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89화 (189/250)
  • #189. 끝내거나 혹은 시작하거나 (4)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절이라니……. 애초 그럴 리도 없거니와 자신을 드러내기 꺼려했던 윤혜승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아까부터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성이던 윤혜승은 출판사로부터 계속 걸려 온 전화를 받지 않고 넘기고 있었다. 어차피 받아 봤자 똑같은 소리만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출판사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는 생각이겠지만 그녀의 마음은 달랐다.

    아무래도 전화를 꺼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하지만 이번엔 출판사가 아니었다. 경우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경웁니다. 우리 만나죠.]

    * * *

    “전 표절 같은 거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만났던 카페에서 다시 만난 윤혜승은 경우를 보자마자 대뜸 그 말부터 꺼냈다. 자기도 모르게 답답했던 마음이 경우를 보자 터져 버린 모양이었다. 말을 뱉고 난 후 그녀는 살짝 후회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설정이 몇 가지 비슷한 점이 있긴 하지만 제가 봤을 땐 별개의 이야기였어요. 거기다 직접 재벌가에서 보고 들었던 걸 참고했을 텐데 표절일 리가 없잖아요.”

    경우의 말에 그녀는 놀라고 말았다..

    “알고…… 있었어요?”

    “몰랐습니다. 그제까지는.”

    잘 피한다고 했는데 역시 병원에서 손주옥과 함께 있는 그녀를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신상이 밝혀지는 걸 극도로 꺼리셨던 거군요?”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제가 재벌가 비서라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은 어떻게든 소설 속 내용을 재경 그룹과 관련지어 생각하지 않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럼 소설은 재경 그룹과는…….”

    “상관 없어요. 제가 그때 말씀드렸죠. 도와주신 분이 계셨다고. 실은 저희 아버지가 오랫동안 재벌가에서 기사 일을 하셨어요.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돌아가시긴 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를 참고 삼아 소설을 썼죠. 물론 제 경험담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재경 그룹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혹시 소설을 쓰게 된 게 아버지 때문이었습니까?”

    작가라 그런 탓일까?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했지만 경우에게는 속수무책이었다. 자신을 속속들이 꿰뚫어 볼 것 같은 경우의 눈빛 탓에 결국 그녀는 두 손을 들었다.

    “아버지는 일하다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잘못으로 난 사고가 아니었어요. 당시엔 제가 너무 어려서 몰랐는데 아버지 친구분이 나중에 사고에 대해 말씀해 주시더군요. 목숨까지 잃었는데 보상금 한 푼도 받을 수 없었어요. 억울하더라고요. 분명 피해자였는데 가해자가 되어 버렸으니…….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한다고 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알았어요.”

    “그래서 소설 속에서나마 엎어 버리고 싶었던 거군요?”

    “네.”

    경우는 그녀의 설명을 듣고서야 소설 속 그녀가 심어 놓았던 설정들이 이해가 되었다.

    소설 <태양의 제국>의 내용은 이랬다.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대재벌 기업인 태양 그룹. 그 태양 그룹의 최정점에 서 있는 이 회장은 아무도 모르게 달에 한 번 찾아가는 칼국수집이 있었다. 아는 사람만 찾는 맛집이었지만 그가 그곳을 찾는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곳에 자신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했지만 맺어질 수 없었던 한 여인, 그녀가 낳은 두 사람의 혈육. 이 회장은 사랑하는 여자가 낳은 아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에게 여자는 죽어 가면서 말했다.

    아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평범한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라고. 그렇게 아들을 두고도 자신이 아버지라 말할 수 없었던 이 회장은 달에 한 번씩 찾아 와 아들을 보는 것으로 그리움을 대신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식들의 견제 속에 그가 쓰러지고 말았다.

    한편 칼국수집에도 문제가 있었으니 전부터 추진된 재개발에 제대로 된 보상안이 마련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주변 상인들과 함께 현실적인 보상안을 마련해 달라 시위를 하던 중 결국 유혈 사태까지 벌어지고 칼국수집을 운영하던 주인공의 삼촌이 결국 다치게 된다.

    재개발로 가게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 탓에 되는 대로 일을 하며 생활비에 보태려 했던 주인공은 막노동을 하다 뒤늦게 삼촌이 시위 도중 다쳤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향하지만 삼촌은 끝내 일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목숨을 잃었는데도 잘못은 시위를 벌인 사람들에게 돌아갔으니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며 손을 터는 건설사에 대한 원망과 삼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이 회장이 쓰러진 틈을 타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큰아들에게 밀려난 이 회장의 최측근인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주인공에게 그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이며 지금 어떤 상태로 누워 있는지 낱낱이 밝힌다.

    평생 비밀에 부쳐졌던 아버지의 존재에 충격을 받은 그는 삼촌을 죽게 만든 건설사가 태양 그룹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신의 이복 형제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비서실장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아버지와 달리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랐던 어머니의 바람을 뒤로 한 채 그는 태양 그룹 속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복수를 펼치는 내용이었다.

    이런 소설 <태양의 제국>에 표절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웹툰 작가인 빈깡통. 그는 소설 <태양의 제국>이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자신의 웹툰 <벼린 칼날>의 설정이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배경이 판타지 세계냐, 현실 세계냐는 차이만 있을 뿐,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는 주인공의 아버지와 출생의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을 억압하는 이복 형제들의 계략 같은 것이 비슷하다는 주장이었다.

