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끝내거나 혹은 시작하거나 (5)
“이게 도대체 다 뭔데?”
다짜고짜 전화해서 메일을 확인해 보라는 김강철의 전화에 경우는 드라마를 쓰던 것도 멈추고 메일부터 확인했다.
온통 처음 보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하나같이 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에서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 어느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까지 찍혀 있었다. 그 사진들을 보던 경우는 그제야 김강철이 보낸 사진이 뭔지 감이 왔다.
사진을 다 봤을 무렵 김강철로부터 다시 전화가 왔다.
“이 사람들이 요즘 형들이 만난 사람들이라 이거지?”
[그래, 다 포섭이 된 건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너네 형들이 자기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니겠어?]
“참, 열심히들 산다.”
[아무렴 너만큼이야 할까?]
“그런가?”
[이제 어쩔 셈이야?]
“뭘 물어, 뻔한 거 아니겠어?”
[어떻게, 바로 작업 들어갈까?]
“그럼 수고 좀 해 줘.”
[오케이.]
“참, 강철아!”
[왜?]
“한 사람 더 알아봐 줘야 할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누구?]
“이번 표절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알았다. 다른 것보다 그게 급한 거 맞지? 출신부터 친인척에 친구들까지 싹 다 털어 보지 뭐.]
“살살해.”
[누가 들으면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인 줄 알겠다.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다 악덕 고용주―.]
별일 아니라는 듯 경우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경우는 다시 전화를 들었다. 이번엔 지난번 김강철이 소개해 줬던 입 무거운 녀석이었으니.
강철이에겐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난데, 오래전 교통사고에 대해서도 알아봐 줄 수 있어? ……그래, 한 20년 전쯤 일어난 교통사고야. 윤태화라고 재벌가 운전기사였다는데, 당시 일어났던 사고로 사망했다고 하거든? 사고가 어떻게 났고 어떤 식으로 처리된 건지 알아봐 줘, 부탁해.”
경우는 다른 것보다 김기영의 말이 신경 쓰였다.
별일 아닌 일에 이렇게까지 판을 벌이는 걸 보면 그의 말처럼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드라마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가장 걸리는 부분은 역시 윤혜승의 아버지인 윤태화의 죽음. 경우는 거기서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 * *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을 살펴보던 기남현은 기가 막혔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태화를 욕하는 댓글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공식 입장을 내놓은 뒤 사람들의 태도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러게, <태양의 제국> 나온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표절이라고 그러는 거냐?
└작가 말로는 소설은 몰랐는데, 드라마 나온다고 하도 떠들어 대니까 알았다잖아.
└대변인인 줄.
―다른 건 모르겠고 솔직히 돈 때문 아니겠어? 아무리 베스트셀러라고 해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잖아. 근데 드라마는 다르지.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잖아. 거기에 숟가락 얻고 싶지 않았겠냐? 덕분에 요즘 그 깡통인지 뭔지 웹툰 조회수 좀 올랐다며? 그럼 성공했네.
―결국 그거였네. 작가가 실력으로 승부를 볼 생각은 안 하고 논란을 키울 생각만 하다니, 쯧쯧쯧.
└실력이 안 되니까 그런 거 아니겠음?
―다른 건 모르겠고 작화는 중간 정도는 되는 것 같은데 스토리는 드럽게 재미없더라. 왜 안 팔리는지 알 것 같아. <태양의 제국> 3회독 한 사람의 입장으로 비교가 안 됨. 솔직히 부끄럽지도 않냐?
“웃기는 짬뽕들이야. 결국엔 힘 있는 쪽이 무섭다, 이거지? 개떼처럼 달려들 때는 언제고 법적 대응 어쩌고 하니까 무서워서 꽁지 빼기는.”
그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는 윤태화가 자신의 웹툰을 표절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사람도 분명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기남현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만납시다. 만나서 얘기합시다.”
그렇게 약속을 잡은 기남현이 곧장 집 밖으로 나갔다.
* * *
초조한 마음에 커피를 홀짝이고 있던 그때 양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기남현을 발견하고는 곧장 그의 앞으로 와 앉았다.
“이렇게 자꾸 연락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나는 그쪽이 하는 말만 믿고 시키는 대로 했는데 이게 뭐냔 말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돈에 눈이 뒤집힌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다고요!”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뭐요? 이거 봐요, 황 변호사!”
“당신도 처음엔 아니라고 생각했잖아. 근데 논란이 생기면 당연히 사람들의 주목도 따라올 거라고 하니까 이참에 조회수 올려 보려고 내가 했던 제안 받아들인 거 아니었어?”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돌변하는 황 변호사의 태도에 기남현은 흠칫 놀랐다.
그러니까 이번 일의 시작은 이 남자였다. 그가 소속된 출판사를 통해 팬이라며 소개받은 남자의 직업이 마침 변호사라는 사실에 새 작품을 구상하고 있던 기남현은 자료 수집 겸해서 그를 자주 만나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황 변호사는 대뜸 이런 이야기를 했다.
‘<태양의 제국>이라는 소설을 아십니까?’
‘네, 요즘 한참 언론에서 거론되는 소설이더군요. 드라마화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시구요?’
‘제가 소설까지 읽을 시간이 없어서…….’
‘저……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실은 그 소설이 선생님의 작품과 유사한 점이 아주 많습니다.’
‘네? 그게 무슨?’
