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97화 (197/250)
  • #197. 가족이라는 이름 (4)

    통화를 하는 민준호의 얼굴이 오랜만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게 신경 써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정말 의욉니다. 민 작가 정도 되면 다이렉트로 말했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동생이 일은 잘하는데 다른 쪽으로는 워낙 숙맥이라서요.”

    [하긴 남자라고 그런 말이 다 쉬운 건 아니죠. 직접 만나 보지는 않았지만 민 작가, 신중한 성격이라고 주변에서 얼마나 칭찬을 하는지 솔직히 이번에 다시 봤습니다.]

    “동생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기는요. 어쨌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야기를 잘해 두었으니 사빈이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접근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혹시라도…….”

    [걱정하지 마십쇼, 전무님 이름이 나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만에 하나 동생이 제가 나선 걸 안다면 부끄러워할 겁니다. 아마 제 부탁에 임사빈 씨가 어쩔 수 없이 응했다는 생각에 안 만날 가능성이 크거든요.”

    [그럼 안 되죠. 사빈이한텐 아예 전무님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나저나 형제간에 우애가 보기 좋습니다. 저도 전무님 같은 형님이 있었으면 정말 좋겠네요. 하하하.]

    이런 형제가 또 있다면 그땐 정말 피 튀기고 싸워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어쨌거나 민준호는 만족해하며 전화를 끊었다.

    몇 년간 성향이 바뀌기는 했지만, 동생은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던 놈이었다. 작가라고 옆에서 추켜세워 주니까 점잔 빼느라 그런 거지, 살짝 부추기기만 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했다.

    어차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 결혼만 깨진다면 그는 그동안 동생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을 모두 용서할 생각이었다.

    * * *

    “작가님, 저도 한잔 주세요.”

    어느새 경우의 옆자리를 꿰찬 임사빈이 술잔을 내밀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경우가 그녀의 잔에 술을 채우자 이번엔 그녀가 술병을 빼앗았다.

    “저만 마시면 정 없으니까 작가님도 한 잔 받으세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경우는 잠시 머뭇거리며 술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손 민망하게…… 혹시 벌써 취하신 거예요? 보기보다 술을 잘 못하시나 봐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거뜬하죠.”

    술에 취한 탓인지 쓸데없는 자존심에 경우는 결국 임사빈이 건네는 술을 받았다. 가득 채워진 술잔을 쭉 들이켜자 정신이 더욱 알딸딸해지는 것 같았다. 슬슬 감기는 눈 탓에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려 보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 주변에 앉은 이들이 귀엽다며 웃었다.

    “작가님,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러다 탈 나요.”

    “괜찮다니까요.”

    “사빈 씨는 주량이 어떻게 돼? 꽤 마신 것 같은데 얼굴색 하나 안 변했어.”

    “뭐, 남들 먹는 만큼은 마셔요.”

    “나는 남들 먹는 만큼 먹는다는 사람이 제일 무섭더라. 남의 기준이 어떻게 되는데? 말술 먹는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나저나 사빈 씨 되게 의외네요. 술 한 잔도 못 마실 줄 알았는데.”

    “원래 여배우 중에 의외로 주당이 많아요. 이슬만 먹고 살잖아요.”

    “하하하. 사빈 씨 농담도 참 잘하네. 솔직히 이렇게 쾌활한 성격인 줄 몰랐지.”

    “제 성격이 어떨 거라고 생각하셨는데요?”

    “솔미랑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죠. 착하고 예의 바르고―.”

    “재미없는 성격이요?”

    임사빈의 도발에 사람들은 경우의 눈치를 봤다. 역할을 맡은 배우가 캐릭터보고 재미없다고 말했으니 아무래도 작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기분 상한 기색 하나 없는 경우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솔미가 눈에 띄는 캐릭터는 아니죠. 찬수만큼 극적인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화영처럼 주인공과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아니니까 재미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대신에 드라마의 중심을 잡아 주는 중요한 캐릭터잖아요. 그래서 재미는 좀 없지만 좋은 캐릭터라고 생각해요.”

    “오호.”

    “그러니까 작가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한잔 더 받으세요. 한 잔은 원래 정 없다고 하잖아요.”

