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96화 (196/250)
  • #196. 가족이라는 이름 (3)

    민준호는 돈놀이를 한다며 명동 홍 사장을 우습게 봤지만 그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웬만한 대기업의 회장님들도 급할 때 찾아간다는 홍 사장은 돈을 빌려줄 때는 천사였지만 돈을 갚지 못했을 때는 악귀라 불릴 만큼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었다. 자기 돈이 걸려 있을 땐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반드시 받아 내고야 마는 그의 모습에 치를 떨다가도 정작 급할 땐 그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건 다른 곳에선 다 외면하는 순간에도 수십억의 돈을 척척 빌려준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경제를 좌지우지한다는 회장님들도 그의 앞에선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그도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 못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오라버니, 우리 애들 만났다면서요?”

    “그게 정숙아…… 내가 비밀로 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정말이야.”

    “그럼 저한테 연락이라도 했었어야죠? 꼭 내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만들어요?”

    “전화하려고 했어. 당연히 하려고 했지. 근데 나도 귀가 있고 보는 눈이 있는데 너 바쁘다며. 별일 아닌 거로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았지.”

    안 그래도 바쁜 그녀는 이번 비엔날레의 자문위원을 맡아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살짝 예민해지긴 했으나 결국 홍 사장의 말에 치솟던 화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

    “나중에 한가해지면 다 말하려고 했지. 어쨌든 지금은 일이 중요한 거 아니냐?”

    “오라버니가 그렇게 절 걱정하는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 말하지 마라. 나 섭섭해. 그래도 우리 인연이 하루 이틀 이어 온 것도 아닌데 말이야.”

    홍 사장의 말에 윤정숙은 살짝 미안한 기색을 비쳤다.

    “언니랑 애들은 잘 있죠?”

    “그럼, 잘 있지. 덕분에 잘 지내. 그나저나 너네 둘째, 돌아가신 회장님을 쏙 빼닮았더구나.”

    “얼굴만 닮았어요. 하는 짓은 영 아니에요. 그래, 그놈이 와서 뭐라던가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끼고 살던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진심인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기 위함인지 헷갈렸던 홍 사장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여차하면 자기편 들어 달라, 뭐 그런 얘기지. 너무 염려 마. 어린 마음에 저도 걱정이 되니까―.”

    “허!”

    윤정숙의 탄식에 홍 사장은 말도 마치지 못한 채 움찔하고 말았다.

    “네가 만나지 말라고 하면 앞으로 안 만날게.”

    “아니요. 만나자고 하면 만나세요. 술도 잔뜩 사 달라고 하시고요. 대신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나 알려 줘요. 천지 분간을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는 혼 좀 나야죠.”

    그러면서 윤정숙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려고?”

    “네.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어요.”

    “그래. 바쁜 사람은 일이 중요하지. 조심히 가.”

    “다음에 부부 동반으로 식사나 같이해요.”

    “어? 그, 그래. 그러자.

    생전 가야 밥 한 번 먹잔 소리가 없던 그녀가 웬일로 밥을 먹자고 하니 홍 사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혹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 윤정숙이 문을 벌컥 열자 문 앞에 바짝 붙어 선 채 엿듣고 있던 조 실장이 휘청였다. 자신을 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조 실장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곧이어 그녀가 떠나자 슬쩍 고개를 든 조 실장이 황급히 문을 닫고는 조금 전 윤정숙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저분 누구세요? 포스가 장난 아니신데요?”

    “예담 미술관 윤정숙.”

    “예담, 예담…… 아, 새명 그룹 사모님! 혹시 새명 그룹도 사장님한테 돈 빌려 썼어요? 장부에는 없던데…….”

    생각 없이 뱉은 말에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빛.

    “제가 실언을……. 근데 저 사장님이 그렇게 쩔쩔매시는 거 처음 봤어요.”

    무슨 사연이 있길래 대기업 회장들도 휘어잡는 그가 꼼짝을 못하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홍 사장은 그런 조 실장의 눈빛을 외면했다. 일을 잘하지만 생각이 얕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떠벌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의 말에 오래전 과거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홍 사장이 한창 치기 어린 시절,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그가 유일하게 남들보다 잘났다고 여긴 건 매운 주먹 하나였다. 주먹으로 시장 골목을 평정한 뒤 가난한 시장 상인들 등골을 빼먹을 때 윤정숙의 부친인 故 윤 회장을 처음 만났다.

