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반전 (1)
남편인 민 회장이 데리고 온 레스토랑은 그녀가 좋아할 만한 분위기에 음식 맛도 괜찮았지만 윤정숙은 지금 이 시간을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아내의 반응에 민 회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입맛에 안 맞아?”
“아니에요.”
“아니긴. 아까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생각할 거? 아, 요즘 비엔날레 준비 때문에 바쁘지?”
“자문 위원이 바쁠 게 뭐 있겠어요? 작품 준비하고 선보일 작가들이 바쁘겠죠.”
“그럼 뭣 때문에 그러는 건데?”
“그게…….”
말갛게 자신을 보고 있는 민 회장의 모습에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특히나 빈소에서 경우가 했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가 어떤 선택을 하셔도 이번만큼은 어머니 뜻을 따를 게요. 하지만 아버지 생각도 해 주세요. 어쨌든 결국엔 알게 되실 거잖아요.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듣게 될 바에야 어머니께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녀 역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혼 후 지금만큼 분위기가 좋았던 적도 없었기에 자신의 양심 고백이 지금의 이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아닐까 싶은 걱정도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 탓에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국 해야 할 말이었으니 윤정숙은 용기를 내 남편에게 말하기로 했다.
“나,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요.”
“뭔데?”
“그게…… 그러니까…….”
그 순간, 민 회장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 미안. 전화 끄는 걸 깜빡했어.”
“괜찮으니까 전화 받아요. 분명 회사일일 텐데.”
앉은 자리에서 전화를 받으려던 민 회장은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그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통화만 하고 금방 올게.”
“알았어요. 다녀와요.”
아내 앞에선 웃는 낯이었지만 돌아서는 그의 얼굴은 심각해져 있었으니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그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그래, 찾았나?”
[네, 박경덕 어르신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들려오는 말에 휴대폰을 들고 있던 민 회장의 팔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어르신이 돌아가셨다니…….
그토록 찾아 헤맨 어르신의 부고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거기다…….
‘사모님께서 지금껏 돌봐 오셨던 모양입니다.’
자신 몰래 아내가 어르신을 감춰 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던 아내.
그래도 두 사람 사이가 전보다는 좋아졌다고 믿고 있었는데 아내는 그게 아닌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어떤 얼굴로 아내를 봐야 할지 민 회장은 자신이 없었다. 이런 얼굴로 아내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일단 화장실로 향했다.
손을 씻으며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아내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당분간 아내에게 내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아내가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니 머릿속만 복잡해졌다.
마침내 마음을 다잡은 그가 아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윽!”
갑자기 숨 쉬기가 힘들어지더니 가슴을 쥐어 짜는 통증이 느껴졌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그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문득 어머니가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 * *
“윤아야, 아빠 왔다.”
“당신 오늘은 일찍 들어오네.”
“만날 술만 먹는다고 잔소리 한 사람이 누군데? 일찍 들어왔다고 좋아할 줄 알았더니.”
“누가 싫대? 요즘 계속 늦게 오다가 일찍 오니까 그렇지.”
“일찍 들어오는 날도 있어야지. 그리고 내가 뭐 술을 먹고 싶어서 마시겠어? 말 그대로 접대야. 어떻게 해서든 한 사람이라도 우리 쪽으로 끌고 와야 할 거 아냐? 그래야 나도 좋고 당신도 좋고 우리 윤아도 좋지.”
“어련하실까. 알았으니까 얼른 씻고 나와. 당신 좋아하는 생태탕 끓여 놨어.”
“또 친정 갔다 왔어?”
“어떻게 알았어?”
“당신이 자신있게 생태탕 이야기하면 십중팔구 친정 다녀온 거더라고.”
“그래서, 내가 친정 가는 거 싫어?”
“누가 싫대? 그냥 물어도 못 봐?”
“아니, 뭐……. 알았으니까 얼른 씻고 나와.”
“예. 분부대로 거행합죠.”
그렇게 욕실로 향하는 남편의 모습에 배예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괜히 예민하게 굴었다.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남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렇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미행하는 걸 들키지 않았거나 미행한 걸 알고 있으면서도 경우가 잠자코 있다는 것.
만약 전자라면 상관 없지만 후자라면 이 문제가 나중에 어떻게 터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터질 거면 하루 빨리 터지는 게 낫지 하루하루가 정말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남편이 말했을 때 미행하는 걸 멈출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녀는 경우에게 사람 붙인 걸 그만두지 않았다. 그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 탓이었다.
어쨌든 남편이 말하기 전까진 절대 내색하지 말라던 엄마의 당부대로 할 생각이었다. 들킨다고 해도 끝까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그 사이 민정현이 씻고 나오자 배예원 역시 부엌으로 향했다.
“아, 시원하다. 역시 아주머니가 끓여 주는 생태탕이 제일이라니까. 내 입맛에 딱 맞아.”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많이 드세요.”
“참, 다음 달에 창립 기념일 있는 거 알지?”
“아, 벌써 그렇게 됐네. 근데 창립 기념일은 왜? 원래 그런 거 잘 안 챙기잖아.”
“그렇긴 한데 이번엔 70주년이잖아.”
“벌써 그렇게 오래 됐어?”
“할아버지가 조그맣게 새명 상회를 열어서 면포며 쌀이며 이것저것 파는 게 그 시작이었거든. 그러다 외국에서 물건도 사다 팔기 시작하면서 규모가 커지고 회사의 모습을 갖춰 지금의 새명 물산이 된 거지. 어쨌든 새명 상회가 새명 물산의 시작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그런 회사가 지금은 대한민국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기업이 되었다는 거네? 신기해라.”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신기해하면 안 되지. 당신은 그 회사 안주인이 될 텐데.”
