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끝내거나 혹은 시작하거나 (3)
어두컴컴한 사무실, 한 남자가 인터넷 기사를 보고 있었다.
연일 대박 행진을 이어 오고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의 대표 겸 드라마 작가인 민경우가 새로운 드라마 제작에 나선다는 소식이었다. 그것도 인기 베스트셀러로 잘 알려진 소설 <태양의 제국>을 드라마화한다는 소식에 남자는 책상 위에 올려 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남자는 기사에 함께 실린 경우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 * *
띠리리리.
새벽 4시 30분, 알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이불 속에서 나온 손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았다. 마침내 알람이 꺼지자 방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곧이어 화장대 위 탁상 시계가 울리자 베개로 귀를 틀어 막던 여자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으로 겨우 일어난 그녀는 알람을 겨우 끄고 욕실로 향했다.
매일 아침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윤혜승은 침대에서 욕실까지 가는 이 시간이 가장 힘겹게 느껴졌다.
그렇게 서둘러 준비를 마친 후 정각 6시, 그녀는 성북동의 어느 주택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안쪽에 놓아둔 신문을 자연스레 챙긴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집안일을 돌보는 아주머니가 벌써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윤 비서 왔어?”
시계를 힐끔 본 아주머니가 살짝 웃었다.
“하여간 시계라니까.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6시 정각 종치면 들어오는 거야? 어떻게 사람이 1분도 어기는 법이 없어?”
“시간을 맞추려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죠. 큰사모님 일어나셨죠?”
“참, 윤 비서가 이것 좀 가지고 큰사모님 방에 들어가 봐.”
“왜요? 어디 편찮으세요?”
“어제 저녁부터 몸살 기운이 있다고 하시더니 영 안 좋으신 모양이야. 새벽 운동 빼먹으셨어.”
걱정 어린 윤 비서는 대문 앞에서 챙겨 온 신문과 함께 아주머니가 준비해 둔 죽이 담긴 쟁반을 들고 손주옥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노크를 하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손주옥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아주머니의 말마따나 평소와 달리 손주옥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윤 비서 왔어?”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김 박사님 모셔 올까요?”
“아니야. 몸살 기운 조금 있는 걸 가지고 뭘. 약 먹고 좀 쉬면 될 거야.”
“먼저 이것 좀 드셔 보세요.”
“전복죽이네. 고소한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예산댁이 아침부터 고생했겠어.”
“아주머니가 걱정이 많으세요. 이제 건강도 좀 생각하세요.”
“내가 여러 사람 걱정시키네. 참 오늘 스케줄이 뭐 있지?”
“그게…… 오늘 일정 취소하시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큰사모님, 오늘 하루는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뭔데 그래?”
“오늘…… Y병원 어린이 병동에 방문하기로 되어 있으십니다.”
“내가 아프다니까 윤 비서가 걱정했나 보네. 그렇게 아픈 건 아니니까 스케줄 대로 하자고. 한 달에 한 번 방문하는 건데 내가 안 가면 애들이 서운할 거야. 애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그냥 스케줄 대로 처리해 줘.”
“알겠습니다. 큰사모님.”
남편이었던 선대 회장이 살아있을 때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한다며 여러 봉사 활동을 해 왔던 그녀였다. 나이가 들었다고 하나 봉사 활동 만큼은 꼭 지키는 스케줄이었으니 혹시나 그녀가 무리라도 하지 않을까 윤혜승은 걱정이었다.
윤혜승은 손주옥이 죽을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빈 그릇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강희주가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막 들어서던 참이었다.
“아주머니, 좋은 아침이에요. 저 우유만 한 잔 데워 주세요.”
“또? 그렇게 우유만 먹어서 어떡해. 차라리 스프라도 만들어 줄까?”
“아니요. 어제 야식을 너무 과하게 먹어서 그래요.”
“퇴근이 늦은 것 같던데 또 사무실에서 배달 음식 먹은 거야? 그런 습관 들이면 안되는데.”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죠.”
여느 재벌집 딸들이 능력에 상관없이 회사의 임원이 되는 것과 달리 그녀는 집안과는 별개로 오로지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었으니 그런 그녀를 윤혜승은 꽤 흥미롭게 지켜보는 중이었다.
