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87화 (187/250)
  • #187. 끝내거나 혹은 시작하거나 (2)

    소설을 드라마화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점이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고 이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는 잊고 있었다.

    송지현의 지적을 마음에 새긴 경우는 다시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경우가 대본을 집필하는 동안 송지현은 경우의 맞은 편에 앉은 채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글씨 보기가 힘들어진 송지현이 회의실 안 조명을 밝혔다.

    그 바람에 놀란 경우가 처음으로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어? 작가님. 언제 오셨어요?”

    “나 집에 안 갔어요. 계속 여기 있었는데 몰랐어요?”

    “아, 네.”

    “진짜 부러운 집중력이네. 난 내가 치는 키보드 소리에도 예민해지는 사람인데. 하여간 부러운 건 다 가진 사람이야, 진짜!”

    “마침 잘 됐네요. 지금 막 1화를 끝낸 참인데, 봐 주시겠어요.”

    “벌써? 좋아요. 한번 읽어 보죠.”

    경우가 가져다 놓은 프린터가 어느새 대본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인쇄를 마치자마자 송지현은 대본을 가져다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사락사락, 오직 대본을 넘기는 소리만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초조한 마음으로 경우는 자신이 쓴 대본을 읽고 있는 송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보다 더한 순간도 많았는데 경우는 어쩐지 지금이 가장 떨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송지현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다 읽은 대본을 그녀는 소리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 진짜 짜증나.”

    “……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는 말이 난 위인전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죠. 이렇게 눈앞에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요. 습득하는 게 왜 이렇게 빨라요?”

    긴장했던 경우는 그게 송지현식 칭찬이라는 것을 깨닫자 굳어진 얼굴이 풀어졌다.

    “아니, 재벌집 아들이 서민들 마음까지 다 헤아리지 말란 말이에요. 그 짧은 시간 안에 작가의 진짜 의도까지 다 파악해 버리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라고? 난 민 작가가 울면서 도저히 모르겠다고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건 뭐 되려 내가 도와 달라고 하게 생겼으니……. 도대체 비결이 뭐예요?”

    “정말 괜찮은 거 맞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네, 아주 좋아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가면 괜찮을 것 같아요.”

    아이처럼 밝게 웃는 경우의 모습에 송지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 * *

    며칠 후 없는 시간을 쪼갠 민정현이 동생 준호의 사무실을 찾았다.

    “형이 내 방엔 어쩐 일이야?”

    “동생 사무실에 용건이 있어야 오냐?”

    “응. 형은 한번도 내 사무실에 안 왔잖아.”

    “……그랬나?”

    “새삼스럽게 그럴 거 없어. 형만 그런 게 아니라 누나도 그랬으니까. 우리 형제들은 일이 있어야 만나는 사람들이잖아. 그러니까 용건 있으면 빨리 얘기해. 형도 알다시피 내가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하거든.”

    그의 말마따나 민준호의 얼굴이 무척 어두웠다. 최근 그를 둘러싼 이상한 소문이 문제였다.

    결혼식이 파투가 난 이유가 신부 잘못이 아니라 신랑 잘못이라고 소문이 난 것이었다. 그가 인도로 갔던 일까지 소환돼 인도에 여자를 끼고 가서 아예 살림을 차렸더라, 자식까지 있다더라, 그걸 알고 결국 신부가 도망친 거라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왜 최영윤이 도망쳤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민준호는 억울함을 항변했지만 그의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부모마저도 그랬으니까.

    그의 부모가 그렇게까지 돌아선 이유는 송일 그룹 최 회장의 역할이 컸다.

    다시 만난 최 회장은 그 문제에 대해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결혼식 당일, 식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딸 때문에 저자세였던 것과 달리 민 회장을 대하는 태도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거기다 결혼식장에서 최명일의 말도 있었으니 자연히 자신의 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돌아선 윤정숙 또한 더는 민준호에게 기대할 것이 없어진 셈. 결국 민준호는 그런 식으로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멀어져 버렸다.

    이로써 처가의 힘을 빌려 보겠다는 민준호의 계획 또한 어긋나 버렸다. 한번 깨져 버린 결혼 탓에 다시 맞선을 볼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구경 다 했으면 그만 돌아가. 형하고 할 말 없으니까.”

    “정말 넌 잘못한 거 없어? 결백해?”

    형의 말에 화가 난 민준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까지 해야 속이 시원하겠는데? 안 그래도 정신없는 사람한테 찾아와서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아무리 배다른 동생이라지만 그래도 혈육인데 적어도 형은 나를 더 챙기고 믿어 줘야 하는 거 아냐?”

    “믿어.”

    “뭐?”

    “믿는다고.”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민준호는 뭐하자는 수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 너한테 정말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으니까.”

    민정현의 말에 잔뜩 날을 세운 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형을 보던 민준호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네가 뻔뻔하긴 하지만 배우 뺨 칠 정도로 연기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거든.”

    “…….”

    “나는 알아. 네가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거.”

    그러면서 민정현은 경우와 최영윤이 함께 있는 사진을 건넸다. 사진을 보는 민준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민경우 이 새끼를!”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당한 거야!”

    “뭐?”

    “그렇게 1차원적으로 반응하면 어떡해? 경우가 너한테 왜 이런 짓을 했겠어? 그 이면을 들여다봐야지.”

    “이면이라니? 나한테 물 먹이고 싶어서 안달 난 놈한테 다른 이유가 있기라도 하다는 거야?”

