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85화 (185/250)
  • #185. 식스 센스 (3)

    아까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 손녀 탓에 손주옥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만 좀 뛰어다녀.”

    “아직 화장도 제대로 못했는데 어쩌지? 아, 옷은 또 어디 있는 거야? 아주머니, 제 옷 세탁소에서 찾아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2층 드레스 룸 옷장에 넣어 놨지.”

    “그쵸? 근데 왜 안 보이지?”

    허둥대면서도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는 손녀 탓에 결국 손주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너 때문에 나까지 늦겠어. 윤 비서!”

    그녀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윤 비서가 다가왔다.

    “네, 큰 사모님.”

    “우리 희주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줘.”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손주옥의 옆에서 일해 왔던 윤 비서는 허둥대는 강희주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능숙하고 빠른 손놀림으로 강희주를 돕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화사하게 변신한 손녀의 모습에 손주옥이 환히 웃었다.

    “이게 누구야?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왔네.”

    “할머니도 참.”

    빈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강희주는 괜히 배시시 웃었다.

    “할머니, 나 정말 괜찮아? 이상하지 않아?”

    일의 특성상 늘 짙은 색의 정장만 입고 다니는 그녀는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어쩐지 어색하기만 했다.

    “이상하긴. 신부보다 더 예쁠까 봐 걱정이구만. 그럼 정말 민폐잖아.”

    “할머니도 그런 말 써?”

    “나는 뭐 문명과 단절된 삶을 사니? 젊은 애들이 아는 건 나도 안다, 이거야.”

    “오, 멋진데!”

    “이러다 정말 늦겠다. 얼른 가자.”

    오늘 결혼식으로 사돈을 맺게 된 새명 그룹과 송일 그룹, 양쪽 모두 친분이 있었던 손주옥은 바쁜 아들을 대신해 두 집안의 경사를 축하해 주기 위해 강희주와 함께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된 김에 경우 부모를 만나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말이라도 꺼내 볼 참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은 끝내 파투가 나고 말았으니 결국 인사 말고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나눠 보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민 작가가 죄송할 게 뭐 있어. 신부가 도망간 게 민 작가 책임은 아니잖아?”

    “…….”

    “나는 괜찮으니까 부모님 잘 살펴 드려.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실 텐데.”

    “네, 감사합니다.”

    “그럼 우린 그만 가자.”

    결혼식이 끝나면 같이 데이트라도 하려 했던 강희주는 할 수 없이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호텔을 빠져나갔다.

    그 뒤, 경우는 일일이 손님들을 찾아가 사과의 말을 전하며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깨진 결혼식의 파급력은 상당했다.

    신부 대기실에 웨딩드레스만 벗어 둔 채 신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안 사람은 신부와 함께 입장을 하기로 했던 신부 아버지 최 회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이가 어디로 간 건지 결혼식을 조금 늦춰서라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해 호텔 안에 사람을 풀었다.

    하지만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아무리 뒤져도 딸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실에 충격을 받은 최영윤의 어머니가 쓰러져 119에 실려갔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더니…….”

    민지선의 투덜거림에 안청모가 그녀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 바람에 주변을 살폈지만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찾아온 하객들에게 일일이 사과의 말을 전하며 돌려보낸 최명일은 몇 시간 만에 늙어 버린 아버지를 발견했다.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 겁이 났으면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갑자기 사라져 버린 동생을 원망하는 것과 동시에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그러고 보니 바라던 결혼을 하는데도 내내 기뻐하는 내색이 없었다. 원래 말수가 적고 차분한 성격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러다 순간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오빠는 항상 내 편이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 편 들어줄 거지?’

    최명일은 그제야 동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냥 하는 소린 줄 알았는데 어쩌면 동생은 진작부터 이 일을 계획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 일의 원흉이 뭘까 생각했는데……,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민준호에게로 향했다. 그를 보는 최명일의 눈빛이 매서워져 있었다.

    그때였다.

    “내 인생의 이런 수모는 처음이에요! 신부가 결혼식 당일 도망을 치다니요! 하객들 다 모아 놓은 자리에서 망신을 줘도 유분수지!”

    참다 못한 윤정숙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발끈하고 나선 건 최명일이었다.

    “사정이 있었겠죠!”

    “명일아!”

    “사정이요? 무슨 사정이요? 어디 할 말 있으면 해 보시죠?”

    “여보, 그만해.”

    “내가 지금 못할 말 했어요?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런 황당한 일을 겪고 있는데요?”

    “네, 제 동생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그런데 영윤이가 사라져서 결혼식을 망친 것만 생각하고 영윤이가 왜 도망쳤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생각이요? 생각이라고 했습니까, 지금? 애초에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서 손님들 모셔놓고 이런 일을 벌이는 거랍니까? 그리고 이유가 있다면 그래, 그랬겠구나 하고 이해라도 해 줘야 한다는 겁니까?”

    “…….”

    “명일아, 너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거냐?”

    최 회장의 물음에 그는 대답 대신 민준호를 째려봤다. 그의 시선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민준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당황한 민준호가 손을 내저었다.

    “저는 모르는 일이에요, 정말 영윤이가 왜 사라졌는지 모른다고요.”

    “괜히 애먼 사람 잡지 마시죠! 혹여 우리 애가 잘못이 있다고 해도 이런 식은 아니죠.”

    “사부인,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답답한 마음에 그런 거니 이해해 주시죠.”

    “아버지! 무조건 저자세로 나갈 일이 아니라니까요!”

