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가족이라는 이름 (1)
“이를 어쩌면 좋아요, 큰사모님? 해열제를 먹였는데도 열이 안 떨어져요. 하필 윤 비서도 없는데…….”
아침이 되었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손녀가 늦잠이라도 자는 줄 알고 2층으로 올라왔던 손주옥은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끙끙 앓고 있는 강희주의 모습에 기함하고 말았다. 겨우 해열제를 먹였으나 열이 떨어지기는커녕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 이러다가 일 치르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병원에 전화해서 김 박사 오라고 할까요?”
“아니, 가서 김 기사 보고 올라오라고 해. 김 박사를 기다리느니 얘를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게 더 빠르겠어.”
“네, 큰사모님.”
김 기사를 부르기 위해 예산댁이 아래층으로 내려간 사이 강희주가 힘겹게 눈을 떴다.
“할머니…….”
“그래, 희주야. 정신이 들어? 할머니 여깄어.”
“할머니…… 미안해…….”
“네가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한 줄 알면 아프지 마. 이 할미 얼마나 놀란 줄 알아?”
“할머니…… 할머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제대로 말하지 못한 강희주는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희주야! 희주야!”
* * *
강희주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경우였다.
“스트레스성 감기 몸살이라니……. 도대체 일이 얼마나 힘들길래 애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희주 씨 금방 털고 일어날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일 없었으니까 그렇지. 혹시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나? 그러고 보니까 어제 저녁부터 안색이 영 안 좋더라고.”
“일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죠. 어쨌든 지금은 숨소리도 고르고 잘 자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이제부턴 제가 여기 있을 테니까 할머니는 그만 들어가서 쉬세요.”
“아니야, 내가 여기 있어야지.”
“할머니까지 편찮으시면 희주 씨 누가 돌봐요. 오늘은 제가 있을 테니까 들어가서 좀 쉬다 나오세요. 아까 의사도 이제 괜찮다고 했잖아요. 이러다 할머니마저 쓰러지세요.”
경우의 끈질긴 설득에 손주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고마워. 민 작가가 있어서 얼마나 안심이 되는지 몰라. 그래, 그럼. 나 들어가 볼 테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알았지?”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렇게 손주옥이 자리를 뜨자 경우는 물수건을 따뜻하게 덥혀서 희주의 손을 닦아 주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된 것 같아 경우는 무척 미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자신 때문에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 미안함이 더 컸다. 생각보다 담담한 모습에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정성스레 손을 닦던 그때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경우 씨…….”
“정신이 들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열이 많이 나서 병원에 입원했어요. 할머니가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알아요?”
“그랬구나…….”
“물 줄까요? 물 마실래요? 그래요, 잠깐만 기다려요.”
강희주를 일으킨 경우가 그녀의 손에 물컵을 쥐어 주자 겨우 입만 적신 그녀가 경우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 정말 바보 같죠……. 아무것도 모르고 원망만 했는데……. 이제 보니까 나 진짜 고아였네요…….”
말을 마친 강희주의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런 그녀를 경우가 가만히 끌어안으며 등을 다독여 줬다.
“그런 말 말아요. 할머니가 들으면 서운해하시겠다.”
“…….”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된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희주 씨 옆엔 나도 있고 할머니도 있는데 기운내요. 이렇게 아파하는 거 진짜 적응 안 되네.”
“고마워요.”
“참, 드라마 안 만들기로 했어요.”
경우의 말에 놀란 강희주가 그의 품에서 나와 물었다.
“드라마를 안 만들다니요? 혹시 나 때문이에요?”
“…….”
“그러지 말아요. 경우 씨가 이번 드라마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내가 잘 아는데 경우 씨 하는 일 가로막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상관이 없다고 해도 이 드라마가 나오면 희주 씨 아픈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르잖아요.”
“그렇게 안 만들거잖아요.”
“…….”
“작가로서 경우 씨 능력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요. 그러니까 나 때문에 그러지 말았으면 해요. 대신 좋게 만들어 주면 되잖아요. 나 그 드라마 꼭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드라마 만들어 줘요.”
“……알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경우를 향해 강희주는 처음으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애를 쓰는 것 같아 경우는 그녀가 더욱 안쓰러워졌다.
* * *
저녁 식사 후 이어진 술자리.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 본 적이 거의 없는 민준호는 이런 자리가 아직은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다. 억지로 웃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그 사이 민정현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홍 사장은 알딸딸하게 취했는지 아까부터 했던 말을 또 하고 있었다.
“하하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아무리 요즘 새명 유통이 잘 나간다고 해 봤자 기껏 쇼핑몰 하나 운영하는 것과 그룹을 운영하는 건 다르죠. 여기 두 아드님이 계신데 굳이 따님까지 나설 것 뭐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하하.”
“사장님께서 저희쪽 손을 들어 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암요, 암요. 그나저나 민 회장님도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하시는 군요? 이렇게 번듯한 아드님을 둘이나 두고도 저울질한다니 말입니다.”
“워낙 신중하신 성미라 그러신 거죠.”
“하긴, 새명이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온 것만 해도 민 회장님의 수완이 보통이 아니란 건 증명하고도 남죠. 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죠. 가끔 보면 민 회장님 답답할 때 많아요. 사업이라는 건 말입니다…….”
한 번 말을 시작한 홍 사장은 도무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벌써 몇 시간째 비슷한 말이 이어지고 있는 통에 두 형제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특히나 명동에서 사채업을 하는 홍 사장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민준호의 반응이 더욱 그랬으니 술이 취한 탓에 아까부터 아버지인 민 회장의 험담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기껏해야 몇 푼 빌려주고 이자 받아먹는 놈이 사업에 대해서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런 생각이 미쳤을 때 누군가 자신의 손을 다독이고 있었으니 형 민정현이었다.