    아까 한 말도 있으니 하는 수 없이 임사빈이 건네준 술을 한 잔 더 마신 경우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보던 임사빈이 눈치를 봐 가며 적당히 그의 뒤를 따랐다.

    “어? 어디로 간 거야?”

    안 그래도 오늘 경우가 술을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아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경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청모는 어딘지 불안하게 느껴졌다. 부탁받은 것도 있고 하니 경우를 찾아 나서려는 참에 누군가 그를 붙잡았다.

    “자, 우리 <태앙의 제국>을 이끌어 가는 선장이자 대장님이신 우리 안 PD님의 노래가 있겠습니다. 박수!”

    얼결에 숟가락을 꽂은 소주병을 받은 그는 주변 사람들의 호응에 차마 밀어내지 못한 채 경우가 어디 있나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 *

    “후우.”

    “자, 이거 드세요. 정신이 좀 들 거예요.”

    자신의 앞으로 내민 꿀물을 보던 경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 앞엔 임사빈이 서 있었으니 끔뻑끔뻑 보고만 있는 경우에게 괜찮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우는 하는 수 없이 꿀물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 병을 다 비워 내자 임사빈이 그녀의 옆으로 와 앉았다.

    뒤로 식당 안 사람들이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벽 너머 이곳은 다른 공간인 듯 고요하게 느껴졌다.

    “아, 춥다.”

    으스스 몸을 떨던 임사빈이 은근슬쩍 경우의 팔짱을 끼였다. 반응을 보기 위해 살짝 그의 눈치를 살피는데 취한 탓인지 경우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경계심이 없는 걸 확인한 그녀가 경우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작가님, 그거 아세요? 저요, 이번 드라마를 같이 하게 돼서 얼마나 기뻤는데요. 작가님이 제 이상형이거든요. 작가님은 저 어떻게 생각하세요?”

    살며시 올려다 보자 경우는 어느새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작가님 참 귀엽게 생겼네.”

    몸을 일으킨 그녀가 잠든 경우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었다. 감각은 깨어 있는 건지 움찔했지만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대표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남들보다 괜찮은 얼굴로 캐스팅 매니저에게 뽑혀 운 좋게 배우가 되었을 뿐 그녀 역시 자신이 배우로서 엄청난 재능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동안 여러 역할을 맡았지만 솔직히 연기력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가 한 역할들을 보면 모두 엇비슷한 탓이었다.

    물론 그녀도 맡아본 적 없는 다양한 캐릭터를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정여희가 맡았던 이화영처럼 악의 화신이 되고 싶었으나 솔직히 자신이 그런 캐릭터를 소화할 능력이 있을지 미지수였다. 괜히 배우로서 밑천만 드러나는 건 아닌가 두려웠다.

    그러던 차에 만난 경우.

    준수한 외모, 어마무시한 재력, 거기다 드라마 작가로서 출중한 능력까지. 자신을 정상에 올려 줄 사람은 이 남자밖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으나 어쩐지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무방비한 상태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취한 건 어쩌면 행운이었으니.

    임사빈은 조금 더 경우에게 다가갔다. 잠든 그의 귀에 후 하고 입김을 불어 넣자 움찔하며 몸을 떠는 모습에 피식 웃던 그녀가 경우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려던 순간.

    “동작 그만.”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그녀가 돌아봤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처음 보는 여자였다. 화장기 하나 없었으나 배우들에 익숙해진 그녀가 보기에도 빼어난 미인이었다.

    아무리 스탭들이 많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거기다 여자가 서 있는 곳은 식당 밖에서 들어오는 쪽이었으니 상관 없는 사람이란 생각에 임사빈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뭐, 뭐예요?”

    그러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법 제299조,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을 한 자는 제297조, 제 297조의 2 및 제298조의 예에 의한다.”

    “예?”

    “딱 봐도 그 남자 지금 술 취해 제정신이 아닌데 그런 식으로 강제 추행하면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1,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어요. 모르는 것 같아서.”

    “다, 당신이 뭔데 그러는 거죠? 남의 일에 상관 말고 그냥 갈 길 가세요.”

    “남 같은 소리 하네!”

    “무, 뭐? 당신 뭐야?”

    살짝 열받은 여자가 후 하고 입김을 위로 내뿜자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그 모습에 임사빈이 흠칫 놀랐으니.