“혹시 오늘도 늦어?”
“아무래도 그렇죠.”
“그럼 내가 한 기사한테 시켜서 저녁에 먹을 야식 좀 보낼까? 부담스럽지 않은 걸로 만들어 볼게.”
“저야 그래 주면 좋긴 하지만 아주머니 힘드시잖아요.”
“내가 하는 일이 그건데 힘들 게 뭐 있어. 그럼 희주 좋아하는 거로 맛있게 만들어 봐야겠다.”
“역시 내 건강 챙겨 주는 아주머니 최고!”
“넉살은.”
“어? 언니, 좋은 아침.”
“좋은 아침입니다.”
“어휴, 그래도 사모님 다 드셨나보네. 어제는 저녁도 잘 못 잡수더니 주무시고 나니까 조금 나아지셨나보다.”
“할머니 어디 편찮으세요? 어제 너무 늦게 들어와서 인사도 못했는데.”
“많이는 아니고 몸살기 조금.”
걱정되는 마음에 손주옥의 방으로 향하려는 강희주를 윤혜승이 막았다.
“막 욕실 들어가셨습니다. 조금 이따가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윤혜승의 말에 강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유심히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언니, 화장품 뭐 써요?”
“네?”
“아니, 분명 나보다 나이도 많다고 들었는데 왜 나보다 어려 보이지? 같이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내가 언니라고 하겠어요.”
강희주의 말에 윤혜승이 미소를 지었다. 이게 강희주식 표현법이었다. 같은 말이라도 듣는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그녀의 화법.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좋아했고 윤혜승 역시 그녀를 좋아했다.
더 늦기 전에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며 강희주가 다시 2층으로 올라가자 아주머니가 윤혜승에게 커피를 내줬다. 그게 아침 루틴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커피를 마시며 그녀는 다시 한번 오늘 하루 스케줄을 정리했다.
경력직으로 재경 그룹 비서실에 입사했던 그녀는 짧은 시간 능력을 인정받아 손주옥의 개인 비서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렇게 손주옥 밑에서 일하게 된 지도 벌써 6년. 손주옥은 물론이고 강희주 역시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여느 재벌가 사람들과는 달랐으니 그동안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커피를 다 마실 때쯤 손주옥이 방에서 나왔다. 스케줄의 시작이었다. 곧 그녀는 손주옥과 함께 Y병원으로 향했다.
* * *
“결국 자신의 귀가 당나귀 귀 모양이라는 것을 밝힌 임금님은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어진 임금님이 되었답니다.”
“할머니, 정말 사람 귀가 당나귀 귀 모양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손주옥이 읽어 주는 동화책에 귀를 기울이던 아이들은 그녀를 향해 질문을 쏟아 냈다. 이미 익숙한 듯 손주옥은 모든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며 하나하나 반응해 주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 탓이었는지 아이들 역시 그녀가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날을 무척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 아이들에게 매달린 손주옥은 잠시 휴게실로 향했다가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으니.
“민 작가가 여기 웬일이에요?”
“어? 여사님…….”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만난 경우가 반가웠던 손주옥은 그를 붙잡고 앉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주머니 아들이 백혈병에 걸렸어. 그때 다행히 골수 이식을 받아 건강을 회복했지만 걱정 많이 했거든. 그래서 문병을 갔었는데…… 생각보다 아픈 아이들이 많더라고. 좀 놀랐지.”
“그럼 그때부터 봉사 활동을 하신 거예요?”
“자주는 못 오고 한 달에 한 번? 나 같은 늙은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한데 나이 들어 아파 병원에 입원해도 그렇지만 애들도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딱히 할 일이 없거든. 어떨 땐 인형극 놀이도 하고 어떨 땐 동화를 읽어 주기도 해. 생각보다 좋아하더라고. 그러는 민 작가는?”
“저 처음 드라마 찍을 때 어쩌다 봉사 활동을 온 적이 있거든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고 있네요. 물론 여사님처럼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여사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할머니라고 불러 주면 안 되려나?”
“네?”
“희주 할머닌데 민 작가도 할머니라고 불러. 여사님이라고 그러니까 거리감 느껴지잖아.”
