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86화 (186/250)
  • #186. 끝내거나 혹은 시작하거나 (1)

    서류에 결재를 받기 위해 아버지 민 회장의 방을 찾았던 민정현은 뜻밖의 손님을 마주하게 되었다.

    “오빠.”

    “지선이 네가 웬일이야?”

    “오랜만에 아버지랑 점심이나 같이 하려고.”

    “그러지 않아도 널 부르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선약이 없다면 너도 같이 가자꾸나.”

    “네, 아버지.”

    동생의 결혼식이 그렇게 된 이후 의기소침해하던 아버지가 모처럼 기운을 차린 것 같아 그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평소 아버지와 자주 가는 중식당에 들어간 세 사람은 모처럼 이야기꽃을 피웠다.

    “안 서방, 요즘 일은 어때? 지난번엔 너무 경황이 없어서 묻는다는 걸 깜빡했구나.”

    “자기 일 열심히 하면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아참, 이번엔 경우랑 같이 드라마 할 건가 봐요.”

    “그래?”

    “네, 원작 소설이 있는 드라마라고 하는데 그거 하느라 요즘 정신이 없어요.”

    “열심히 한다니 다행이구나. 그나저나 좋은 소식은 없는 거냐?”

    “아버지도 참. 그게 마음 대로 되나요.”

    “낳을 생각은 있는 거고? 요즘 젊은 사람들, 그 뭐라더라…… 딩, 무슨 족? 일부러 자식 안 낳고 사는 사람들도 많다며?”

    “딩크족이요? 저는 아니에요. 생기면 낳을 생각이에요. 요즘 오빠 보면 얼마나 부러운데요.”

    “내가?”

    “그래. 지난번에 윤아 봤을 때 너무 귀여운 거 있지. 아직 두 돌도 안 지났는데 어쩜 그렇게 말을 잘해?”

    “윤아 엄마가 말을 많이 시키니까. 아무래도 애들은 많이 듣고 하다 보면 말도 느는 거지.”

    “그래? 난 혹시 벌써 튜터 들인 건가 했어.”

    “아직 애야. 벌써부터 그런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아.”

    “그래. 애들은 애답게 크는 게 좋지.”

    민 회장의 말에 민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조합으로 식사를 한 적이 없는 탓이었다.

    식구들 중 아버지와 가장 가깝긴 했으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그렇듯 갈수록 나누는 대화의 수가 줄어들어 일 이야기가 아니고는 딱할 할 말이 없었다. 그나마 결혼을 한 뒤에는 대화의 주도권을 모두 아내에게 넘겨 버렸으니 아내가 없는 자리에선 아버지와 어떻게 대화를 하나 그것부터가 걱정이었다.

    거기다 여동생이지만 민지선도 하나 다를 게 없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아들 셋에 딸 하나가 아니라 아들만 넷인 것 같다며 투덜댄 적도 있었다.

    그런데 결혼을 한 탓인지 민지선이 전과는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몇 마디 나누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는 게 다였을 텐데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달라진 동생의 모습에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참, 최 전무한테 들었다.요즘 스타 플래닛 매출이 괜찮다며?”

    “네, 작년 4분기 매출이 180억이었는데 올 1분기 현재 매출이 230억을 넘었어요.”

    “벌써? 작년에 오픈한 탓에 홍보가 덜 돼 매출이 적었다고 해도 아직 1분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많이 늘었구나. 고생 많았다.”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직원들이 다들 열심히 해 준 덕분이죠.”

    “그래,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록 그렇게 직원들한테도 공을 돌려야 사기 진작을 위해서도 좋은 법이야.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어.”

    “네, 아버지.”

    “그리고 잘나간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언제든 치고 올라올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많아.”

    “명심할게요. 지금은 고정시 하나뿐이지만 앞으로 화정, 구남, 고산, 신흥으로 복합 쇼핑몰을 점점 늘려 갈 계획이에요.”

    딸의 포부에 민 회장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은 민정현이 조금은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민정현은 그제야 깨달았다. 동생의 말수가 늘어난 건 결혼을 한 탓이 아니라 그녀의 사정이 전보다 넉넉해진 탓이라는 걸. 그동안 이사들이 지적해 왔던 결혼 문제도 해결된 데다 스타 플래닛의 성공으로 사업적으로도 탄탄해지고 있었으니 거기서 오는 자신감이 자연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던 거였다.

