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유주얼 서스펙트 (2)
주말, 평소와 달리 일찍 퇴근한 강희주는 손주옥과 함께 저녁을 먹은 후 TV를 보며 모처럼 여유를 즐겼다. 눈은 TV화면을 향해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식피식 웃는 손녀의 모습에 손주옥의 눈이 가늘어졌다.
“허파에 바람 든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웃어?”
“큼큼, 웃긴 내가 언제 웃었다고 그래, 할머닌.”
“차리리 귀신을 속이지. 민 작가가 그렇게 좋으면 결혼을 하라니까 그러네.”
“결혼 같은 거 안 한다니까. 나 결혼하면 할머니는 어쩌고?”
‘요것 봐라.’
입으로는 안 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눈치를 보는 손녀의 낌새가 아무래도 전과는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 손주옥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는 결혼 소리만 나와도 펄쩍 뛰더니 이제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반응부터 달랐다. 이렇게 된 거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완전히 마음을 바꿀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손녀가 혼자 남을 할미가 걱정이 돼서 결혼도 안 하고 있었던 거야?”
“누가 그렇대? 결혼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생각은 해 볼 수 있는 거잖아. 경우 씨가 우리 집으로 들어와 살면 좋긴 하겠지만 경우 씨 집에서 허락하겠어?”
“얼씨구, 벌써 그것까지도 생각했어?”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이 사람아, 나도 신혼부부랑 같이 살고 싶은 생각 없어. 특히 민 작가 그 성격에 내 눈치 보고 있으면 네가 날 얼마나 잡을 거야?”
“할머니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할머니를 잡다니.”
“괜히 내 핑계 대지 말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민 작가 잡아. 보면 민 작가 만한 사람도 없어. 능력도 있고 심성도 착하고 어른 공경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 네가 좋아하고.”
손주옥의 마지막 말에 강희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퇴근해서 이 할미랑 놀아 주고 있다만 다른 땐 어디 그래? 이건 뭐 손녀라도 밥 한 끼 먹으려면 일주일 전부터 약속을 잡아야 하니……. 내 걱정이 되는 거면 쓸데없는 생각 말고 결혼해서 애를 낳아. 애라도 낳아 주면 애를 보는 재미라도 있을 거 아냐!”
“할머니!”
“튕기는 것도 적당히 하고 괜히 남자가 먼저 결혼하자고 말 꺼낼 때까지 기다리지도 말고. 용기 있는 여자가 미남을 쟁취한다는 말 몰라? 남자도 결혼하자는 말 쉽게 안 떨어지는 법이야.”
“결혼 안 한다니까 그러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리고 민 작가는 언제까지고 저러고 있을 것 같은데? 듣자 하니 윤 이사장 쪽으로 선도 계속 들어온다고 하더만.”
“지금도 선이 들어온다고?”
“나한텐 누가 손녀 딸 결혼 아직 안 하지 않았냐고 묻지도 않더라. 하긴 여자 나이 서른 넘었으면 말 다 했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당연히 내 눈에야 내 손년데 좋게 보이지. 근데 다른 사람들은 아니라 이거야.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수평대 위에 올려놓고 보면 네가 민 작가한테 기울어. 솔직히 좀 잘났어? 내가 보기에도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 눈엔 오죽할까? 이러고 있다가 괜히 딴 여자들한테 뺏기고 울기 전에 결단을 내리란 말이야.”
“…….”
“아휴, 모르겠다, 난. 피곤해서 자야지 안 되겠어.”
오랜만에 손녀와 수다를 떠느라 취침 시간이 지난 손주옥은 하품을 하며 결국 방으로 들어갔다.
홀로 거실에 남은 강희주는 생각이 많아졌다. 안 그래도 지난번 시상식 자리에서 경우에게 추파를 던지던 여자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대로 경우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었다.
괜히 심란해 진 마음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그녀는 책상 위, 윤 비서 가져다 놓은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바로 <태양의 제국>.
얼마 전 부모님 일에 대해 묻는 것 하며 요즘 어딘가 경우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부터 논란에 휩싸여 있으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는 윤 비서 말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책을 읽을 생각이었다.
침대에 깊숙이 앉은 그녀는 드디어 첫 장을 넘겼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분위기에 강희주는 금방 소설에 몰입하고 말았다.
* * *
진용 실업.
현재 재경 인터내셔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회사는 무역업을 기반으로 강희주 친가에서 운영하는 건실한 중소기업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IMF의 바람에서 비껴갈 수 없었다.
“그때 어음만 막을 수 있었으면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겨우 몇십억을 막지 못해 수백억을 벌어들이는 회사가 무너졌어.”
“그 일에 희주 씨 외할아버지가 관련되었다는 말씀이세요?”
“진용 실업 강 사장님이 은행장한테 어음 만기일을 미뤄 달라 부탁했거든. 아마 연기해 줬다면 진용 실업은 위기를 넘기고 대기업의 반열에 올랐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되지도 않는 일 지금 떠들어 봐야 아무 소용없는 일이지만.”
“그럼 희주 씨 부모님은…….”
“그때 이혼했어. 은행장을 설득해 어음 만기일을 바꾸지 못하도록 한 사람이 희주 외할아버지였거든. 도와 달라는 사돈의 부탁을 거절하고 부도난 회사를 헐값에 사들였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 친정 아버지 때문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회사가 그 지경이 됐는데 희주 엄마도 볼 낯이 없었겠지.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사업에 관심이 없어 일찌감치 사시를 패스하고 변호사의 길을 걷는 큰아들을 대신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었으니 그가 희주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세워 일으킨 회사를 장인에게 헐값에 넘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희주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때 차에 함께 타고 있었던 사람이 운전기사 윤태화였다. 사고 난 직후 병원으로 옮겼지만 생각보다 사고가 크게 나는 바람에 두 사람 다 얼마 가지 못하고 사망했다.
