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98화 (198/250)
  • #198. 가족이라는 이름 (5)

    말끔하게 씻고 나온 경우에게 김강철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게 누군데?”

    “판터치 엔터 대표.”

    “판터치? 갑자기 그쪽 대표는 왜?”

    “설마 모르고 있었던 거야? 너희 드라마 여주인공 소속사 대표잖아.”

    “아…… 근데, 내가 소속사 대표까지 일일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면 너희 드라마 여주인공이 섭섭해하겠다. 그…… 누구더라?”

    “임사빈 씨?”

    “그래, 맞아. 임사빈.”

    “임사빈 씨 본인을 모른다면 몰라도 자기 회사 사장 모른다고 서운해하진 않을 것 같은데?”

    “그게 또 그런가?”

    “근데 이 사람은 왜?”

    “얼마 전에 준호 형이랑 만나더라고.”

    “준호 형? 준호 형이 왜……? 혹시 이 사람도 새명 물산 지분 가지고 있어?”

    “그럴 리가 있냐?”

    영문을 모르겠다는 경우에게 답답하다는 듯 김강철이 설명해 줬다.

    “딱 보면 모르겠어? 각이 나오는데?”

    “…….”

    “어휴, 하여간 그쪽으론 머리가 안 돌아가나 봐.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핵심은 너희 드라마에 출연하는 여배우한테 있어. 아름다운 여배우, 잘나가는 작가, 그림이 딱 나오잖아.”

    “그림이 나온다니 무슨 그림이 나와?”

    “이 답답아. 너랑 여배우랑 둘이 어떻게 엮어 보려는 수작이잖아. 가뜩이나 시작 전부터 시끄러웠던 드라만데 작가하고 출연하는 여배우하고 구설수 생기면 옳다구나 불이 확 붙겠지. 그것도 남자는 이제 곧 결혼한다고 기사까지 났어. 이제 감이 오냐?”

    “에이, 말도 안 돼. 사빈 씨가 뭐가 아쉬워―.”

    그 순간 떠오르는 지난밤의 기억들. 뺨을 만지던 손길 하며 귓가에 스치던 뜨거운 입김 같은 것들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 바람에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뭐야, 왜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는데? 기분 나쁘게. ……너 설마!”

    “뭐? 왜!”

    “누가 뭐라 했냐? 왜 갑자기 성질을 내고 난리야?”

    “설마라며? 그럼 당연히 뒤따라올 말은 안 좋은 말이지. 합리적인 의심이잖아?”

    “하여간 눈치는 빨라가지고. 그래서? 그 여자랑 무슨 일이 있었는데? 설마…… 벌써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야?”

    “이게 사람을 뭐로 보고. 그렇고 그런 사이는 뭐가 그렇고 그런 사이야? 아무 일도 없었구먼.”

    “아닌데. 분명 뭐가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긴데.”

    “괜한 사람 엮어 넣으려고 하지 마라. 쓸데없는 의심도 하지 말고.”

    영 개운하지 않았으나 저렇게까지 나오는데 거기다 대고 더 할 말도 없던 김강철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내가 하라고 했던 건 어떻게 됐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 마. 그럼 이제 폭탄 터질 일만 남은 거냐?”

    “이왕이면 안 터지는 게 좋겠지만 만약 터진다고 해도 누나나 아버지가 피해를 보는 일은 없으면 되는 거니까.”

    경우의 말에 김강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두 사람은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일을 차근히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형이 이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 혹시나 형의 결혼 문제에 자신이 연루되었다는 것을 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형에게 사람을 붙인 것처럼 형 역시 자신에게 사람을 붙이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조금 더 행동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경계심이 들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경우와 강희주의 결혼 기사까지 난 마당에 더 시간 끌 필요가 없다며 양쪽 집안 식구들은 서둘러 상견례를 하게 되었다. 경우네 식구들이 사 남매에 벌써 둘은 결혼까지 해서 식구가 많은 것을 고려해 강희주 쪽도 부모를 대신해 재경 그룹 김 회장 내외가 상견례에 참석했다.

    “희주가 제 친자식은 아니지만 조카도 자식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그럼요.”

