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가족이라는 이름 (2)
“컷!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을 마치는 소리에 흠뻑 젖은 한대건은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그 바람에 봉인이 풀린 것처럼 그의 턱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5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생각보다 쌀쌀했다. 거기다 벌써 1시간 가까이 살수차가 뿌려 대는 강한 물줄기를 맞았으니 몸이 남아날 리 없었다.
서둘러 달려온 스탭들이 수건이며 담요는 물론이고 휴대용 난로까지 가져와 그를 둘러쌌다. 그렇다고 얼어붙은 몸이 녹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드디어 촬영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그런 그에게 안청모가 다가왔다.
“대건 씨, 정말 수고했어요. 베테랑 배우들도 비 맞는 씬은 힘든데 대건 씨가 워낙 잘해 줘서 그림 잘 나올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제가 초반에 좀 헤매서…… 죄송했습니다.”
더 빨리 끝날 수 있는 촬영이었는데 자신이 방향을 잘 잡지 못해 시간이 더 걸린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처음 찍는 씬인데 그럴 수 있죠. 어쨌든 진짜 고생 많았어요. 푹 쉬고 내일 만나자고 했으면 좋을 텐데 벌써 내일이네요. 이래서 밤 씬은 힘들어. 몇 시간 못 자고 다시 나와야 하니까.”
“이 정도는 아직 거뜬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내가 다 고맙네요. 어쨌든 몇 시간 안 남았지만 좀 쉬고 이따가 봅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살수차까지 동원된 이런 밤 촬영은 배우들도 고생이었지만 같이 일하는 스탭들 역시 죽을 맛이었다. 그나마 스튜디오 글로리는 주당 정해진 근무 시간을 초과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덕분에 다른 촬영 현장보다도 일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자정을 훨씬 넘기고 나서야 촬영이 끝나자 뒷정리를 조연출에게 맡긴 안청모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랐다. 시간은 이미 3시 30분.
차 안이라든가, 대기실, 근처에 사는 연출부 막내의 자취방 등등 결혼 전 그는 머리만 기댈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굳이 촬영장에서 먼 집으로 가는 방법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아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는 집으로 향했다. 경기도의 세트장에서 집이 있는 한남동까지는 차로 1시간 남짓. 그나마 이른 새벽이라 도로가 뚫려 있어 운전하기는 오히려 편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집 안으로 들어간 그는 잠들어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혹여 아내가 깨지 않도록 살며시 욕실로 들어간 그는 일단 몸부터 씻었다. 직접 비를 맞은 건 아니었지만 살수차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덕분에 주변 공기까지도 얼어붙는 것 같았으니 뜨끈한 물에 몸을 맡기자 피곤이 풀리는 것 같았다.
개운하게 씻고 나왔더니 언제 일어났는지 아내 민지선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 때문에 깼어요?”
“일어날 때 됐어요.”
시계를 보니 이제 막 5시를 지나고 있었다.
“일어나긴 아직 이른데…… 좀 더 자지 그래요?”
“아니에요. 일찍 자서 괜찮아요. 근데 지금 들어온 거예요? 경우 이 자식 안 되겠네. 그래도 사람 잠을 재워야 할 거 아냐?”
“괜찮아요. 원래 촬영이란 게 밤낮이 따로 없잖아요.”
“그렇긴 해도―.”
“꼬르륵.”
하필이면 그때 안청모의 뱃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민지선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으니.
“설마 저녁 먹고 지금껏 아무것도 안 먹은 건 아니죠?”
“야식 먹었죠, 먹었는데…….”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밥 차려 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아직 시간도 있는데 조금 더 자요.”
“잠 다 깨서 잠도 안 와요. 설마 내 음식 솜씨 못 믿어서 그런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잠깐 멈칫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기분 탓이에요, 기분 탓.”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간만에 의욕을 불태우는 아내를 차마 말릴 수 없었다.
“오랜만에 당신 아침 챙겨 주고 설렌다. 아니다, 저녁인가?”
“그게 뭐 대수겠어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이왕이면 먹고 싶을 걸로 해 줘야지.”
“괜찮아요. 그냥 아무거나―.”
“쓰읍! 아무거나라니요.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뭐든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이런 기회 흔치 않아요.”
지선의 말에 피식 웃은 안청모가 입을 열었다.
* * *
“기껏 먹고 싶다는 게 떡만둣국이었어요? 이왕이면 어려운 것 좀 부르지. 오랜만에 솜씨 좀 발휘해 보려 했더니.”
회사 일은 잘하지만 결혼 전엔 부엌일은 손도 안 대 봤던 그녀의 괜한 허세에 안청모는 웃고 말았다.
