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93화 (193/250)

#193. 유주얼 서스펙트 (3)

봐야 할 서류가 밀린 탓에 점심도 거른 채 서류를 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강희주는 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할머니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괜히 남자가 먼저 결혼하자는 말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남자도 결혼하지는 말 쉽게 안 떨어지는 법이야.’

결혼…… 결혼이라…….

딱히 결혼이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부모의 탓이 아니라곤 할 수 없었던 게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두 사람이 불행했음을 보고 자라 온 그녀였던 터라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경우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화가 치솟았다. 결혼을 하든 말든 어쨌든 경우의 마음을 아는 게 먼저란 생각이 들었다.

“검사님,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점심 식사를 하러 갔던 실무관이 돌아온 줄도 모른 채 생각에 빠져 있던 강희주는 깜짝 놀랐다.

“벌써 식사 하셨어요?”

“그럼요. 그나저나 밥심으로 사시는 분이 점심까지 굶어서 어떡해요?”

“이런 날도 있는 거죠. 어쨌든 고마워요. 잘 먹을 게요.”

실무관이 가져다 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던 강희주는 잠시 실무관을 보다 용기 내 입을 열었다.

“저기, 실무관님…… 작년에 결혼하셨다고 하셨죠?”

“네. 근데 갑자기 그건 왜?”

“그럼 두 분 중에 결혼하자는 말을 누가 먼저 꺼낸 거예요?”

“그거야 당연히…… 혹시, 검사님 결혼하세요? 축하드려요.”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결혼이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예?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런 거.”

“근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데요……?”

“아니……, 제 얘기가 아니라 제 친구가 남자 친구랑 사귄 지 오래되긴 했는데 아직 결혼 이야기가 없다고 해서, 갑자기 그게 궁금해져서요.”

“몇 년 사귀었는데요?”

“알고 지낸 건 더 오래됐지만 사귄 지는 몇 년 안 됐다고는 하는데…….”

“에이, 그럼 남자 쪽에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죠.”

“네?”

“그렇잖아요. 형편이 안 돼서 결혼 못 한다는 거 다 핑계예요. 좋으면 결국 어떻게든 결혼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말도 안 꺼낸다는 건 이미 마음에도 없다는 소리 아니예요? 친구분한텐 미안하지만 빨리 정리하라고 하세요. 검사님 친구분이면 나이도 적지 않을 텐데 솔직히 그 남자 친구가 나빴네. 결혼 생각 없으면 진작 보내 줄 것이지, 쯧쯧쯧.”

실무관의 말에 현실을 깨달은 강희주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 * *

“하나만 물어봅시다. 도대체 그 소설을 왜 드라마로 만들고 싶은 거요?”

강상용 변호사의 질문에 경우가 입을 열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이야기니까요. 드라마 만드는 사람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거 말고 다른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재미있는 드라마라…… 좋은 얘기군. 한데 그 이야기가 희주를 불행하게 해도 만들 겁니까?”

“진용 실업과 재경 그룹 사이에 있었던 일은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한 소설―.”

“단순한 소설이라…… 그쪽 눈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당신한텐 오래 전 있었던 지나간 과거일지 모르지만 난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오. 그런 일을 떠올리는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당신이 참 이해가 안 돼. 그것도 희주 남자 친구라는 사람이…….”

“다를 겁니다. 소설과는 같지 않을 겁니다. 제가 손대는 이상 이 이야기는 이제부터 제 이야기가 될 테니까요.”

“말은 참 쉽게 하는 군.”

“자신이 있으니까요.”

“좋아요. 소송 취하하리다. 보아하니 고집이 있어 보이는구먼. 내가 뭐라고 해도 마음먹은 이상, 결심은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니까. 내가 이래 봬도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

“결단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쎄, 감사할 일이 아닐 거요. 지금이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요. 그쪽이 무슨 선택을 했는지 말이요.”

개운하지 않은 마음으로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 나오던 경우가 문득 멈춰서 돌아봤다.