    ‘젊은 놈이 그렇게 그릇이 작아서 어디다 써? 잔말 말고 내 밑으로 들어와.’

    누구라도 벌벌 떠는 자신을 막 대하는 그의 모습에 기분이 나빴을 법도 하지만 조그만 동네에서 주먹질하는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포부에 매료되고 말았으니 결국 그의 밑으로 들어가 시키는 일을 시작했다.

    남들 앞에선 선량한 사업가의 모습을 했던 윤 회장은 뒤로는 홍 사장을 시켜 본인이 하기엔 곤란한 더러운 일을 처리하게 했다. 단둘이 있을 땐 간이고 쓸개고 빼 줄 것처럼 말하다가도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홍 사장은 철저하게 윤 회장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윤 회장의 개라고 무시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윤 회장의 태도가 홍 사장은 거슬리지 않았다. 그날 자신을 찾아온 윤 회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을뿐더러 콧대 높은 양반들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여우 같은 윤 회장은 홍 사장을 가끔 그의 집으로 초대해 섭섭할 그의 마음을 달래 주기도 했으니 윤정숙과의 인연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윤 회장이 애지중지한다는 딸 윤정숙. 홍 사장은 지금도 윤 회장의 집에 갔던 날 윤정숙을 보았던 일을 지금껏 잊지 못했다.

    “낭만이었다고 해 두자.”

    한숨과 함께 내뱉은 혼잣말에 조 실장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한테 한 얘기 아니야. 홍제동 수금은 어떻게 됐어?”

    우물쭈물하는 조 실장으로 보며 홍 사장은 생각했다. 사나이라면 가슴 속에 낭만 하나쯤은 품고 사는 거 아니겠냐고.

    * * *

    “자존심도 없는 건지 그렇다고 제 형한테 붙어?”

    투덜대는 윤정숙을 룸미러로 보던 김예신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형제잖아요.”

    “그래, 형제…… 형제 맞지.”

    당연한 말이었는데도 김예신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정숙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사업을 위해 자신을 민 회장과 결혼시킨 아버지, 단지 딸이라는 이유로 능력이 있지만, 후계 경쟁에서 밀려난 딸, 원치 않는 아들에게 강요한 자신까지…….

    물론 그녀는 지금도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경우가 결심만 해 준다면 자신의 전력을 쏟을 마음도 있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옳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자기 생각이 틀린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렇게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디요? 병원이요?”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그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여희 씨, 오늘 연기 좋았어.”

    “감사합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타고난 재능이 있으니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빛을 발하는 거죠. 안 그래요?”

    “옳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태양의 제국> 첫 촬영이 들어간 지 한 달 정도 지난 뒤 갖은 첫 회식이었다. 비중 있는 중견 배우들의 스케줄이 바쁜 탓에 이제야 시간이 맞아 겨우 회식을 할 수 있었다.

    한 달, 길다고 하면 긴 시간이었고 짧다고 보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서로 간의 성격 파악이라든가 실력 같은 것들을 알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번 회식의 다크호스는 단연 정여희였다.

    <태양의 제국>에서 주인공 이찬수를 괴롭히는 이복 누나 이화영으로 등장하는 정여희는 경영학을 공부하고 대기업을 다니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극심하던 차에 취미로 아마추어 연극을 시작한 게 계기가 되어 뒤늦게 연기에 대한 갈망과 열정을 깨달은 그녀는 직장을 그만두고 연기자의 길로 들어섰다.

    적지 않은 나이,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그녀의 결정을 주변에선 다들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짧게 나오는 단역에 대사가 있더라도 겨우 한 줄뿐인 역할이 지금껏 그녀가 한 연기의 전부였다.

    그러던 차에 알게 된 <태양의 제국> 오디션. 그녀는 자신이 이화영 역을 맡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애초 그녀가 오디션에 참가했던 건 다른 역할이었으나 결국 캐스팅된 건 드라마 속 비중이 큰 이화영 역이었다. 평생 쓸 운이 한꺼번에 터진 건 아닌가 싶었던 그녀 역시 첫 촬영부터 칭찬을 받았던 건 아니었다.