실례가 아닐까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기대하는 손주옥의 표정이 경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그래, 얼마 듣기 좋아.”
환하게 웃는 손주옥의 모습에 경우는 기분이 이상했다.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른 탓이었다. 지금까지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어땠을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갑자기 뭉클해진 마음에 경우가 손주옥을 보자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가 미소 짓고 있었다.
순간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경우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었으니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가 볼까? 애들이 기다려서 말이야.”
“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선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고생 많으셨습니다.”
봉사 활동을 마친 손주옥이 집으로 돌아왔다. 윤 비서는 곧장 과일 주스를 그녀에게 가져다줬다. 마침 목이 말랐는지 손주옥이 시원하게 들이켰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좀 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병원에 왔다 가면 마음이 참 뿌듯해. 특히나 오늘은 더 좋기도 했고……. 아, 그러고 보니 영빈이 퇴원했더라고.”
“정말 다행이네요.”
“그러게. 다른 애들도 얼른 건강이 좋아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말이야.”
병원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 짓고 있는 손주옥을 보며 윤혜승은 머뭇거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큰사모님, 내일은 비서실 이승민 비서가 와서 큰사모님 스케줄을 관리할 겁니다.”
그녀의 말에 손주옥이 그녀를 바라봤다.
“아, 내일이었지, 참. 내가 깜빡했네. 오늘 일찍 보내 주려고 했는데. 난 이제 들어가 볼 테니까 윤 비서 퇴근해.”
“아닙니다. 아직 퇴근시간―.”
“괜찮으니까 퇴근해.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있을 거 아냐.”
“알겠습니다. 그럼 모레 뵙겠습니다.”
“그래. 잘 가.”
빨리 가라는 듯 손주옥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미소 짓던 윤혜승이 주방으로 향했다.
“아주머니, 저 퇴근해요.”
그러자 예산댁이 보자기로 싼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가.”
“뭔데요?”
“내일 필요할 것 같아서.”
궁금한 마음에 보자기를 풀어 보자 찬합 안에 들어있는 건 각종 나물과 전이었다.
“아주머니…….”
“진작부터 큰사모님이 챙겨 주라고 하셨어. 냉장고에 넣어 뒀다고 내일 가지고 가면 될 거야.”
“고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윤혜승은 자신을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곁에 많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음 날, 윤혜승은 찬합을 챙겨 경기도의 어느 추모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은 그녀 아버지의 기일. 예산댁 아주머니가 챙겨 준 음식들을 가지고 가자 사진 속 아버지가 그녀를 밝게 맞아 주고 있었다.
“아빠, 나 왔어.”
사진 속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웃고 있었다.
“아빠 주려고 음식 챙겨 왔는데……. 진짜 같이 먹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얼마나 좋은데, 아빠 부럽지?”
사진을 보며 윤혜승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아빠 사진 옆 유골함엔 고인의 이름 석자가 쓰여 있었으니 故 윤태화.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 전화 끄는 걸 깜빡했다. 미안 아빠.”
전화를 끄려던 그녀는 화면에 뜬 발신자를 보며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 예상치 못한 이야기 탓에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요즘 준호 형, 행보가 심상치 않아.”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온 김강철의 말에 경우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식 그렇게 되고 나서 한동안 자중할 줄 알았거든. 근데 준호 형이 누굴 만나고 있는지 아냐?”
“누군데?”
“너네 큰형.”
“정현이 형?”
“어, 두 사람, 요즘 자주 만나더라고.”
“뭐야? 둘이 손을 잡기라도 했다고?”
어이없어하는 경우의 질문에 김강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긴 했으나 경우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정현이 형한테도 사람 붙여. 둘이 누굴 만나는지 상세히 보고 하라고 해.”
경우가 김강철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그때 김강철의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뭐?”
놀란 김강철이 경우를 바라보자.
“뭔데?”
그는 대답 대신 인터넷 기사를 찾아냈다.
“이게 무슨…… 표절이라니?”
인터넷 기사엔 스튜디오 글로리가 제작하고 QVN에서 방송될 드라마 <태양의 제국>의 원작 소설에 표절 의혹이 있다는 내용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