    더 이상 어릴 때 그가 알던 불쌍한 동생이 아니었다. 어느새 자신보다 더 커져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적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내내 그 상태였다.

    스트레스 때문에 몸까지 무거워지자 아무래도 오늘 일은 아니지 싶어 민정현은 평소보다 이른 퇴근을 했다.

    “당신 벌써 들어와?”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그를 아내가 맞이했다.

    “윤아는?”

    “오늘 낮에 잘 놀았는지 조금 전에 잠들었어.”

    “아빠가 아직 안 왔는데 벌써 자? 이놈의 자식, 안 되겠네.”

    “술도 안 마신 것 같은데 웬 술주정? 자는 애 깨우지 말고 이쪽으로 와. 나 당신한테 할 말 있으니까.”

    딸 윤아의 몸에서 나는 분유 냄새를 맡으며 힐링 좀 하려 했던 민정현은 아내 손에 이끌려 거실로 들어왔다. 일단 소파에 앉은 그에게 배예원이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일단 보고 말해.”

    봉투 안을 열어 보니 거기엔 여러 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을 살펴보던 민정현이 깜짝 놀라 아내를 봤다.

    “이, 이건…….”

    “당신도 놀랐지? 둘째 도련님 결혼식 파투 낸 사람이 막내 도련님일 줄 누가 알았겠어?”

    경우와 최영윤이 공항에서 함께 악수를 나누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 사진 다 어떻게 한 거야? 혹시 경우한테 사람 붙였어?”

    “……그래, 붙였어! 당신은 알아서 하겠다고 나한테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떡해. 나도 당신한테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단 말이야.”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던 터라 조금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화근이었다.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에 민정현이 아내를 끌어안았다.

    “추궁하는 거 아니야. 그냥…… 내가 부족해서 당신한테 이런 짓까지 하게 해서 미안한 거지.”

    “정말? 화난 거 아냐?”

    “내가 왜 당신한테 화를 내.”

    “진짜지? 다행이다.”

    “그래도 사람 붙인 거 그만하자. 혹시 들켰다간 그게 나중에 발목 잡힐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는 알아야 한다고 그래서……. 알았어, 미행하는 거 그만두라고 할 게.”

    “그래.”

    민정현의 품에서 나온 아내가 물었다.

    “그럼 이 사진은 어쩌지? 다 버릴까?”

    “버리긴 왜 버려. 어떻게 찍은 귀한 사진인데.”

    “그래? 그럼 아버님께 가지고 갈 거야? 아버님 보시면 분명 화 내시겠지? 막내 도련님이 아가씨 편에 선 거 아시니까 아가씨 점수 좀 깎이려나?”

    “아니. 아버지한테 안 가져 갈 거야.”

    “그럼?”

    “준호한테 가지고 갈 거야.”

    “둘째 도련님? 아니 왜?”

    좋은 생각이 떠오른 정현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 * *

    얼마 전 크리에이터로 참여한 드라마가 종영을 한 덕분에 쉬고 있었던 송지현은 김종수의 다급한 부름에 오랜만에 사무실로 향했다.

    “대표님이 저한테 연락을 다 주시고, 어쩐 일이세요?”

    “그게 민 작가 때문에요.”

    “민 작가요? 아, 이야기는 들었어요. 새로 드라마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그거 원작이 있는 드라마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기획안까지 다 작성했는데 대본에서 막히는 모양이에요.”

    “민 작가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괴물 같은 실력을 갖춘 경우가 드라마를 쓰는데 막힌다고 하니 송지현조차 믿기지 않았다.

    “제 생각인데 원작이 있는 작품을 쓰려니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벌써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회의실에 틀어박혀서 저러고 있는데 이러다간 일 치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제가 도움이 될까요?”

    “방송국의 살아있는 화석 아닙니까? 작가님 정도면 충분하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제가 나이든 사람처럼 보이네요.”

    “드라마 쓰는 감각은 누구보다 젊으시죠.”

    “실제로 젊다고는 절대 안 하시네요.”

    “제가 보기보다 고집이 좀 있어서.”