    “조용하지 못해! 너도 어서 사부인께 사과드려!”

    “최 회장님, 사부인이라니요. 이 결혼은 이제 끝난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어, 어머니.”

    “그만 가자!”

    윤정숙이 식장을 나가 버리자 새명가 사람들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식장 안에는 송일가 사람들만 남았다. 아들을 매섭게 바라보던 최 회장이 입을 열었다.

    “너 혹시 뭘 알고 있었던 게냐?”

    “아니에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영윤이가 좀 이상했던 것 같아서요. 솔직히 영윤이가 이런 짓을 벌일 만한 아이는 아니잖아요.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요.”

    “일단 영윤이부터 찾아! 반드시 찾아내서 내 앞으로 데려와, 당장!”

    “네, 아버지.”

    최 회장 역시 식장을 빠져나가자 최명일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신호음만 갈 뿐 동생의 목소리를 끝내 들을 수 없었다.

    * * *

    공항 대합실.

    여행을 떠나느라 설레하는 사람들 속에 우울한 얼굴로 최영윤이 앉아 있었다. 여권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싶은 생각에 초조해졌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자 상대의 얼굴이 비로소 보였다. 경우였다.

    “이따 보자는 말이 진짜 보자는 말인 줄은 몰랐네요.”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까요.”

    “지금쯤 난리가 났겠죠?”

    “그쪽 어머니 쓰러지셨어요.”

    “네?”

    놀란 최영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결혼식장에서 딸이 사라졌는데?”

    “…….”

    “걱정 말아요. 알아봤더니 병원으로 옮기고 괜찮아지셨대요. 아무래도 충격이 크셨겠죠. 떠나기 전에 전화라도 드려요. 그래야 안심을 하시지.”

    “……고마워요.”

    “크게 일 저지른 사람치고는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근데…… 여기 와도 괜찮은 거였어요?”

    “들키는 날엔 형한테 죽겠죠? 근데 그거야 내 사정이고 그쪽이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네요.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천만에요. 덕분에 나도 형한테 한 방 먹일 수 있었으니까 상부상조한 거죠. 어때요? 이제 속이 시원해요?”

    하지만 그런 것과 달리 영윤의 얼굴은 아주 우울해 보였다. 오랜 시간을 벼려 온 복수를 성공했지만 얼굴에 진 그늘은 사라지지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원래 복수란 게 그런 겁니다. 해도 찝찝하거든요. 특히나 이번 건은 더 하죠. 그쪽한테도 타격이 있는 일이었잖아요. 그래서 가장 큰 복수는 상대를 용서하는 거라더군요.”

    자신의 말에 생각이 깊어진 최영윤을 보던 경우는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마포까지 찾아온 그녀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저한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죠? 민준호한테 물을 먹일까 해요. 결혼식장에서 도망칠 생각이거든요.’

    ‘나한테 그런 말 해도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민준호 동생인데?’

    ‘적의 적은 때론 친구가 되기도 하니까요.’

    ‘내가 형의 적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죠.’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지금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쪽의 얼굴, 표정, 숨소리…… 전혀 화가 나거나 흥분한 상태가 아니잖아요. 오히려 차분해졌으면 했지.’

    ‘심리학 같은 거 공부합니까?’

    ‘그런 건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죠. 눈치라는 게 있으니까. 그래서 그쪽도 그때 나한테 그런 말 했던 거 아니었어요?’

    최영윤은 손 안에 든 경우의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구겨진 명함을 말없이 보던 경우가 입을 열었다.

    ‘결혼식장에서 도망치는 건 민준호뿐만 아니라 그쪽한테도 타격이 있는 일이에요. 복수라면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데요?’

    ‘어쩌면 나한테도 벌을 주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어요.’

    ‘……좋습니다. 내가 그쪽을 어떻게 도우면 되는 거죠?’

    ‘아무도 모르게 결혼식장에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줘요.’

    ‘그거면 됩니까?’

    ‘네. 이 나라를 뜰 생각이거든요.’

    ‘알았어요. 준비하죠. 혹시라도 마음 바뀔 것 같으면 미리 연락 줘요.’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애초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

    ‘근데 왜 안 물어보세요?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굳이 나까지 알 필요 뭐 있습니까? 민준호가 어떤 인간인지는 내가 더 잘 아는데. 내 형이지만 나도 당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남의 상처까지 들여다 볼 정도로 악취미는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다행이라는 듯 최영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알지 못한 채 당하고 있을 형이 살짝 측은하기도 했지만 그간 그가 해 왔던 일을 떠올린 경우는 뿌린 대로 거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다만 형의 잘못 탓에 애꿎은 가족들까지 고통을 당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특히 어깨가 축 처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탓에 형에 대한 미움과는 별개로 이런 일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어디로 갑니까?”

    “일단 이탈리아로 갈 거예요. 거기 친구들이 많거든요. 부모님 화 가라앉을 때까지는 거기 있을 생각이에요. 못 돌아와도 별 수 없고요.”

    “민준호한테는 말 안 해 줄 겁니까? 왜 그랬는지?”

    “네. 끝까지 안 할 거예요. 궁금해서 미치라고요.”

    “꽤 사악하시네.”

    “칭찬으로 들을 게요.”

    “잘 지내요. 건강하고.”

    “그쪽도요. 고마웠어요.”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최영윤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잠시 그녀의 손을 바라보던 경우가 마침내 손을 잡았다. 처음이자 마지막 악수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는 사이 누군가가 그 둘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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