    표절 의혹이 제기되자 경우 역시 논란의 웹툰을 보긴 했지만 설정만 유사했을 뿐 풀어 가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오히려 이런 설정은 과거 여러 드라마나 소설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빈깡통 작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번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 되면 올바른 판단이 쉽지 않았다. 윤혜승 역시 그러했다.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던 그녀가 그러지 못한 모습에 경우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작가님만 괜찮으시다면 저희 쪽에 변호사가 있는데 저희한테 이 일을 맡기시는 게 어떨까요?”

    “…….”

    “신상이 밝혀지는 걸 원치 않으시잖아요. 저희한테 맡겨 주신다면 작가님의 신분이 드러나는 일은 없도록 처리할 생각입니다. 작가님은 그냥 지금 지내시는 대로 지내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어떤가요?”

    출판사 사장은 이참에 정체를 밝히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어왔다. 만약 윤혜승이 결심만 해 준다면 이번 일을 노이즈 마케팅으로 이용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재벌가 비서라는 게 밝혀지면 사람들이 더욱 관심을 쏟을 테니까. 결국 사장이 원하는 건 책을 더 팔려는 생각뿐이었지 그녀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 남들이 보기에 겨우 운전을 하는 것뿐이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한을 풀어 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결코 팔아먹기 위해 쓴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연히 돈만 생각하는 출판사 사장보다 눈앞의 경우에게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자신이 신뢰하는 강희주가 만나는 남자이기도 했고.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번 일 민 작가님께 일임하죠. 저의 명예를 지켜 주실 거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걱정 마세요.”

    그렇게 회사로 돌아온 경우는 지선의 친구이자 회사의 법률에 관한 모든 일을 맡고 있는 김기영 변호사를 불러들였다.

    스튜디오 글로리의 공동 대표인 김종수까지 모인 자리에서 김기영이 사무실로 들어오자 경우는 윤태화 작가에 대한 모든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경우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저도 봐야 알겠지만 그 정도 설정은 사실 그렇게 특이한 건 아니잖아요. 거기다 표절로 인정받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요. 문제는 따로 있죠.”

    진짜 표절인데도 법이 느슨해 면죄부를 주는 것도 문제였지만 앞뒤 사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 우르르 달려가 비난하는 것도 문제였다.

    “뒷말 나오기 전에 빨리 공식 입장을 내놓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 문제는 제가 처리할 테니 대표님은 걱정 마세요. 변호사님이 보기에도 표절은 무리라는 거죠? 저도 표절 의혹 제기는 많이 봤지만 표절이라고 확정된 건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네요.”

    “아예 문장으로 그대로 베껴 쓴 게 아니라면 표절로 인정받기는 어렵죠. 솔직히 표절이 법적인 문제라기보다 윤리적인 문제잖아요. 우리가 보기엔 표절이 맞는 것 같아도 결국 작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번 일 잘 처리해 주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깔끔하게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뭘.”

    자신만만한 얼굴로 돌아서던 김기영이 잠시 멈칫했다.

    무슨 일인가 싶은 그때 그가 돌아섰다.

    “왜요?”

    “아니……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그렇잖아요. 작가님도 아시다시피 이 바닥에서 표절 인정 받는 게 어렵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지금까지 판례를 살펴봐도 원고가 승소한 소송이 거의 없어요. 결국 시간 들고 돈까지 드는 일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냐는 거죠.”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요?”

    “다른 이유라면……?”

    “저야 알 수 없죠. 하지만 굳이 이런 일을 벌였던 만큼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문제 제기를 한 김기영이 돌아가자 경우는 빈깡통 작가에 대해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경우의 모습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김종수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아무래도 드라마 제작, 중단해야겠죠?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앞으로 소송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오, 이대로 진행할 생각입니다.”

    “작가님!”

    “저도 그 웹툰 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표절이라고 생각될 만한 점이 없었어요. 말도 안 되는 주장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괜찮을까요? 전 왜 걱정이 되는 건지…….”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가요? <태양의 제국> 편성을 조금 미루는 겁니다.”

    “미룬다면……?”

    “전에 안 PD님하고 이야기했을 때 <태양의 제국> 후속작이 정상혁 작가의 작품이라고 들었거든요. 정상혁 작가만 괜찮다고 하면 순서를 바꾸는 게 어떨까 해서요?”

    “정상혁 작가 작품을 먼저 편성하자 이 말씀이십니까?”

    “네.”

    정상혁 작가는 구연하 작가와 공동으로 <다잉 메시지>를 집필한 작가로 이번 신작을 준비 중이었다.

    “하긴 정상혁 작가도 시놉이랑 트리트먼트까지 끝내고 대본 집필에 들어갔다고 이야기 들은 것 같네요. 얼추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제가 한 번 의논해 보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이랄 게 뭐 있나요? 일인데. 참, 작가님이 집필한 작품이라 그런지 배우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더라고요. 아직 오디션 날짜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오디션 언제 하냐고 그렇게 연락이 온답니다.”

    “그래요?”

    “혹시 표절 논란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 바닥 소문이 빠르잖아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드라마에 참여하고 싶다는 걸 보면 배우들도 이번 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그 사람들도 아는 거죠. 표절로 인정받기 어렵다는 거요.”

    경우의 말에 김종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작품이 좋아 계약을 했는데 이런 저런 일로 제작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 이어지면 계약에 묶여 다른 일조차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 그런 일은 아예 발을 들이지 않는 게 배우들이었다. 조그만 논란 거리도 피하려 애쓰는 이들이 표절 의혹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동안 쌓아 온 경우의 신뢰감이 빛을 발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럼 저는 마저 대본 써야겠네요. 대표님도 수고 좀 해 주세요.”

    “스케줄 잘 뽑아 볼 테니까 작가님은 다른 거 걱정하지 마시고 대본 집필에만 전념하시죠.”

    “네.”

    경우는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7화 대본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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