    “솔직히 재능이라고만 말하기 그런 게 여희 씨 첫 촬영 들어가던 날 생각 안 나요?”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렇네.”

    “선배님, 놀리지 마세요.”

    “왜? 그만큼 발전했으니까 칭찬받아 마땅하지.”

    “아, 진짜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손발이 오그라들어요. 왜 그렇게 했나 몰라.”

    “처음이니까 그렇지. 단역만 하다가 큰 역을 맡았으니 그 정도 부담 안 갖는 신인이 어디 있겠어?”

    “진짜 PD님이나 작가님한테 감사드려요. 나중에 재촬영 허락해 주셨잖아요. 그런 경우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게 다 비용이니까. 근데 그 두 분도 재촬영을 하는 편이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거 아니겠어?”

    “전 좀 아쉬워요. 그 방송 그대로 나갔어야 배우 전여희의 흑역사 시절, 이러면서 회자될 거 아니에요?”

    “진짜 짓궂다. 선배님, 너무해요!”

    “원래 선배는 후배 놀려 먹는 재미로도 사는 거예요. 누나도 나중에 저처럼 되지 말라는 법 없을걸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배우여도 꼬박꼬박 선배님이란 호칭을 쓰며 후배 노릇을 톡톡히 한 덕에 그녀를 불편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조연에 불과한 그녀가 주목을 받자 상대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사람이 있었으니 이 드라마의 진짜 여주인공 임사빈이 그랬다.

    올해로 데뷔한 지 8년 차에 접어드는 그녀는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어 고민이기도 했다. 8년 동안 대표작이 없다는 건 그만큼 그녀의 연기가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만큼 인상 깊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여주인공과 늘 칭찬을 달고 사는 조연.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당사자는 무척 신경 쓰이는 일이었으니 같은 테이블도 아닌데 화기애애한 이야기가 들려올수록 그녀는 불편해졌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화장실로 피신한 그녀는 강박적으로 손을 씻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잘했다는 거야. 대체 뭐가?’

    애초 복수의 화신이 된 이찬수가 완전히 악한 인물로 변하지 않도록 브레이크 같은 역할을 해 주는 게 그녀가 맡은 최솔미라는 역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 늘 그 자리를 지키며 주인공이 잘되기를 비는 선한 역. 당연히 주인공과 대립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는 이화영과는 완전히 다른 성향의 캐릭터였다.

    그녀가 연기를 못했다기보다 눈에 띄지 않는 역할이었는데도 그녀는 사람들이 자신의 연기력을 나무라는 것처럼 들렸다. 이러다 드라마에서 점점 비중이 줄어들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엄살이 아닌 게 실제로 몇 년 전 그녀가 출연했던 어느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의 요구로 서브 여주의 비중이 늘어난 탓에 자신의 비중이 줄어들었던 경험이 있는 그녀로서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녀는 세면대 앞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내세울 건 역시나 이 얼굴뿐이었다. 그렇게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문득 소속사 대표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람이 성공하려면 말이야, 두 가지 중 한 가지는 꼭 있어야 해. 그게 뭐냐? 재능, 아니면 인맥! 남보다 특출나게 잘하는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되어 있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세상이 알아주거든. 근데 그게 아니라면 날 높은 자리로 이끌어 줄 사람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

    ‘갑자기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뭔데요?’

    ‘톡 까놓고 말해서 얼굴 반반한 거 빼고 너한테 볼 게 뭐 있냐? 솔직히 네가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건 아니잖아.’

    ‘그래서 지금 대표님께 잘하라, 그 말씀이세요?’

    ‘머리가 나쁘면 말귀라도 알아먹어야 할 거 아냐? 누가 나한테 잘하래? 지금 너희 드라마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누구야? 바로 작가잖아!’

    ‘……민경우 작가요?’

    ‘그래, 작가면서 제작사 대표에 요즘 지상파 못지않게 잘나간다는 케이블 방송사 최대 주주 아냐? 그런 사람 꽉 잡고 있으면 그야말로 승승장구 아니겠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임사빈은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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