“희주 씨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래도 조카잖습니까?”

“계속 봐 왔다면 모를까 이젠 딱히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리고, 괜히 그 아이를 만나면 먼저 떠난 내 동생이 생각날 텐데 만나서 뭣하겠소. 어차피 그 아이한테 애틋한 정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그의 말에 경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강상용은 소파 옆에 둔 협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엔 사진이 들어 있었으니 동생과 찍은 사진을 보던 그는 회한에 잠긴 채로 중얼거렸다.

“무소식이 희소식인 게지.”

* * *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소설 <태양의 제국> 표절 관련 소송이 취하되자 가장 안도하는 건 스튜디오 글로리 식구들이었다. 표절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위험 요소였던 것 만은 분명했다. 그 증거로 요동치던 주가가 안정세를 회복했으니 이제 드라마 제작에 올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미 8부 대본까지 나온 상태였기에 캐릭터에 가장 어울리는 배우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주인공 이찬수는 아무래도 기존 드라마 속 캐릭터와는 조금 달랐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이미지의 배우를 찾고 싶었던 경우는 비록 주인공이지만 캐스팅이 아닌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했다.

소식을 듣고 수많은 배우들이 참여했으니 아침부터 오디션 장의 열기는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본을 쓰느라 늦은 경우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했다. 그렇게 크게 열지 않은 오디션이었건만 어떻게 알았는지 후일담을 건지고 싶었던 기자 몇이 오디션장에 나타나 인터뷰를 요청했다.

“작가님이 소송을 건 로펌을 찾아가 소송을 취하하도록 했다는 데 사실입니까?”

“소송 취하 건으로 거래가 오고 갔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작가님, 잠시만 인터뷰해 주시죠?”

이제 겨우 표절 건에서 벗어났다. 말이 많아지면 뉘앙스에 따라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 더는 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경우는 취재를 거절했다. 달라붙는 기자들을 떼어 놓기 위해 오디션을 준비하던 스탭들이 나와 경우를 애워쌌다.

“죄송합니다. 사전에 공지되지 않은 인터뷰는 할 수 없습니다.”

오디션이 열리는 건물 안으로 막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드라마의 화제성을 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꾸며 낸 자작극이라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기자의 질문에 경우가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자작극?’

기자가 생각없이 뱉은 자작극이라는 말이 괜히 귓가에 맴돌았다.

* * *

모처럼 스케줄이 없는 날, 손주옥은 정원에 나와 기울어져 가는 노을을 보고 있었다.

요즘 부쩍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 그녀는 이렇게 하루쯤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려니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큰사모님, 차 드세요.”

“안 그래도 차를 마셨으면 했는데 잘됐네.”

윤혜승이 잘 우러난 녹차를 따라 손주옥 앞에 내밀었다. 맛과 향을 음미하는 손주옥의 모습은 평안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잠시 망설이던 윤혜승은 결국 입을 열었다.

“저, 큰사모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그때 손주옥 앞으로 내미는 하얀 봉투 하나.

“윤 비서?”

“죄송합니다, 큰사모님. 앞으로 큰사모님을 모실 수 없을 것 같아요.”

“이렇게 갑자기? 혹시 내가 윤 비서한테 뭐 서운하게 한 거라도 있어?”

“아니에요, 큰사모님.”

“아니긴. 일언반구도 없이 이럴 리가 없잖아.”

“제가 예전에 드린 말씀 있죠, 제 꿈 이야기요.”

“그래, 어릴 때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가정 형편상 못 했다고 했잖아.”

“포기하고 산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더 늦기 전에 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 거라면 내가 말릴 수 없지. 근데 뭐가 하고 싶었던 건지는 끝까지 말 안 해 줄 거야?”

“나중에……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직은 제가 좀 부끄러워서요.”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니까 내가 다 서운하네.”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어. 만남이 있는 거면 헤어짐도 있는 거지. 그래서 언제까지 출근할 건데?”

“오늘이요.”

“오늘? 이렇게 갑자기? 송별회 할 시간도 안 주겠다는 거야?”