남편의 말에 배예원이 피식 웃었다.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지 말죠.”
“김칫국이라니. 원래 회사는 장자가 물려받는 게 순리라고. 당연히 내가 물려받을 회산데 당신도 준비를 해야 할 거 아냐?”
“준비? 무슨 준비?”
“다음달 창립 기념일에 성대하게 파티를 열 계획이거든.”
“파티? 지금까지는 그런 거 한 번도 안 했잖아.”
“원래 10년마다 파티를 했어. 60주년엔 당신이랑 결혼하기 전이라 몰랐던 거겠지만 이번엔 당신도 참석할 테니까 가서 나랑 같이 이사들도 만나 인사도 나누고 그래. 그 사모들도 참석할 텐데 이번 기회에 안면도 트고 기회가 좋지 않겠어?”
“아, 전에 그런 드라마 있었는데. 앞가림 못 하는 남편 출세시키려고 아내가 남편 직장 상사 와이프한테 온갖 아첨 떨면서 그러는 거. 남편이 대리면 아내도 대리, 남편이 부장이면 아내도 부장. 그러니까 나도 그 드라마 속 여자들처럼 그래야 한다, 이거지?”
“그렇게까지는 아니지만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근데 따지고 보면 그 사모들이 다 나한테 잘해야 하는 거 아냐?”
“왜? 못 하겠어? 막상 사모들한테 고개 숙여야 한다니까 자존심 상해?”
“누가 그렇대. 그깟 자존심이 무슨 밥 먹여 준다고. 남편 회장 만들 수 있다면야 내가 그 정도도 못하겠어? 걱정하지 마. 나 그런 거 잘해. 예전부터 엄마 따라 사모들 모임에 얼마나 자주 갔는데? 사모들은 다른 거 필요없어. 젊어 보인다, 예쁘다, 감각이 센스 넘친다, 몇 마디 말이면 홀랑 넘어온다니까.”
“세상 든든하네. 자존심 상해도 조금만 참아. 내가 회장되면 그 사모들이 다 당신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 있으니까. 참, 장인 장모님도 오시라고 그래.”
“알았어.”
남편의 말에 배예원은 행복한 상상을 하며 모처럼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왜?”
“파티면 드레스 입어야 하잖아. 아, 윤아 낳고 나 살 많이 쪘는데. 당신은 진작 좀 알려 주지!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배예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모습에 민정현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 * *
그로부터 한 달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민지선이 결혼식을 올린 인피니티 그랜드 호텔에서 새명 그룹의 창립 기념 행사가 열렸다. 새명 그룹의 임원들은 물론 정·재계의 인물들이 참석했다.
경우의 초대로 행사에 참석하게 된 강희주가 떨리는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샴페인이라도 갖다 줄까요? 술 마시면 긴장이 조금 풀릴 것 같은데.”
“그것도 술인데 괜히 술 마셨다가 얼굴 빨개지면 어떡해요? 안 마실래요.”
“근데 의외네요. 희주 씨 긴장하는 거 처음 봐요.”
“그러게요. 흉악범이랑 마주 앉아 있을 때도 이렇게 긴장 되지는 않았는데 왜 이렇게 떨리죠? 근데…… 내가 이런 데 와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희주 씨도 곧 새명 식구가 될 거잖아요. 이 기회에 사람들한테 얼굴도 알리고 좋죠. 그나저나 희주 씨 오늘 정말 예쁘네요.”
매번 짙은 색의 정장을 입은 모습만 보다가 드레스를 입은 강희주의 모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 어울렸다. 경우의 칭찬에 강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할머니가 이런 데서는 힘 빡 줘야 한다고 해서 신경 좀 써 봤는데 진짜 괜찮아요?”
“그럼요. 오늘 참석한 여자들 중에 제일 에쁜 거 같아요.”
경우의 농담 덕분에 긴장이 풀린 강희주는 마침내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외삼촌!”
재경 그룹 김 회장이 행사에 초대 받아 마침 도착했다.
“그래, 희주야.”
“회장님 오셨어요?”
“민 서방. 잘 지냈어?”
“네.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합니다.”
“당연히 와야지. 그나저나 사돈어른이 안 보이시네. 어디 가셨나?”
“글쎄요. 아직 도착 안 하신 모양입니다.”
“그래? 좀 늦으신 모양이야.”
“아이, 외삼촌. 원래 이런 행사의 주인공은 제일 나중에 등장하는 법이잖아요.”
“그게 또 그런가? 하하하.”
재경 그룹 김 회장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민 회장을 기다리며 오랜만에 만난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는 경우는 한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행사에 원래 늦는 분들이 아닌데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도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시각, 민 회장의 집.
“여보, 아직 멀었어요? 곧 있으면 행사 시작해요. 지금 출발해도 늦는다고요.”
진작 준비를 마친 윤정숙이 화장실에 들어간 민 회장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으니.
“여보? 여보?”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윤정숙이 서둘러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때!
“여보!”
민 회장이 화장실 바닥에 쓰려져 있었다.
“아줌마, 119! 119 불러요, 빨리.”
잠시 후 민 회장이 구급대원들에 의해 구급차에 실렸다. 그 옆엔 드레스 차림으로 울고 있는 윤정숙이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