    “옛날엔 경우가 네 말이면 깜빡 죽었잖아. 근데 지금은 아니란 말이야.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었을 리도 없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됐으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해.”

    “예전에도 그랬지만 막내라 그런지 경우는 사람들 관심을 받고 그런 걸 참 좋아했어. 그런데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니까 그런 막내한테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지. 그런데 그런 경우를 유달리 챙기는 사람이 있었어. 바로 너.”

    “…….”

    “지금 생각해 보니까 참 의외야. 너한테 그런 면이 있었을 줄은 몰랐거든. 동생을 챙기는 따뜻한 형이라……. 그런데 왜 그런 형을 동생은 돌아선 걸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형이 핵심을 찌르는 것 같아 민준호는 괜히 불편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네가 어떤 경로로 인도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난 잘 몰라. 하지만 그거 하나는 확신해. 네가 인도에 가고 없는 동안 경우를 누가 챙겼냐는 거야?”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그가 없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나 지선과 동생 경우의 사이는 더욱 각별해져 있었다. 누나가 다른 사람도 아닌 경우와 함께 일한 별 볼일 없는 드라마 PD와 결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인도로 가게 되었던 그때도 난리가 났던 호텔 방으로 아버지를 데리고 온 건 경우가 아닌 누나였다. 경우의 뒤에 누나가 있다고 생각하자 그동안의 일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누나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경우에게 접근했던 게 틀림없었다. 먼저 경우를 꼬드겨 자기의 편으로 만든 다음 자신을 벼랑으로 밀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게 전부 경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 배후에 누나가 있었다고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동생의 모습에 민정현은 지난 밤 아내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어차피 경우는 지선이 편이야. 지선이의 지령을 받은 경우가 준호의 결혼을 파투 냈다고 하면 준호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다고 도련님이 우리 손을 잡을까? 원래도 우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잖아.’

    ‘지금 우리한텐 그놈이 가진 지분이 반드시 있어야해. 그러니까 어떻게든 준호를 우리 편으로 포섭해야지.’

    ‘그러다 나중에 우리 뒤통수라도 치면?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솔직히 둘째 도련님 난 꺼림칙해. 어머니랑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둘째 도련님이잖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단 말이야.’

    ‘지금은 준호가 지선이와 손을 잡는 걸 막는 게 급선무야. 그리고 걱정하지 마. 준호가 어떤 놈인지 아는 이상 당하고 있지는 않을 거거든.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있는 이상 멍청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테니까.’

    채찍을 이 정도 때렸으면 응당 당근이 나와 줘야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동생을 향해 민정현이 입을 열었다.

    “준호야, 이렇게 된 거 차라리 내 손을 잡는 게 어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너도 알다시피 네가 새명의 차기 회장이 되는 일은 힘들어. 어머니도 완전히 돌아서셨고 이번 일을 문제 삼아 이사들도 몇몇 너한테 돌아섰을 거야.”

    “그래서? 나더러 형이 후계자가 되게 밀어 달라는 거야?”

    “어. 네가 가진 지분에 내가 가진 걸 합치면 꽤 되지 않아?”

    “누구 좋으라고? 평생 형을 경계하면서 살아왔어. 그런 나한테 형을 밀어 달라고 하는 건 너무 뻔뻔한 거 아냐?”

    “현실을 똑바로 봐. 너한테 누가 있는데? 철옹성 같던 어머니도 너한테 돌아섰어. 어머니 마음이 며칠 후면 풀릴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지금 네 편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내 손을 잡으라고. 내가 회장이 되면 네가 부회장이 될 수 있어.”

    “근데 형도 마찬가지 아냐? 아버지 마음이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은데?”

    풀어진 동생의 말투에 그가 드디어 넘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 지분 합치는 걸로 새명 물산을 차지하는 건 힘들어. 그게 쉬웠으면 어머니도 그러고 계시진 않았을 거라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너랑 내가 힘을 합치면 몇몇 이사들을 우리 쪽으로 포섭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한다면 너한테 돌아섰던 이사들 마음 돌리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어?”

    “확실히 누나보다는 우리가 무게감이 더 있을 테니까.”

    “어때? 내 손을 잡을 의향이 좀 생겼어?”

    자신을 향해 내민 형의 손을 민준호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뭘 망설여? 어서 잡아. 내가 회장이 되면 새명 유통, 지선이한테 빼앗아서 너한테 줄게.”

    결국 민준호는 형의 손을 잡았다. 한평생 라이벌로 반목만 하던 형제에게 드디어 같은 목표가 생겼다.

    옛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말, 비록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해도.

    * * *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그때 보여 드렸던 기획안과는 방향이 조금 달라져서요, 무엇보다 작가님께 양해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송지현의 조언에 따라 대본을 전면 수정한 경우는 원작자인 윤태화에게 대본을 보냈다. 그런 경우의 모습이 윤태화는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많은 제작사들로부터 드라마화 제의를 받았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의 의견을 묻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경우만이 유일했다. 결국 경우와 계약을 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계약을 한 이후로 이 작품은 이제 제 손을 떠났다고 생각해요. 드라마와 소설의 연계가 아예 끊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굳이 제 작품이라는 고집은 없습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이건 민 작가님 작품이에요. 그러니 제 양해 같은 건 필요없죠. 그리고 솔직히 제가 쓴 것보다 더 좋아졌던데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고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제 소설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윤태화의 말에 경우는 그간의 시름이 씻긴 듯 내려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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