“비서실 이 비서한테 인수인계는 모두 해 두었습니다.”

“진짜 이렇게 그냥 갈 모양이네, 그래도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이 있는데 서운하게.”

“죄송해요, 큰사모님.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도 발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아서…….”

“그래, 내 마음도 이렇게 편치 않은데 윤 비서 마음은 오죽 하겠어. 알았어. 괜히 질척대면서 붙잡지 않을 게. 윤 비서, 그동안 수고 많았어. 내가 섭섭하지 않게 윤 비서 퇴직금은 따로 더 챙겨 줄게.”

“아니에요, 큰사모님. 그러지 않으셔도 되요.”

“그것마저 안 하면 내가 정말 서운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가더라도 아예 연락 끊지는 마. 어디서 뭘 하는지, 잘 지내는지 안부 전해 주고.”

“그럴게요, 큰사모님.”

“그래.”

윤혜승은 그렇게 6년간의 시간을 정리하고 손주옥의 집에서 나왔다.

막 집을 나서자 대문 앞에서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민 작가님?”

“지금 퇴근하시는 길인가 봅니다.”

“네, 희주 아가씨는 아직 퇴근 전이신데…… 혹시 큰사모님 만나러 오셨어요?”

“아니요, 윤 작가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

“네. 어디 가서 차나 한잔 하시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경우 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바로 그 시각, 머릿속이 복잡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강희주는 집에서 서류를 봐야겠단 생각에 한가득 챙겨 집으로 오던 중이었으니.

“경우 씨? 근데 왜 윤 비서 언니랑……?”

하필이면 경우의 차에 올라타는 윤혜승을 본 강희주는 안 되겠다 싶은 마음에 핸들을 꺾어 두 사람의 뒤를 몰래 따르기 시작했다.

* * *

“민 작가님?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면 하세요.”

“혹시 일부러였습니까?”

“뭘 말이에요?”

“다른 곳도 아니고 재경 그룹, 그것도 희주 씨 바로 옆에 있었던 거요.”

경우의 말에 윤혜승이 피식 웃었다. 순간 그녀의 분위기가 달려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맞아요. 일부러 재경 그룹 비서실에 지원했어요. 그래야 강희주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 뭐 운이 좋게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죠.”

“왜죠?”

“글쎄요. 처음엔 죄책감이었다고 해 두죠. 어쨌든 아버지 부주의로 동승자가 죽었다고 하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운전기사로서 자부심이 있었던 아버지가 운전 미숙이라니. 그러다 알게 됐죠. 진짜 운전자는 따로 있었다는 거. 그래서 긍금했어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사망 사고의 운전자를 바꿔치기 할 수 있는 건가?”

“…….”

“참 대단하신 양반들이라더라고요. 돈 때문에 사위도 내칠 수 있다는 거 처음 알았어요.”

“책은 일부러 쓴 겁니까? 책을 본 사람들이 진용 실업에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도록 말이죠.”

“생각했던 것만큼의 효과는 없더라고요. 다들 남의 일이었던 거죠. 그치만 상관 없었어요. 한 사람만 알면 되니까.”

“희주 씨…….”

“맞아요. 나는 하루하루 고통 속에서 사는데 이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더라고요. 다들 쉬쉬하는데 혼자만 모르고 있는 건 좀 아니지 않아요? 알아야 할 건 알아야죠.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솔직히 작가님은 의외였어요. 덕분에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고 내가 다 고마워요.”

자신이 드라마화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쥐뿔도 모르면서 뛰어들어 판까지 키웠으니 강 변호사가 했던 경고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그런 목적이라면 드라마 제작, 다시 생각해 봐야겠군요.”

“좋으실 대로. 어차피 저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 없거든요.”

자신이 아닌 살짝 옆을 보는 그녀의 시선에 이상함을 느낀 경우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엔 하필 강희주가 서 있었으니.

“이,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대답을 요구하는 강희주의 얼굴에 경우는 그만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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