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99화 (199/250)
  • #199. 가족이라는 이름 (6)

    “아이구, 우리 윤아 왔어?”

    민정현의 아내 배예원은 딸 윤아를 데리고 친정에 갔다. 지난주에 봤음에도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정명혜는 손녀딸을 물고 빠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 낳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딸의 말에 정명혜가 그녀를 찰싹 때렸다.

    “애 들어, 이것아!”

    “아우, 아파 엄마.”

    “당연히 아프라고 때리지. 하여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나이 들어서 애까지 낳으면 뭐 해? 하는 짓은 결혼 전이나 지금이나 철딱서니 없긴 마찬가진데.”

    “무슨 소리야. 이래 봬도 새명의 첫째 며느리 노릇을 내가 얼마나 톡톡히 하고 있는데? 나 아니었으면 준호 도련님,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지도 못했어.”

    “근데, 그 사돈은 괜찮은 거야? 난 왜 불안불안한지 모르겠다.”

    “엄마만 그런 거 아니야. 우리도 다 알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셔.”

    “그래? 그럼 이참에 민 서방, 확실히 차기 후계자 되는 거야?”

    “하여간 그놈의 후계자 타령은. 걱정 마. 꼭 되게 내가 만들 거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 더는 물리고 싶어도 물릴 수도 없다고.”

    “엄마야말로 말조심해. 애 들어.”

    “크흠.”

    “그나저나 지난번에 내가 말한 그 일은 어떻게 됐어?”

    “걱정하지 마. 사돈총각한테 잘 붙여 놨으니까. 너희 시누이한테는 정말 안 해도 되는 거야?”

    “엄마도 봤잖아. 원래 우리 아가씨, 조금 고리타분한 데가 있어서 정치질 같은 거 못해. 자기 능력을 보여 주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니까. 그래서 죽어라고 일만 하지. 근데 회장이 실력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 딸, 언제 이렇게 똑똑해졌대?”

    “나야, 원래 똑똑하지. 엄마 닮아서.”

    “그래서 사돈총각한테 사람 붙이라고 한 거야? 근데 작가라며? 회사에서 손 떼기로 했으면 아예 땔 것이지 뭐 하는 거라니?”

    “내 말이. 하여간 은근히 신경 쓰여. 아가씨 뒤에 딱 붙어서는 둘이 무슨 작당을 꾸미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니깐. 요즘은 누구 특별히 만나는 사람 있어?”

    “아직은. 일이 바쁜지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회사에만 있는 것 같더라.”

    “그래? 그럼 다행이고. 참, 행여라도 민 서방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 민 서방한테는 비밀이니까.”

    “왜? 또 꼴에 지네 식구들이라고 싫어하던?”

    “배 다른 형제들한테 무슨 정이 얼마나 남아 있어서?”

    “그럼 왜?”

    “엄마도 알잖아. 민 서방이 원래 조심성 있는 성격인 거. 혹시라도 들키면 다들 가만히 있겠어? 한마디로 난리가 난다 이거지. 그래서 지난번엔 나한테 미행하는 거 그만 두라고 했단 말이야.”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뭐.”

    “그러니까. 지금 도련님한테 붙여 놓은 사람들은 확실하겠지?”

    “걱정하지 마. 다들 기자 출신이야. 너도 알잖아. 기자들이 몰래 남 미행 잘하는 거. 조심성 많은 연예인들 담당했던 기자들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때 마침 울리는 정명혜의 전화벨 소리.

    “이 시간에 갑자기 웬일이래? 여보세요? ……뭐라고? ……그래서 들킨 거야? ……그게 들켰다는 거지. 알았어. 꼼짝 말고 그 자리에서 기다려. 아,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는 엄마의 모습에 전화 내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배예원이 불안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무슨 일인데?”

    “사돈총각, 사부인 미술관에 갔는데…… 그 뒤로 사라졌대.”

    “뭐?”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바꿔 탄 모양이야?”

    “그건 들켰다는 소리나 매한가지잖아? 괜찮을 거라며? 일 잘한다며?”

