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91화 (191/250)
  • #191. 유주얼 서스펙트 (1)

    드라마 작가들이 드라마를 쓸 때 가장 유념하는 게 뭘까?

    전하고 싶은 메시지? 철학?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미안하지만 시청률이다.

    상업을 기반으로 하는 드라마에서 중요한 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시청률이었다.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시청자들이 보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다. 연극에 있어서 배우와 희곡 못지않게 중요한 게 관객이듯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었다. 그러니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고 갈등을 키우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10년 가까이 살을 비비고 산 전 부인이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나타나도 다른 사람이라고 납득하는 스토리가 가능한 것도 그 이유였다. 개연성이 엉망이어도 재미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작가들은 시청률을 위해 오로지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출생의 비밀, 불치병, 기억 상실 같은 뻔한 소재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만큼 갈등을 최고조로 높일 수 있는 소재였기에 재미를 보장해 준다고 여긴 탓이었다. 더는 쓸 이야기가 없어서 뻔한 이야기를 재탕을 하는 그런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집으로 돌아온 경우는 메일을 보고 있었다.

    20년 전, 윤태화가 죽게 된 사고 기록이 상세히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며 작가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전개에 결국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사고 자체는 단순했지만 사고와 얽힌 사람들의 관계는 그렇지 않았다. 웬만한 드라마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드라마에서 이런 소재라면 욕먹기 십상이었다. 개연성은 어디다 밥 말아 먹었냐면서. 하지만 이건 드라마가 아니었으니 윤혜승의 아버지 윤태화가 죽게 된 그 교통사고에 사망자가 한 사람 더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경우는 집으로 돌아오기 전 강희주와 잠시 산책을 하며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실례되는 질문 해도 돼요?’

    ‘뭔데요?’

    ‘희주 씨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한 번도 부모님 이야기를 안 해서 좀 궁금했어요.’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예요. 기억이 거의 없어서…….’

    ‘어머님이 돌아가신 건 알고 있는데…….’

    ‘편찮으셨던 모양이에요. 기억을 떠올리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모습만 생각나요. 아빠는 저 어렸을 때 엄마랑 이혼하시고 외국으로 가셨는데 저도 잘 몰라요. 연락을 하지 않을 만큼 내가 보고 싶지 않은가 보죠.’

    말을 하면서 씁쓸해하던 강희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괜히 아픈 곳을 건드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 사실이 달랐으니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그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우는 윤태화 교통사고 기록이 담긴 메일창을 얼른 닫고 서둘러 드라마 시놉시스 파일을 열었다.

    이내 현관문이 열리고 김강철이 들어왔다.

    “집에 있었냐?”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네가 성격이 좀 급해? 일 시켰으니까 궁금해할 것 같아서 그랬지. 근데 밥은 없냐?”

    빈 밥통을 뒤지던 김강철의 얼굴에 실망이 가득했다.

    “내가 집에서 밥해 먹는 거 봤냐?”

    “혹시나 했다.”

    “여지껏 밥도 안 먹고 뭐 했어?”

    “내가 저녁 먹을 시간이 어딨냐? 악덕 고용주 덕분에 야근까지 했는데.”

    “시켜 줘? 뭐 먹을래?”

    “됐어. 그걸 또 언제 기다리냐. 라면이나 먹을란다. 그래도 라면은 있겠지?”

    싱크대에서 라면을 꺼낸 김강철이 냄비에 물을 올리더니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우와, 대게.”

    “뭐? 대게가 있어?”

    “너네 집 냉장고면서 뭐가 있는지도 모르냐?”

    “열어 본 적이 없으니까.”

    “본가에서 아주머니가 열심히 가져다 나르면 뭐 해? 정작 본인은 먹지도 않는데. 어쩔 수 없다. 내가 먹어야지. 야, 너도 라면 먹을 거냐?”

    “안 먹어.”

    “진짜지?”

    “안 먹는다니까 그러네.”

    “난 분명히 물어봤다. 나중에 한 젓가락만 달라고 하기만 해 봐.”

    그사이 보글보글 끓은 라면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이미 저녁을 먹은 경우도 라면 냄새에 결국 못 이겨 자석에 이끌리듯 김강철의 앞으로 다가갔다.