‘제가 봤을 땐 선생님 웹툰을 도용을 한 게 아닌가 싶은데…… 솔직히 창작자로서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선생님만 괜찮다면 제가 표절 건으로 소송을 진행해 보는 건 어떨까 싶은데요.’
‘소송이요? 뭘 그렇게까지. 안 그러셔도 됩니다.’
‘비용 때문이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팬으로서 작가님의 권리가 이런 식으로 유린되는 게 안타깝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태양의 제국>보다 작가님 작품이 훨씬 뛰어납니다. 이 기회에 사람들에게 알리자구요. 선생님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말이죠. 모르긴 몰라도 불을 붙이면 사람들도 누가 진짠지 알아볼 겁니다.’
논란도 결국 마케팅이 된다는 생각에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조회수가 오르긴 했지만 그것도 초반에만 한정되었을 뿐, 그가 기대하는 효과는 크지 않았다.
“결국 자기 이익만 생각해서 결정해 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안 되죠. 차라리 처음부터 거절하지 그랬어요. 그럼 일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안 그래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결국 기남현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요. 근데 괜찮겠어요? 논란만 일으킨 작가로 끝날 텐데. 그래도 끝까지 물어뜯는 편이 근성은 있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판단은 선생이 알아서 하시고, 결정 나면 연락 줘요. 난 바빠서 이만.”
그렇게 황 변호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자리에 앉은 채 얼어 버린 기남현까지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황 변호사는 그 길로 회사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보스가 그를 호출하고 있었으니, 잔뜩 긴장한 그는 보스의 방문을 두드렸다.
보스는 논란에도 드라마 제작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스튜디오 글로리의 입장문이 뜬 기사를 보는 중이었다.
“죄송합니다. 순전히 제 판단 미스였습니다.”
“황 변호사 잘못이 뭐 있어. 그 민경우라는 놈이 우리 예상 범위를 넘어선 게 문제지. 표절 논란이 생기면 드라마 제작을 멈출 거라 생각했지, 이대로 밀어붙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잖아.”
“다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아니, 그럴 거 없어. 그러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건 아닌가 싶거든. 당분간은 이대로 지켜보자고.”
나가 보라는 손짓에 결국 황 변호사가 방을 빠져나갔다.
보스는 책상 위 놓인 윤혜승의 사진을 보며 손으로 톡톡 치고 있었다.
“참 인생이라는 게 공교로워. 왜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손주옥의 비서가 되었을까?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말이야.”
윤혜승의 바로 옆 강희주의 사진을 보고 있던 보스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강희주는 경우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주었다.
“나 괜찮아요?”
“아주 멋있어요.”
지난번 Y병원에서 만났을 때 손주옥은 경우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 희주 만난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한 번도 식사 대접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민 작가만 괜찮다면 집으로 초대하고 싶은데. 부담 주려는 건 아니고…….’
‘가겠습니다. 할머니가 부르시는데 당연히 가야죠.’
‘듣기 좋네, 할머니라는 소리.’
강희주에게 팁을 받아 손주옥이 좋아한다는 꽃다발과 함께 제과 명인이 만들었다는 화과자까지 사 들고 강희주와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았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손주옥이 경우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들어와요, 민 작가.”
“실례하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선 경우는 입이 떡 벌어졌으니.
“여느 집하곤 좀 다르려나?”
“그래, 할머니. 난 가끔 여기가 집인지 태릉 선수촌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니까.”
거실에 늘어선 생각보다 많은 운동 기구들이 보통 집 같지는 않았다. 듣자 하니 모두 다 손주옥이 하는 것임을 안 경우는 나이에 비해 팔팔한 손주옥의 모습이 이해된다는 듯 감탄하고 말았다.
“할머니, 참 멋지신데요.”
“그렇지? 그렇게 말해 주니 내가 다 고맙네. 희주 너도 운동 좀 하고 그래.”
“난, 아직 젊거든.”
“그렇게 젊음 과신하다가 한 방에 훅 가, 이것아.”
자신 역시 다르지 않았기에 가슴이 뜨끔한 경우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 집안에 서 있던 윤혜승과 마주쳤으니 경우는 아는 척 대신 살짝 눈인사로 대신했다.
“이쪽은 내 일을 봐주고 있는 윤혜승 비서, 또 이쪽은 우리 집 살림을 봐주는 예산댁.”
“민경우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큰사모님 말씀처럼 잘생겼네요.”
“그렇지. 우리 희주가 눈이 참 높아.”
예산댁의 농담 덕분에 경우는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예산댁이 만들어 준 맛있는 저녁을 먹은 경우는 손주옥의 안내를 받으며 거실로 나왔다.
“어때? 우리 아줌마 음식 솜씨 좋지?”
“네, 근래에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우리 아줌마 좋아하겠네. 참, 요즘 만든다는 드라마 때문에 시끄러운 걸로 아는데 괜찮아?”
“일하다 보면 이런저런 일도 생기는 거죠.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잘 해결될 겁니다.”
“민 작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경우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손주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거실 창 앞으로 자리를 옮긴 경우가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한참 전화를 받던 경우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정말이야?”
[네.]
“알았어. 그만 끊지.”
전화를 막 끊은 뒤 생각이 복잡해진 경우가 돌아봤다. 마침 강희주와 윤혜승이 함께 디저트를 거실 테이블 위에 놓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살짝 미소 짓는 윤혜승에 비해 강희주는 소리 내 웃고 있었다. 마침 경우 쪽으로 시선을 돌린 강희주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미소로 화답한 경우는 함께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때론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았으니 아무래도 <태양의 제국> 드라마화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