    “누가 이럴 줄 알았니?”

    “어떡해? 정현 씨 알면 난리 날 텐데.”

    “일단 있어 봐. 들켜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 조심해야 할 사람을 만나러 가느라 그런 건지 모르잖아.”

    “지금 그렇게 한가한 소리가 나와? 이제 어떡해?”

    “뭘 어떡해? 넌 모른다고 시치미 떼면 되는 거지. 넌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일은 내가 다 꾸민 거라고. 그러니까 괜히 겁먹지 마. 알았어?”

    엄마의 다그침에 배예원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 * *

    갑작스러운 민 회장의 호출에 손석중은 부리나케 회장실로 향했다. 분위기가 어두웠다는 박 비서의 말이 문제였다. 그나마 요즘은 경우의 결혼으로 기분이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뭔가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문을 열자 박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 오늘 회장님 찾아온 사람이 누가 있어?”

    “조금 전에 민지선 대표님 오셨었는데요.”

    “지선이? 지선이가 갑자기 무슨 일로?”

    “혹시 스타 플래닛 2호점 추진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요?”

    “스타 플래닛?”

    고정시에 문을 연 새명 유통의 복합 쇼핑몰 스타 플래닛이 대성공을 거두자 민지선은 복합 쇼핑몰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이미 연구 용역을 시켜 복합 쇼핑몰을 세우기 적당한 지역을 선정했으니 그 첫 번째가 화정이었다.

    얼마 전부터 화정에 복합 쇼핑몰을 세우기 위해 새명 유통의 임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긴 했으나 거기서 문제가 생길 줄은 몰랐다. 손석중은 무거운 마음으로 회장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에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 왔습니다. 회장님.”

    “어, 손 실장. 이쪽으로 와 봐.”

    자신을 힐끔 보던 민 회장이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짓하자 손 실장은 서둘러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슨 폭탄이 떨어질까 걱정하는 그의 앞에 민 회장이 내놓은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이탈리아 출신 호텔 수석 쉐프가 이번에 새로 연 레스토랑이라는데, 손 실장이 보기엔 어때? 애들 엄마가 좋아할까?”

    “예?”

    “예는 무슨 예야? 여기 사진을 보라니까. 이 정도면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냐고?”

    “레스……토랑이요? 스타 플래닛이 아니라?”

    “갑자기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손 실장 졸았어?”

    “아니 그게…… 민 대표가 왔다 갔다고 들어서…….”

    “아, 지선이. 아까 왔다 갔지. 화정에 쇼핑몰 세우는 거 확정됐다고 하더만. 잘 됐지. 요즘 건설도 불경긴데 덕분에 건설도 돕게 생겼으니 여러모로 좋은 일이야. 안 그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별일 아닌 걸 안 손석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무슨 일이 있어도 주말마다 윤정숙과 함께 식사한다고 하더니 함께 식사할 식당을 예약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늦바람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평생 일밖에 모르던 남자가 뒤늦게 아내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부부가 서로 날을 세운 것보다는 이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생각해 보면 민 회장 만한 로맨티스트가 없었다. 첫사랑을 오랫동안 잊지 못해 윤정숙이 속을 탔던 걸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그녀에게 마음을 돌렸으니 앞으로 두 사람 사이를 걱정할 일은 없을 게 확실했다.

    “자네도 일한다고 너무 밖으로만 나돌지 마. 나중에 늙어서 아무도 봐주지 않은 뒤에 철들면 그것만큼 곤란한 일도 없다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서 여기 분위기 어떠냐니까?”

    “이사장님 취향에 꼭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 하하, 잘 됐군. 그럼 여기로 예약을 해야겠어.”

    환하게 미소 짓는 민 회장의 모습에 손석중 역시 웃고 있었다.

    * * *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 없는 초라한 빈소였다. 평생을 쓸쓸하게 살다 떠날 때도 쓸쓸한 그의 모습에 경우는 어쩐지 마음이 시렸다. 상주도 없는 곳에서 대신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이라도 찾아와 볼 걸 그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김예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경우는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내내 별말이 없던 윤정숙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어. 그전에도 몇 번 고비를 넘기신 탓에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며칠 만에 허망하게 가실 줄이야……. 아드님이 꽤 보고 싶으셨을 거야. 지금쯤 만났으려나?”