    “왜?”

    “한 입만.”

    “안 먹는다며?”

    “야, 내 집에서 라면에 대게까지 넣어 먹으면서 한 젓가락이 그렇게 아깝냐?”

    경우의 말에 눈을 흘긴 김강철이 결국 라면 냄비를 넘기고 말았으니 비극의 시작이었다.

    “야, 이게 어떻게 한 입이야?”

    “확실히 대게를 넣어서 그런지 맛은 좋네. 부족하면 하나 더 끓여 먹던가.”

    “하여간 악덕 고용주!”

    어느새 바닥을 보인 냄비를 젓가락으로 휘젓던 김강철은 결국 냄비를 내려놓고 말았다. 적당히 허기는 가셨으니 여기까지 온 용건부터 해결할 참이었다.

    “네가 알아보라는 거 말인데.”

    “뭐 좀 나왔어?”

    “어, 본명은 기남현, 몇 년 전부터 P사이트에서 빈깡통이란 이름으로 웹툰을 연재하고 있어. 지금까지 4작품 정도 연재했는데 성적은 다 고만고만해. 이렇다 할 두드러진 특징 같은 건 없는데…… 야, 너 내 얘기 듣고 있냐?”

    평소와 달리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김강철이 발끈했다.

    “듣고 있어. 계속해.”

    “너 무슨 일 있어?”

    “있긴 무슨 일이 있다고 그래?”

    “아닌데, 평소랑 영 다른데?”

    “어디가 어떻게 다른데?”

    “어? 그야…….”

    “괜히 할 말 없으니까 저러지. 됐으니까 얼른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경우의 말에 여전히 미심쩍게 그를 보던 김강철은 이내 말을 이었다.

    “얼마 전부터 변호사랑 어울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작품을 위해 자료 조사 차원에서 만난다고 하긴 하는데.”

    “변호사?”

    “각 딱 나오지 않냐? 그 변호사란 사람이 바람을 넣은 거지. 표절이니 어쩌니 하면서. 어쨌든 그런 식으로 논란을 만들면 사람들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거니까.”

    “드라마나 웹툰이나 다들 사람들 관심에 좌우되는 바닥이다 보니 그렇다 치고. 그 변호사라는 사람은 갑자기 왜 끼어든 건데?”

    “나도 그게 이상해서 조사를 해 봤거든. 근데 애초 이쪽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더라고. 거기다 그 변호사 기업 소송 전문이더라고.”

    “기업 소송? 근데 이쪽에 왜 끼어든 건데?”

    “내 말이. 그래서 내가 뭘 알아냈는지 알아?”

    사악하게 미소 짓는 김강철의 모습에 경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무리 내가 시킨 일이라지만, 너 괜찮은 거지? 혹시 나중에 문제 생기거나―.”

    “이게 사람을 뭘로 보고. 내가 그렇게 허술한 위인으로 보여?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처가에서 반대하는데 결혼까지 하려면 너도 참 앞날이 험난하겠다. 그나저나 너 정도면 괜찮지 않나? 아니다, 과거 있는 남자였지, 참.”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을 해야 알지. 결혼은 뭐고 반대는 또 뭔데?”

    “물론 강 검사 외가에선 널 환영하겠지. 근데 친가에선 아닌 것 같더라, 이말이야. 그러니까 이런 일 벌이는 거 아니겠냐?”

    “……?”

    “아직도 모르겠어? 그 변호사가 소속된 로펌 대표가 강 검사 큰아버지라고.”

    “뭐?”

    “놀라도 단단히 놀랐구먼. 괜히 표절이네 뭐네 하면서 네 일 방해하는 게 뭐겠어? 네가 자기 조카 만나니까 마음에 안 들었던 거잖아. 어쨌든 재경 그룹이 뒤에 있으니 대놓고 반대는 못 하겠고 일이나 훼방 놓자, 뭐 그거 아니겠냐고? 지금이야 남들 보기에 건실한 청년이지만 네 과거가 좀 화려했냐? 재벌집 아들이라도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지. 그렇다고 대놓고 반대할 수도 없고 이런 식으로 꼬투리라도 잡고 싶었던 거 아니겠냐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번 일에 강희주의 큰아버지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에 잠시 혼란스러웠던 경우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넌 드라마 작가 안 하길 정말 다행인 것 같다. 그렇게 빈약한 상상력으로 뭘 하겠냐?”