당연히 운전기사인 윤태화가 운전을 했을 거라 결론 내렸다. 하지만 교통사고의 원인은 운전 미숙. 10년 넘게 진용 실업의 운전기사 노릇을 했던 윤태화가 운전 미숙이라는 건 어쩐지 말이 되지 않았다. 거기다 운전자가 윤태화가 아니었다는 목격자 진술도 나왔지만 결국 그 증언은 묻히고 말았다.
재경 그룹에서 입막음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필 사고가 난 장소도 재경 그룹에서 멀지 않은 곳인 까닭에 말을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진용 실업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는데 이 일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았을 터. 결국 진실은 그렇게 덮어지고 말았다. 당시 운전자 윤 모 씨의 운전 미숙으로 교통사고가 났다는 짧은 신문 기사가 그 방증이었다.
“20년 전에도 재경 그룹은 큰 회사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어. 그런 회사가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거대 기업이 되었지. 단순히 일을 열심히 잘 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그럼 그런 방식으로 여러 회사를 집어삼킨 덕분이라는 건가요?”
윤정숙은 침묵을 택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잠시 생각하던 경우가 이내 물었다.
“우리 새명은요? 혹시 우리 새명도……?”
“지금 재벌 기업들 중에 그런 식으로 성장하지 않은 회사가 어디 있겠어. 왜? 실망했니?”
실망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시각을 달리하면 드라마판도 다르지 않았다.
현직 작가에게서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라면서 보조 작가들에게 최저 임금보다 못한 시급을 주며 하루 12시간 이상을 부려 먹었다. 괜찮은 아이디어를 빼앗고 심지어 대신 글을 쓰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글을 쓰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작가들에겐 모든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죠. 방송국도 만만치 않아요.”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어머니는 겁나지 않으세요?”
“뭐가?”
“그런 사정을 다 아시면서도 저를 희주 씨 집에 들여보내려 하셨잖아요. 희주 씨 아버지가 당했듯이 우리도 그런 식으로 당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자식들보다 더 소중한 새명 그룹을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 보셨어요?”
“글쎄, 우리 새명은 진용하고는 다르잖니.”
하긴, 최근 새명의 성장세를 보면 어머니의 자신감이 이해 못 할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 이어지는 윤정숙의 말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으니.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렴.”
경우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어머니의 야심을 훔쳐본 것 같아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 * *
이런 저런 생각들로 복잡해 진 탓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차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김종수가 들어왔다.
“작가님, 혹시 바쁘십니까?”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안 PD하고 이야기 해서 <태양의 제국> 내년 1분기로 편성을 옮겼습니다.”
“아…… 네.”
예상과는 다른 경우의 반응에 김종수는 의아했다.
“작가님 혹시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렇다기 보다…….”
잠시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던 경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태양의 제국> 드라마화를 전면 재검토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 그 말씀은 혹시 표절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표절 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경우의 말에 김종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저희야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편성이 되었다가 엎어지는 일도 다반산데요. 다만.”
“……?”
“사람들은 아무래도 드라마 제작이 중단된다면 표절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을까요? 켕기는 게 있으니 드라마를 제작하지 않는 거라 여기기 쉬울 겁니다. 소송 건까지 맡은 입장에서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죠. 소송이 계속 진행되면 분명 저쪽에선 그걸 물고 늘어질 거고요. 차라리 처음부터 이 일을 완전히 털고 가겠다고 미뤘다면 모를까―.”
“확실히 이제 와서 말을 바꾼다는 건 우리보단 윤 작가 쪽 모양새가 안 좋을 수 있다, 이거죠?”
“네. 근데 그런 말씀을 괜히 하시는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처음엔 두 사람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에 드라마 제작이 꺼려지긴 했다.
다음으론 듣기 전엔 몰랐지만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소설 속 주인공이 이복 형제들에게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진용 실업을 떠올릴 만한 이야기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희주의 남자 친구인 자신이 이런 이야기를 써도 될까 싶었으니까.
하지만 20년 가까이 된 일이 드라마로 나온다고 해서 굳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진작 <태양의 제국>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논란이 되었을 테니까.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이었다. 어디선가 있을 법한 일을 실감나게 표현한 소설.
자신이 너무 과민 반응을 보였다는 생각에 경우는 처음 계획한 대로 가기로 결심을 굳혔다. 애초 교통사고에 대해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강희주나 윤혜승 사이에 얽힌 비극을 알지 못했을 테니까.
“아닙니다. 일정대로 진행하죠. 안 PD님하고 상의해서 오디션 날짜부터 잡아야겠어요.”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냥……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 경우는 그 사람부터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처음 뵙겠습니다. 스튜디오 글로리의 민경우 작가라고 합니다. 희주 씨 남자 친구이기도 하고요.”
“만나서 반가워요. 강상용 변호사라고 합니다. 뭐 다 알고 온 것 같으니 다른 말은 생략하죠. 그래, 희주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어릴 때 보곤 통 못 봐서.”
“잘 지냅니다. 이제 보니 희주 씨가 큰아버지를 닮았나 보네요. 같은 법조인의 길을 걷는 걸 보면 말입니다.”
“제 아버지를 닮은 거겠죠. 어떻게 하는 게 외가에서 살아남는 건지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겁니다. 물론 내 동생은 끝이 좋지 못했지만. 여기까지 인사치레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용건이 뭡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송 취하해 주시죠.”
경우의 말에 강상용이 살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