 임사빈 씨가 그런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비슷한 연기를 해 온 것 같지만 임사빈 씨가 맡았던 역할들이 세세하게 다 다르다고 보거든요. 좋은 연기자예요. 임사빈 씨는.”

“작가님이 절 그렇게 생각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눠 본 적 없으니까요. 근데 지난번부터 어쩐지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충분히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을 만큼 자랐는데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알 속에 머무르는 병아리 같아요. 그러지 마세요. 임사빈 씨는 연기자로서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자꾸 두려워하는 것 같거든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요. 자신을 조금만 더 믿었으면 좋겠네요.”

“…….”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일단 그녀의 얼굴에 관심을 쏟지 연기력을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연기력을 봐 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생각했던 것보다 기분이 이상했다. 예쁘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심장이 요동쳤다.

“고맙습니다. 아무도 저한테 그런 말 안 해 줬거든요……. 빈말이라도 듣기 좋네요.”

“빈말 아니에요. 진심입니다.”

마침내 경우와 시선을 마주친 임사빈은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경우는 이야기를 마치고 임사빈의 차에서 내렸다.

인간은 어쨌거나 유혹에 빠지기 쉬웠다. 이전 생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임사빈 또한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유혹에 넘어가면 다음은 어렵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좋은 배우가 될 자질이 충분한데 괜한 유혹에 빠져 헛생각을 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멀어지는 경우를 보며 임사빈은 생각했다. 처음엔 그를 수단을 여겼다고. 그가 가진 능력과 재력이라면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올려 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재력이 아니더라도 사람을 대하는 그의 진심만 있으면 충분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되는 그가 더욱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품었던 나쁜 마음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부끄럽지는 않았을 텐데…….

“기억 못 한다고 하더니 기억 다 하는 거 아냐?”

술자리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한 그를 보며 임사빈은 피식 웃었다.

그때 마침 차의 문이 열리고 매니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민 작가가 뭐래? 혹시 혼냈어? 연기 좀 잘하래?”

“하아. 적은 원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 됐으니까 얼굴이나 치워!”

하여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이상한 바람이나 넣는 회사와의 관계를 쫑내고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한 임사빈은 한쪽에 팽개친 대본을 집어 천천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

* * *

촬영장에서 나온 후 아버지 병실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온 경우는 말끔하게 씻고는 냉장고에 넣어 둔 맥주 캔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피곤한 하루를 맥주와 함께 마감하려던 경우는 하필이면 찾아온 김강철 때문에 산통이 깨지고 말았으니.

“다행히 오늘은 집에 있었네?”

막 마시려던 맥주를 경우의 손에서 가로챈 그가 벌컥벌컥 마셨다.

“냉장고에 있는데 가져다 먹지, 좀.”

“내가 지금 속이 타서 냉장고까지 갔다 올 기력이 없어서 그런다.”

“왜? 뭣 때문인데?”

“뭣 때문? 너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너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요즘 우리 회사 분위기 어떤지 알기나 해?”

불만 섞인 김강철의 모습에 목을 가다듬던 경우가 물었다.

“뭐가 어떤데?”

“야, 말도 마라.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이러다 문지방이 닳겠다, 닳겠어.”

목을 축인 그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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