    “빈약하다니?”

    “거기서 그렇게까지 해서 얻는 게 뭔데? 아버지도 아니고 큰아버지가 조카 남자 친구한테 신경쓸 만큼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냐?”

    “그런가? 그럼 뭣 때문에?”

    “뭐긴 뭐야, 우연이지 우연. 누가 바람을 넣어서 그렇다기 보다 그냥 그 작가가 표절 제기를 한 거고 어쩌다 알게 된 변호사한테 부탁한 거지.”

    “그게 그런가……?”

    경우의 말에 머리를 긁적이던 김강철이 실망한 듯 입을 열었다.

    “에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나 놀릴 꼬투리 잡았다고 생각했겠지. 근데 미안해서 어쩌냐?”

    “뭐야? 나 완전 헛일한 거네.”

    축 처진 김강철의 어깨를 경우가 다독였다.

    “이런 날이 있으면 저런 날도 있는 거지.”

    “뭐래? 됐으니까 난 그만 가련다. 급 피곤이 몰려오네.”

    경우가 둘러대는 소리에 넘어간 김강철은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던 경우가 이내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야, 그냥 가면 어떡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니 그가 가고 난 집안을 둘러본 경우가 투덜댔다.

    “먹었으면 치우고 가야 할 거 아냐? 누구 보고 치우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가 하는 수 없이 싱크대 앞에 섰다. 친구가 먹은 그릇까지 말끔히 치운 그가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이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노트북을 집어 들고 김강철이 오기 전 봤던 메일을 상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가 알지 못하는 사건의 다른 내막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경우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 * *

    “갑자기 네가 웬일이니? 같이 점심을 다 먹자고 하고?”

    갑작스러운 아들의 연락에 윤정숙은 겉으론 투덜대면서도 내심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어머니와 밥 한 끼 먹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다.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지.”

    “어머니를 싫어하지 않아요. 그냥 좀…… 안 맞는 것뿐이죠.”

    경우의 말에 윤정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구나. 참, 소식은 들었다. 손 여사님 초대를 받았다지. 여사님이 아주 흡족해하시더구나.”

    안 그래도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경우는 어머니가 대화의 물꼬를 터 준 덕분에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 자주 하시나 봐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여사님과는 종종 식사도 하는 편이야. 그래, 여사님이 잘해 주시고?”

    “네. 할머니가 다음에 또 놀러 오라고 하셨어요.”

    경우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할머니라는 말에 윤정숙은 흡족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이가 가까운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머니,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그러니?”

    “희주 씨 아버님은 어떤 분이세요?”

    경우의 질문에 윤정숙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었다.

    “갑자기 그건 왜?”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거예요? 희주 씨 어머니는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아버지에 대해서는 희주 씨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할머니와 살고 있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날이 섰던 윤정숙은 경우의 말에 표정을 풀었다.

    하긴 여자 친구의 집안 내력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혹시 여사님께 묻거나 한 건 아니겠지?”

    “네.”

    “그럼 앞으로도 묻지 말거라.”

    “왜요?”

    “두 집안 사이가 별로 좋지 못해. 결국 희주 부모님이 이혼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 그리고 희주한테는 숨긴 것 같은데 희주 아버지, 실은 돌아가셨어.”

    “네? 그런데 그걸 왜 희주 씨한테 숨겨요?”

    “희주 아버지가 죽게 된 게 희주 외할아버지 때문이었거든. 아버지가 외할아버지 때문에 죽었다면 희주가 충격받지 않겠니? 너도 몰랐으면 했는데 너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그쪽 집에 가서 행여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거다. 알겠니?”

    “그럼 어머니가 대신 말씀해 주세요. 말씀해 주시면 저도 입 다물고 있을게요.”

    말해 주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가서 손 여사에게 직접 묻겠다는 소리로 들려 윤정숙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좋아. 얘기해 줄게. 대신―.”

    “알았어요.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어디 가서도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약속까지 단단히 받은 뒤에야 윤정숙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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