“그러게요. 나도 입맛이 고급스러워서 지선 씨 솜씨 좀 보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떡만둣국이 먹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요.”
“뭐, 나름 아침으로도 괜찮은데요.”
비록 소금 간이 덜 돼서 살짝 싱거운 데다가 파는 큼직하게 썰어서 이게 고명으로 넣은 파인지 아니면 육수를 내려고 넣은 건지는 헷갈려도 아내가 자신을 위해 해 준 음식을 안청모는 맛있게 먹었다.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에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이런 게 행복이라 느꼈다.
그때 민지선은 뒤늦게 잊은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참,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네, 이번 주말엔 촬영을 다 뺐거든요.”
“다행이다. 근데 어쩐 일로 촬영을 뺐어요?”
“원래는 올해 4분기에 편성이 잡혀 있었는데 이번 드라마, 좀 시끄러웠잖아요. 그래서 내년 1분기로 편성을 바꿨죠. 시간도 넉넉하고 스탭들이 이왕이면 주중에 빡세게 해도 주말엔 쉬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스케줄 잡았죠.”
“현명한 선택을 하셨네.”
“지금이야 그렇긴 한데 막바지까지 가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죠. 어쨌든 웬만하면 방송 들어가기 전에 촬영을 다 마칠 생각이거든요. 근데 주말은 왜요?”
“집에 가야 해서요.”
“무슨 일 있어요?”
“경우가 호출한 모양이더라고요. 혹시 경우한테 무슨 이야기 들은 거 없어요?”
“아니요, 별말 없었는데……. 첫 촬영 때만 보고 그 이후론 통 보지 못했어요. 대본 쓰느라 처남도 바빠서 촬영장에 잘 안 오거든요.”
“그래요? 무슨 일일까요?”
“가 보면 알겠죠.”
안 그래도 늘 스펙터클한 동생이 이번엔 무슨 일을 벌이나 싶어 민지선은 어서 빨리 주말이 오기 만을 기다렸다.
* * *
“저 희주 씨랑 결혼하려고요.”
“크허억, 커, 컥.”
폭탄선언과도 같은 말에 사레들린 준호가 심하게 기침을 해 댔지만 너무 어안이 벙벙한 상태라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 주는 이 없었다.
뒤늦게 정현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을 뿐.
갑작스러운 결혼 이야기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반기는 분위기였다.
“희주랑 얘기가 된 거야?”
“여사님께 인사는 드렸고?”
“아직 말씀 못 드렸어요. 안 그래도 내일 찾아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리려고요. 그 뒤 우리 집으로도 초대할 생각이에요.”
“잘됐다. 축하해.”
“축하해요, 도련님.”
“축하해, 처남.”
“축하한다.”
“……나도.”
겉으론 다들 그의 결혼을 반기는 듯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한 이도 있었으니 민준호가 그랬다.
식사가 끝난 뒤 그는 바쁜 일이 생겼다면서 집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평소 자주 가는 바. 독한 술로 연거푸 들이켰는데도 어쩐지 취한 기색이 없었다. 잔을 가득 채운 그가 마시려던 순간 그의 손을 잡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형 민정현이었다.
“그렇게 마시다 탈 난다.”
“탈 나라지. 근데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는데? 김 기사가 꼰질렀어?”
“꼰지르긴. 넌 이제 내 손바닥 안이야. 어디 있는지 뻔히 보여. 괜히 애꿎은 김 기사 잡지 마.”
“내가 내 기사를 잡든 말든.”
“걱정돼서 와 봤더니 생각보다 멀쩡하네.”
“멀쩡? 형 눈엔 내가 멀쩡해 보여?”
서슬 퍼런 민준호의 눈빛에 그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실언했다. 미안해.”
“내 결혼은 그런 식으로 망쳐 놓고 지는 지금 이 타이밍에 결혼을 해? 이거 완전히 나 물 먹이라고 작정을 한 거지?”
“아무렴 너 물 먹이려고 결혼한다고 했겠냐? 너는 세상을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가만 보면 경우는 너 신경도 안 쓰는 거 같더만.”
동생이 째려보는 눈빛에 형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머니 그렇게 웃으시는 거 진짜 오랜만인 거 알아?”
“알아. 너 결혼한다고 했을 때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잖아. 아, 어머니를 웃게 만들려면 결혼을 해야겠구나.”
“그럼 형도 한 번 더 하던가.”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니지. 경우한테 뺨 맞고 와서 나한테 화풀이하는 건 또 뭐야? 너, 나한테 그러지 마라. 임시라도 지금 네 편은 나 하난데, 안 그래?”
“으아악, 열 받아! 저 새끼를 어떻게 하면 좋지? 나도 확 그놈 결혼 깨 버릴까?”