    “사실 그동안 민 회장님과는 격조했습니다. 자식들 결혼으로 더욱 특별한 사이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종종 만나 식사도 하고 사업 이야기도 하면서 가깝게 지냈으면 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술 한 잔 받으시죠.”

    “좋습니다.”

    “여보, 김 회장님 이미 많이 드셨어요.”

    “괜찮습니다, 사부인. 이렇게 기분 좋은 날, 당연히 술 한잔해야지요.”

    김 회장은 자신이 나이가 더 어리니 형님과 형수님으로 모시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이어 나갔다.

    준호의 결혼이 그렇게 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라 조심스러웠던 민 회장 내외는 그렇게 해 준 김 회장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럼 결혼식은 언제쯤이 좋은지?”

    “이왕 말 나온 김에 후딱 해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씀 중에 죄송한데 지금 당장은 좀 어려울 것 같아요.”

    “네, 저도 이제 막 드라마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내년 봄이 어떨까 싶은데요?”

    “그건 절대 안 돼!”

    상견례 내내 잠자코 있던 손주옥이 나섰다.

    “아무래도 해가 바뀌면 신부가 나이 한 살 더 먹는 건데…… 제가 나이가 많아 구식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할머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

    어른들도 있는데 평소처럼 할머니에게 떼를 쓸 수도 없는 노릇. 곤란해하는 강희주에게 외숙모가 말을 이었다.

    “그래, 희주야. 내 생각에도 어머님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이 다 바쁘다면 연말쯤 하는 게 어떻겠니? 사부인 생각은 어떠세요?”

    “제 생각에도 연말이 좋을 듯싶네요.”

    결국 연말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가닥을 잡았다. 성대한 결혼식보단 가까운 친척, 지인들만 모아 놓고 소규모 결혼식을 올리기로 예비부부가 뜻을 모았으니 양가 어른들도 이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결혼식에 대한 것까지 이야기가 오가자 속이 타는 건 민준호였다.

    결혼이 깨진 그를 배려해 일부러 말을 걸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민준호는 어쩐지 강희주의 식구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손을 써 놓은 것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도 답답했다.

    사진으로 봐도 딱 경우 취향이었다. 그런 여자가 좋다고 달려들면 경우가 쉽게 넘어갈 거로 생각했다. 그렇게 임사빈에게 푹 빠지면 두 사람의 관계를 강희주에게 흘린다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당연히 자존심 강한 강희주 쪽에서 결혼을 깰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하나 뜻대로 풀리지 않으니 민준호는 물만 들이켤 뿐이었다. 그러느라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동생이 자신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경우는 당분간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형이 다음엔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졌다.

    * * *

    대본을 쓰던 경우는 텀블러의 커피가 다 떨어지자 커피를 채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때 제작부 쪽에서 왁자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경우가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모기범 이하 제작부에 소속된 PD들이 전화기를 든 채 어딘가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됐어?”

    “그게 저쪽으로 다 차출된 모양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이렇게 갑자기는 어렵죠.”

    “그렇다고 촬영 접을 거야? 다시 전화 돌려. 그사이 연락 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

    “무슨 일입니까?”

    “아, 작가님.”

    경우의 등장에 모기범의 눈에 띄게 당황했다.

    “괜찮으니까 말씀해 보세요. 현장에 무슨 일이 생긴 거죠?”

    “그게 실은…….”

    잠시 머뭇거리던 모기범이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랬다.

    드라마 속 이화영이 운영하는 태양 바이오가 신약을 개발하는 벤처 회사의 지원을 도우며 파트너가 되기로 해 놓고 중간에서 신약 제조 기술을 가로채자 억울하게 당한 벤처 회사 직원들이 태양 바이오의 옥상을 점거 시위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하필 가장 앞장서서 격렬한 시위를 하기로 한 보조 출연자에게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것.

    “그런 줄도 모르고 출연하기로 한 거랍니까?”

    “몰랐죠. 보조 출연자는 그때그때 현장에 투입되는 거니까 내용까지 잘 알고 오는 경우는 드물 거든요. 촬영 스케줄만 확인하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럼 다른 분은요?”