    “하여간 대표님을 당할 재간이 없네요. 알았어요. 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한번 나서 보죠.”

    그렇게 말한 송지현은 곧바로 경우가 있다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정말 며칠 동안 퇴근하지 않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회의실엔 컵라면이며 종이컵 등등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난 대표님이 엄살 부리는 줄 알았더니 정말이었네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었던 경우는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때!

    “여기를 보세요, 찰칵!”

    다짜고짜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 송지현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린 경우가 물었다.

    “작가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그거 초상권 침해에요.”

    “다른 데 안 돌리고 나만 볼게요, 나만. 인생에 두 번은 못 볼 명장면인 것 같거든요.”

    언제 감았는지 떡진 머리에 턱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거기다 듬성듬성 난 수염까지……. 늘 단정하고 깔끔하게 하고 다니던 경우의 달라진 몰골에 송지현은 새삼 그에게 인간미를 느꼈다.

    “비웃으시려거든 실컷 비웃으세요. 대꾸할 힘도 없으니까.”

    “와, 민 작가도 사람이었군요? 천하의 민 작가가 왜 이렇게 되셨을까?”

    “기획안을 작성하기는 했는데 막상 대본에 들어가려니 겉도는 느낌이에요. 지금 1화만 몇 번을 다시 쓰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테이블 위엔 인쇄된 1화 대본이 여럿 늘어져 있었다. 경우가 수정해야 할 부분이라며 빨간펜으로 죽죽 그어 놓은 게 눈에 띄었다.

    한참 동안 대본을 살펴보던 송지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민 작가, 욕심이 너무 과했던 거 아니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 실력에 소설을 드라마화 하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에요.”

    “여전히 핵심을 못 찾고 있네.”

    “네?”

    “민 작가가 이 소설을 드라마화 한다고 해서 나도 좀 읽어 봤어요. 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이 뭐 였는지 알아요?”

    “…….”

    “이거 어쩌면 민 작가가 못할 수도 있겠다.”

    “그게 무슨…….”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어떻게 되죠?”

    “2000년대요.”

    “맞아요. 2000년대. 그때 우리나라 어땠는지 기억나요?”

    민경우가 되어 이곳에서 깨어났던 게 2008년.

    2000년이라면 그가 얼마 안 되는 자립정착금을 가지고 반지하 방을 구해 혼자 살던 때였다.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다 다행히 해장국집 사장님을 만나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인간적 유대감을 느끼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송지현에게 할 수는 없었으니 경우는 대답 대신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그때를 이해하려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해요. 그럼 뭐가 있겠어요? 바로 IMF!”

    그도 IMF에 대해선 기억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얼마 되지 않았던 후원금이 그 이후로 똑 끊겼으니 반찬의 가짓수가 줄어들고 그나마 받던 용돈이 끊겼던 거 외에는 별로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원래도 어려웠으니 조금 더 어려워졌다고 크게 체감하지 못한 탓이었다.

    “멀쩡하던 기업이 하루 아침에 사라졌어요. 그럼 거기서 다니던 직장인들이 다 어떻게 됐겠어요.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럼 살아남은 기업에선 괜찮았냐? 아니요. 관리를 이유로 구조 조정을 당했어요. 수많은 실업자가 생겨난 시대죠, 그때가.”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경우는 송지현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들이 다 IMF 이후로 생겨난 것들이에요. 아, 요즘 사람들 물건 살 때 가성비 따지잖아요. 엄밀히 따지면 사람한테 가성비를 따졌던 거죠. 돈은 더 적게 들이면서 일은 더 많이 해 주는 사람.”

    “비정규직.”

    “맞아요. 우리의 주인공은 그런 인물이었어요. 하루 아침에 재벌 회장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가성비로 이용되던 비정규직 인간이었다고요. 소설을 드라마로 옮기는 작업에 앞서 윤태화 작가가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런 배경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는지 생각해 보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요?”

    생각해보면 묘한 일이었다.

    고명희라는 이름에 가려져 그의 작품을 대신 써 주던 보조 작가 이은석, 그 역시 가성비 좋은 비정규직 인생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재벌집 아들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소설 속 주인공과 경우의 모습이 너무 닮아있었는데도 경우는 그 사실을 송지현을 통해 깨닫게 되었으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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