    박경덕의 영정 사진을 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무척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시작은 다른 마음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르신을 돌보는 동안 어머니에게 진심이 아예 없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근데 빈소가 너무 썰렁하네요.”

    “어르신께도 남은 친척이 몇 있어. 그래서 부고를 전할까 하다가 관뒀다. 예전에 어르신이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거든. 갈 때는 조용히 가고 싶으시다고.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구나. 상주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으셨던 거겠지.”

    “아버지께는요? 아버지께도 말씀드리지 않을 작정이세요?”

    “글쎄다.”

    그리고는 더는 말이 없었다. 그나마 지금 어르신께 가장 가까운 사람은 어머니였을 테니 경우는 자신이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어머니의 뜻에 따르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빈소 안으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아는 사람도 없고 찾아올 사람도 없을 텐데 도대체 누군가 싶어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오늘은 계셨네요. 안녕하십니까, J&B 로펌에서 나왔습니다.”

    “로펌이요?”

    갑작스러운 인물의 등장에 경우는 물론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윤정숙까지 놀라고 말았다.

    “윤정숙 씨 맞으시죠?”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한 윤정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그런데요?”

    “저는 박경덕 어르신의 유언장을 집행할 전정민 변호사라고 합니다.”

    사실 박경덕을 이곳 요양원으로 모셔 오긴 했지만 윤정숙이 옆에서 내내 붙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베테랑 간병인을 붙여 성심성의껏 돌보도록 하면서 윤정숙은 틈이 나는 대로 병원을 찾았다. 그러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다 아는 건 무리.

    그런 그녀에게 전정민 변호사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있기를 하나, 어차피 남아있는 이들이라고는 자신에게 혹시라도 콩고물이 떨어질까 기대하는 친척들뿐이었으니 그가 이름까지 바꿔 가면서 숨어 살았던 데에는 그 영향도 없진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죽고 난 이후 재산은 물론 죽은 민판섭이 남긴 차명 주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한 그는 진작부터 변호사에게 유언장을 공증받아 놓은 상태였다.

    “이곳으로 오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를 부르셨습니다.”

    “어르신이 직접이요?”

    “네.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연락은 했습니다.”

    치매 환자라고 해도 항상 기억을 다 잃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치매였으니 자신이 죽고 난 이후가 가장 걱정이 되었을 터. 기억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자신 모르게 준비한 박경덕의 모습에 윤정숙은 그답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본인이 정리하는 편이 나을 테니까. 윤정숙은 그가 다음 말을 잇도록 잠자코 있었다.

    “우선 어르신이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은행의 현금은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습니다. 어르신의 뜻에 맞게 좋은 곳에 쓸 예정입니다.”

    “다행이네요.”

    “네. 그리고…….”

    전정민 변호사가 가방 안을 뒤적였다. 잠시 후 꺼낸 것은 하얀 봉투. 그는 윤정숙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여사님께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무언가 싶어 봤더니 그것은 편지였다.

    “고마웠다는 말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어느새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처음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경우는 무척 낯설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편지를 경우에게 넘겼다. 자신이 읽어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이내 편지를 받아 들었다.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남긴 구절만은 무슨 뜻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남긴 새명 물산의 차명 주식은 끝까지 자신을 돌봐 준 어머니께 넘긴다는 내용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수고료 한 푼 없이 관리한 것은 자신이었으니 이제 자신의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할아버지가 아닌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곧바로 주식 양도 절차에 들어가겠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주식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우는 결국 어머니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박경덕 어르신께 정성을 들인 보람을 찾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전혀 기쁜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는데도 세상을 잃은 것처럼 쓸쓸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에게 어르신이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르신에게 그녀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여 줬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족에게도 차마 보여 줄 수 없었던 진짜 모습…….

    경우가 가만히 어머니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자 시선을 맞춘 윤정숙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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