    “나머지 분들은 보조 출연한 지가 얼마 안돼서 대사 칠 능력까지는 안 되는 모양이에요. 빨리 다른 보조 출연자를 구해 달라고 난린데, 하필이면 KBC 쪽에서 찍는 사극에 궁중 연회 씬이 있어서 다들 거기 갔답니다. 그 바람에 지금 당장 투입 가능한 보조 출연자를 찾기가 힘든 거고요.”

    드라마를 찍다 보면 별의별 일이 생기기 마련.

    이번 일도 드라마를 찍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만 가지 일 중 하나였다. 단순히 머릿수만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정도 대사를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보조 출연자를 찾는 게 관건이었다.

    “제가 어떻게든 보조 출연자를 찾아보겠습니다.”

    “모 PD님, 오늘 찍는 씬이 어떻게 되죠?”

    “그러니까…….”

    모기범이 촬영 일정표를 건네주자 그것을 살펴본 경우가 말했다.

    “우선, 이 씬이랑 이 씬을 먼저 찍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보조 출연자를 마냥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 차라리 대본을 수정하죠. 촬영 순서를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현장에 물어봐 주세요. 그럼 제가 그사이에 수정해 보겠다고요.”

    “아, 네. 알겠습니다.”

    얼떨떨해하는 모기범을 뒤로한 채 경우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오늘 촬영이 있는 대본을 펼쳐 놓고 어떻게 수정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시위를 벌이던 이들이 옥상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위기를 당하자 그것을 주인공인 이찬수가 해결해 그들의 마음을 얻는 중요한 씬이었다. 그러니 단순 장소만 바꾸는 거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있게 말은 했지만, 베테랑 작가인 그 역시 고민되기는 마찬가지.

    그렇다고 하루 일정을 접는 것 또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촬영 스케줄 사이사이 같은 장소에서 재촬영을 집어넣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민을 거듭하던 경우는 마침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 *

    두 시간이 흐른 뒤 대본 수정을 마친 경우가 다시 모기범을 찾았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벌써 끝내셨어요?”

    쪽대본을 받아 든 모기범은 놀란 눈으로 대본을 살폈다. 놀란 건 놀란 거고 꼼꼼하게 살피는 모습에 경우 역시 살짝 긴장되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어떤 답이 나올지 걱정하는 순간 마침내 모기범이 고개를 들었다.

    “수정한 게 더 좋은데요?”

    “그래요?”

    “네. 이러면 촬영도 더 수월해질 테고 찬수도 더욱 돋보일 것 같아요. 솔직히 시간이 촉박해서 가능할까 싶었는데 역시 작가님이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현장에 대본 보내서 촬영 이어가도록 하면 되겠네요.”

    “네, 여기서부터는 제 일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한시름 놓은 사이 휴대폰이 울렸다.

    벌써 여러 통의 전화가 와 있었다. 대본을 수정하느라 집중한 탓에 전화가 왔는지도 몰랐던 경우는 서둘러 전화부터 받았다. 김예신이었다.

    “아, 누나. 갑자기 전화를 주시고 어쩐 일이에요?”

    김예신의 전화는 다름 아닌 어머니의 호출. 이유 없이 전화해 불러내는 어머니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경우는 곧장 미술관으로 향했다.

    막 관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윤정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빴던 모양이구나?”

    “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너랑 같이 갈 데가 있어. 차는 놔두고 예신 씨 차로 같이 이동하자.”

    “네.”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경우는 예신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요즘 내내 기분이 좋았던 것과 달리 오늘은 가라앉은 어머니의 모습에 경우도 쉽게 말문을 열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잠자코 눈치만 보며 앉아 있었다.

    차는 거침없이 달려 어느새 목적지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다. 그제야 경우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해림 요양 병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차명 주식을 가지고 있다는 박경덕 어르신이 입원해 있는 병원임을 알아차린 경우가 어머니를 돌아봤다. 하지만 윤정숙은 창밖만 바라본 채 침울해 있었다.

    혹시 박경덕 어르신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은 그때 어느새 차가 병원에 도착했다. 얼떨떨한 마음에 차에서 내려 따라간 곳은 지난번 그가 왔던 병실이 아니었다.

    바로 해림 요양 병원의 장례식장이었으니 텅 빈 빈소에 홀로 미소짓고 있는 박경덕의 영정 사진이 그들을 반겨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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