“야!”
“놀라긴. 농담이야, 농담”
“진짜지? 진짜 농담으로 한 소리 맞지? 어휴, 간 떨려라.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마. 너처럼 선봐서 결혼한다면 모를까 경우, 그 아가씨 만난 지 꽤 됐다며? 그러니까 너도 그만 잊어버려.”
“…….”
“어? 왜 대답이 없을까? 너 혹시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잊지 마라. 경우한테 그 아가씨 붙여 준 사람 다름 아닌 어머니다. 괜히 수작 부리다가 너만 진짜 개털 돼!”
“이상한 생각은 무슨. 형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보지 않았으면서 나를 너무 나쁘게 모는 경향이 있어.”
“그걸 꼭 들여다봐야 아냐? 어쨌든 괜한 일로 흥분하지 마. 먼저 흥분하는 쪽이 지게 되어 있어. 그래도 네가 형인데 이럴 때 넓은 마음을 보여 주는 게 좋지 않겠냐?”
“넓은 마음은 개뿔.”
“그래, 네 심정 이해 못 할 건 없지. 하필 골라도 재경 그룹 외손녀일 건 뭐야? 참, 외동딸이라서 자기 어머니 지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했지? 장모가 일찍 돌아가신 게 부럽기는 또 처음이네. 이래서 될 놈은 된다는 건가? 그나마 경우가 후계 경쟁에서 빠진 게 다행이었지, 아니었음 지선이보다 더한 상대였을지도 몰라.”
민정현의 말에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민준호가 사색이 된 채 형을 바라봤다.
“형,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닐 것 같은데?”
“왜?”
“걔네 할머니, 손 여사님 말이야. 우리 새명 물산 주식 가지고 있지 않아?”
준호의 말에 뒤늦게 깨달은 민정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 여사님 지분이 몇 퍼센트였지?”
* * *
아까부터 소파에 누운 채 손을 쫙 피고는 손가락에 낀 커플링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 손녀의 모습에 어이없던 손주옥이 입을 열었다.
“다이아도 안 박힌 금반지 하나 받고서 그게 그렇게 좋아?”
“할머니, 다이아가 뭐 별거야? 나는 그런 거보다 이런 반지가 더 좋아.”
“하여간 우리 손녀 기쁘게 해 주는 거 그렇게 어려운 거 아니라 좋네. 금반지 하나 사다 주면 될 거 아냐.”
“아무렴 내가 금반지라서 좋아했겠어? 이건 다 경우 씨의 깊은 뜻이 담겨서 좋은 거라고.”
“깊은 뜻?”
“솔직히 다이아 반지 같은 거 결혼식 할 때면 몰라도 평소엔 하고 다니기 그렇잖아. 특히나 출근하면 더더욱 그렇잖아. 그러니까 부담 없는 금반지 항상 끼고 다니면서 자기 생각하라는 그런 거 아니겠어?”
“내 보기엔 반지 같은 거 고르는 안목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남자가 보석에 대해 뭘 알겠어? 그냥 적당한 거 사다 준 거겠지. 어차피 넌 경우가 사다 준 건 뭐든 다 좋다고 할 거 아냐?”
“아, 할머니!”
“네 할머니 어디 안 갔어, 귀도 안 먹었고. 살살 좀 말해, 살살. 그래도 결혼 안 하겠다는 소리는 안 하네.”
“그게…… 경우 씨가 나 없으면 안 된다는데 뭐, 어쩔 수 없지. 내가 같이 살아 줘야 하지 않겠어?”
“얼씨구, 말이나 못 하면 얄밉지나 않지. 하여간 눈꼴 시려서 못 봐 주겠네.”
퇴원을 해서도 한동안 축 처져서 다니더니 모처럼 기운을 차린 것 같아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딸 대신 품 안에 끼고 살던 손녀가 제 짝을 찾아 품을 떠난다고 하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할머니 마음도 모른 채 강희주는 경우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연민만으로 결혼을 결심하는 남자는 없어요. 희주 씨 힘들어하는 모습 보고 나니까 비로소 내 마음을 알았을 뿐이에요.’
‘어떤 마음인데요?’
‘내가 지켜 주고 싶다는 마음? 희주 씨 눈에 눈물 안 나게 하겠다는 약속은 못 해요. 그렇지만 희주 씨가 울 때 옆에서 같이 울어 줄 생각이에요.’
친구들에게 들었던 화려한 프로포즈도, 다이아 반지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경우의 진심이 느껴진 강희주는 부모 때문에 뚫린 가슴 속 구멍이 조금은 메꿔지는 것 같았다. 이 남자라면 평생을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