슬쩍 돌아보자 고개를 살짝 가로젓는 그의 모습에 민준호는 몸에 힘을 풀었다. 아무래도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잠시 술 좀 깰 겸 민준호는 양해를 구한 채 밖으로 나갔다.
* * *
“그럼 살펴 가시죠.”
비틀거리는 홍 사장을 차에 태워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던 형제는 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들의 차에 오르는 대신 식당 앞 한쪽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밤이라 제법 쌀쌀해진 공기에 조금은 술이 깨는 듯도 싶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동생 민준호였다.
“그러고보면 형도 참 대단해.”
“뭐가?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비꼬는 건데?”
“비꼬다니. 난 정말 순수하게 형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거야. 저렇게 수준 낮은 사람이랑 어울려 주는 거 난 못 하겠는데 형은 잘하잖아? 새삼 형을 다시 봤어. 진짜 목적을 위해서는 물 불 가리지 않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우리 동생, 아직 배가 불렀구나?”
“뭐?”
“하긴 지금껏 어머니 치맛폭에 쌓여서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살아왔으니 저런 사람들 비위 맞추는 거 쉽진 않겠지. 근데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땐 줄 알아? 당장 저 인간 가지고 있는 새명 물산 주식 2퍼센트가 아쉬운 건 우리야. 막말로 저 사람은 우리 손을 들어주나 마나 본인한텐 상관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
“그렇게 사람 가려가면서 네 입맛에 맞는 사람 골라가다간 죽었다 깨어나도 너 지선이 못 이겨. 아니다, 넌 이미 지선이한테 졌지?”
“형!”
“왜? 아직도 자존심 상해? 상할 자존심이 남아 있어? 그럼 그것부터 버리고 와. 내가 보기엔 넌 아직도 지금 네가 처한 현실을 모르는 것 같아. 술 깨고 제대로 생각해 봐.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 먼저 간다.”
평소라면 두 사람 다 이렇게까지 하진 않았을 텐데 술이 취한 탓이라 여긴 민정현이 먼저 차에 올랐다. 곧 그가 탄 차가 떠나자 홀로 남은 민준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원에 깔린 자갈에 발길질을 하자 튕겨져 나간 자갈이 나뒹굴었다. 그 자갈을 지그시 밟아 비비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잘난 척 하기는. 꼴에 지도 형이라 이거지? 두고 봐. 진짜 회장 자리에 앉는 건 형이 아니라 내가 될 테니까.”
이를 부드득 갈던 그가 이내 차에 올랐다. 민준호의 차마저 떠나자 그곳에 정막 만이 있을 뿐이었다.
* * *
재개발을 앞두고 텅 비다시피한 마을로 오랜만에 사람들이 북적였다.
드라마 <태양의 제국> 첫 촬영을 앞두고 있었으니 촬영 준비로 스탭들이 분주했다. 을씨년스럽기만 했던 상가는 미술팀의 손길에 허름하지만 특색있는 상가 거리로 변모해 있었다.
“발품 팔고 다니신 보람이 있으셨네요.”
“그래? 민 작가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운데?”
태양 그룹 이 회장의 아들이 삼촌과 함께 사는 칼국수집을 찾기 위해 안청모는 전국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었다. 비록 첫 회 몇 씬밖에 나오지 않는 곳이었지만 이 회장의 회한이 있는 곳이면서 모든 사건이 시작되는 지점이었으니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다행히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재개발을 앞두고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이곳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운이 좋았네요. 2주일 후에 철거가 시작된다면서요?”
“어. 그래서 더 아쉬운 것 같아. 이렇게 괜찮은 곳인데 사라진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내가 애틋해지네. 어쩐지 찬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아.”
“이곳은 허물어져 사라져도 우리 드라마 속에는 영원히 남아있는 거잖아요.”
“그게 또 그런가? 그럼 마지막 순간이니까 더 예쁘게 담아 줘야지. 촬영 감독님 좀 만나서 상의 좀 해 봐야겠어.”
그렇게 안청모가 촬영 감독을 찾아 떠난 사이 경우는 촬영장 곳곳을 둘러봤다.
그때 멀리서 너덜해진 대본을 손에 든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 드라마의 주인공 이찬수 역을 맡은 배우 한대건이었다.
주로 주인공의 친구나 자잘한 단역만 전전하던 그는 이번 오디션으로 300대 1의 경쟁률의 뚫고 당당히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했다. 대사를 연습하는 그의 옆에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한대건이 대사 치는 모습에 그가 끼어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거기서 그렇게 김 빠지는 대사를 하면 어떡해? 그때는 흑화되기 전이라고.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그런 젊은이라 이 말이야. 돌아가신 엄마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젊은이가 그렇게 힘 빠지게 대사를 치면 되겠어?”
“네, 선배님.”
“그럼 그걸 생각하고 다시 해 봐.”
목을 가다듬고 다시 대사를 외우는 그를 지켜보며 도은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바로 그거야.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걸.”
“감사합니다, 선배님.”
주인공 이찬수를 키워 줬지만 재개발 문제로 결국 죽음에 이르는 삼촌 역에 경우와 인연이 깊은 배우 도은철이 우정 출연을 해 주기로 했다.
대본 리딩 때부터 바짝 붙어 신인 배우를 챙겨 주는 도은철의 모습에 경우는 미소 지었다. 오디션에 당당히 합격했지만 아직은 자신감이 부족한 한대건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으니 역할 안에서나 밖에서나 삼촌을 자처하는 그의 모습에 경우는 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10분 뒤에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연출부 막내의 외침에 두 배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촬영 준비가 모두 끝이 났다.
잡음이 끊이지 않던 <태양의 제국>이 드디어 첫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