    “뭐긴? 나, 대한민국 검사! 그리고 그 남자, 여자 친구! 곧 결혼할 거거든.”

    그러면서 자신 있게 손등을 들어 보였다.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금반지가 반짝였다. 강희주가 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경우의 손으로 저절로 시선이 가는 임사빈. 경우의 손가락에도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으니 당황한 임사빈이 서둘러 일어났다.

    “시, 시, 실례했습니다.”

    그러면서 후다닥 몸을 피했다.

    “쨉도 안 되는 게 까불고 있어.”

    임사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던 그녀가 경우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경우의 모습에 강희주는 어이가 없었다.

    “이 속 편한 남정네를 어떻게 하지?”

    잠든 경우를 흔들어 깨웠다.

    “경우 씨, 일어나 봐요! 경우 씨! 야, 민경우!”

    하지만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 그였다. 그때 식당 안에서 안청모가 뛰어나왔으니.

    “아, 왔어요? 처남 완전히 뻗어 버렸네. 오늘따라 사람들이 자꾸 술을 권해서.”

    “아무래도 제가 집에 바래다줘야 할 것 같은데요.”

    “혼자서 괜찮겠어요?”

    “어떻게든 해 보죠. 차까지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 네.”

    그렇게 두 사람이 힘을 합한 덕분에 잠든 경우를 강희주의 차에 겨우 태울 수 있었다.

    “연락 주셔서 감사해요.”

    “저야말로 처남을 바래다주신다니 고맙죠. 그럼 살펴 가세요.”

    그렇게 떠나는 두 사람을 보며 안청모는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넷이서 식사를 하던 날을 떠올렸다. 잠시 화장실을 가려는데 따라 나온 강희주가 그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

    ‘드라마 찍을 때 보니까 회식도 많이 하고 그러던데, 혹시라도 술 많이 취하고 그러면 저한테 연락 좀 주시겠어요? 아, 여기 제 명함이요.’

    ‘처남은 회식해도 그렇게 술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여차하면 연락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제 결혼할 사이니 관리한다 이거지? 그나저나 우리 처남 어쩌냐? 꽉 잡혀 살 것 같은데.”

    자신의 처지는 생각도 안 한 채 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가득했다.

    한편, 운전하던 강희주는 옆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경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무방비하면 어쩌자는 건데? 이 남자 이거 안 되겠네.”

    액셀을 밟은 그녀의 얼굴이 의미심장하게 변했다.

    * * *

    띠링, 띠링, 띠링.

    아침부터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들어오는 소리에 시끄러웠던 경우가 겨우 눈을 떴다. 혹시라도 촬영장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싶어 문자를 확인한 순간 보이는 건 온통 결혼 축하 메시지.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는데 그 모든 건 다름 아닌 인터넷 기사로부터 비롯되었다.

    드라마 작가로 유명한 새명 그룹의 삼남 민경우와 재경 그룹 외손녀이자 현직 검사인 강희주가 결혼한다는 소식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발표하기는 할 거였지만 갑작스러운 소식에 어안이 벙벙하던 그때 띡띡띡띡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시간에 그의 집으로 올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다.

    “야, 이게 다 뭐냐? 결혼할 거였으면 이 형님한테 먼저―.”

    말을 하던 김강철이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얼굴이 이상해졌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푸, 으하하하하. 야, 너 얼굴이 그게 뭐야?”

    김강철의 말에 얼굴을 만지던 경우가 서둘러 거울을 찾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 경우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빨간 립스틱으로 이마며 볼까지 빈 여백을 찾을 수 없도록 글씨를 써놓았으니 대충 보면 이런 내용이었다.

    ‘임자 있는 몸이니 건들지 마시오.’

    그러고 보니 어제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술에 취한 자신을 데리고 오느라 강희주가 끙끙댔던 모습이 떠올라 살짝 웃고 있는데 옆에서 찰칵찰칵 소리에 돌아보니 김강철이 어느새 휴대폰을 들이대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 꼴을 하고도 좋단다.”

    “야, 그거 안 지워?”

    “싫은데? 내가 왜? 너도 나 술 취했을 때 사진 찍어 가지고 두고두고 놀린 거 기억 안 나냐? 이 귀한 걸 왜 지워? 하하하!”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어제 생각 없이 던졌던 돌이 오늘 자신에게 돌아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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