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83화 (183/250)
  • #183. 식스 센스 (1)

    “소식 들었어. 축하해. 주식 부호 반열에 오른 소감이 어때? 아니지, 새명 홈쇼핑 주식도 꽤 가지고 있으니까 원래 부자였지. 야, 우리 동생한테 잘 보여야겠는데.”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말 들었으면 조금은 기뻤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누나가 말하니까 하나도 감흥이 없다.”

    “아니, 왜?”

    “누나랑 비교되니까 그렇지. 아무리 스튜디오 글로리가 잘나간다고 해도 새명 유통, 새명 물산에 비할까?”

    “새명 유통이야 내가 키운 거니까 그렇다 치고, 새명 물산은 싫다고 박차고 나간 사람이 누군데 그래? 사정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너한테 뺏은 줄 알겠다.”

    “그러니 부디 새명 그룹의 후계자가 되어 내가 양보한 것들이 아깝지 않도록 해 줘.”

    “어휴, 네가 그러니까 부담스럽다, 야.”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사람은 자기 몫이라는 게 있나 봐. 새명 물산 지분 넘겼을 때만 해도 얘가 뭘 믿고 그러나 싶었는데 지금 이렇게 큰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누님? 뭐, 잘못 먹었어?”

    “하여간 너는! 모처럼 분위기 좋은데 초 치진 말지.”

    “오케이.”

    “참, 아버지도 말씀하시더라. 은근히 대견하셨던 모양이야.”

    “그래? 그건 그렇고 왜 남편을 놔두고 나를 부려 먹는 건데?”

    “얘는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더라. 모처럼이잖아. 이 기회에 바쁜 동생 얼굴도 보고 좀 좋아? 그나저나 준호가 결혼을 한다니, 진짜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지금 민준호 결혼을 위한 상견례에 가는 중이었다.

    “아무렴 누나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만큼이야 하려고.”

    “내가 왜?”

    “누나 결혼 안 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 많을걸. 사실 누나도 그렇게 생각했잖아. 안 그래?”

    “뭐……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

    “준호 형은 욕심이 많았어. 집안 보고 이것저것 다 따져서 결혼할 거라는 거 어느 정도 예상됐잖아. 근데 누나는 아니었거든. 그게 다 위대한 사랑의 힘이라는 거지.”

    “이게 누나를 놀리고 있어!”

    “보기 좋다고. 누나처럼 깐깐한 여자가 혼자 늙어 봐. 더 까칠했을 거 아냐?”

    “이게 자꾸 선 넘네.”

    “그러니까 매형한테 잘하란 말이야.”

    “내가 진짜 동생 차 한번 얻어 탔다가 무슨 봉변인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던 민지선은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경우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 새로 드라마 한다며? 매형이랑 같이.”

    “서로 일 이야기도 해?”

    “당연하지. 서로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게 우리 부부의 철칙이거든. 원작 소설이 있다고 하던데. <태양의 제국>?”

    “혹시 누나도 읽었어? 베스트셀러 소설인데.”

    “아니. 네 매형이 읽는 거 봤지. 내가 소설책 볼 시간이 어딨니?”

    “시간 내서 봐 봐. 재미있으니까.”

    “근데…… 그 소설가란 사람,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소설을 읽어 본 것도 아니라면서 소설가가 왜 궁금한데?”

    “아니, 청모 씨 반응이 영 그랬거든. 작품 때문에 소설가를 만나고 왔다면서도 그 사람에 대해서 물으니까 자꾸 얼버무리고 말을 돌리더라고. 다른 건 묻지 않아도 잘만 말하면서 이상하잖아.”

    “미안하지만 앞으로 매형한테도 묻지 말고 나한테도 묻지 말아 줘.”

    “왜?”

    “윤태화 소설가에 대해 함구하는 조건으로 드라마화 허락받은 거거든. 만약 윤태화 소설가에 대해 털끝 하나라도 새 나간다면 드라마화는 올 스톱하기로 계약서를 썼어.”

    “무슨 그런 계약이 다 있어? 아니 왜?”

    “노코멘트. 궁금해하지 마.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 둬. 뭐, 내가 봤을 땐 딱히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게 평범한 사람이거든? 그런데 본인이 그걸 원하잖아. 그러니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거지.”

    “…….”

    “어허!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우리 드라마 망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매형한테 캐묻지 마. 알았어? 내조가 다른 게 내조가 아니야.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게 내조지.”

    “누가 들으면 내가 악처인 줄 알겠다.”

    “알아들었으면 귀담아들어.”

    “예, 분부대로 거행합죠.”

    대답을 하긴 했지만 불만인지 입을 삐죽인 누나의 모습에 피식 웃던 경우는 윤태화 작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 * *

    “윤태화 작가님…… 이라구요?”

    “네. 제가 <태양의 제국>을 쓴 윤태화입니다.”

    경우가 생각했던 윤태화 작가의 이미지는 이랬다.

    태산 같은 풍채, 덥수룩한 수염, 꾹 다문 탓에 자신만의 길을 가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를 가진 50대 이상의 아저씨.

    하지만 실제 본 윤태화는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다.

    일단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거기다 많아 봐야 30대 초반이라 할 만큼 생각보다 젊은 여자였다. 너무 뜻밖이라 경우는 한동안 대답도 못 한 채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안청모 역시 다르지 않았다.

    “민경우 작가님?”

    “아, 죄송합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이해합니다. 저를 본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 그랬거든요.”

    “아, 네.”

    소설 <태양의 제국>.

    크게 보면 2,000년 이후, 태양 그룹을 중심으로 한국의 경제사를 이야기했지만 좀 더 디테일하게 살피면 태양 그룹 자식들의 승계 다툼에 대한 이야기였다.

    태양 그룹의 오너이자 권력의 정점에 선 이 회장, 그리고 그의 세 자식들.

    능력보다는 아버지 백을 믿고 요직을 차지한 자식들은 차기 회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경계한다. 이 회장이 승계를 마무리 짓지 못하는 와중에 쓰러지고 뒤늦게 이 회장의 숨겨진 아들이라며 한 청년이 나타난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그가 이 회장의 친자가 맞음을 확인한 나머지 세 자식들은 가뜩이나 하나뿐인 자리에 경쟁 상대가 또 나타났다는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셋은 새로 생긴 동생을 밀어낼 때까지 동맹하기로 한다.

    하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꾀임에 빠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으니.

    경우가 이 소설을 드라마화하고 싶었던 건 재미도 있었지만 후계자 경쟁을 벌이고 있는 자기 집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것은 비단 새명 그룹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몇몇 설정들을 제외하면 2세, 3세에게 승계를 앞두고 있는 다른 재벌가의 사정과도 비슷했다. 그 때문에 재벌가에서 일했던 이가 대필 작가를 써 쓴 소설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 있는 소설이었다.

    “사람들이 <태양의 제국> 작가를 50대 남자로 추정한다는 것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일정 부분 의도한 것도 사실이구요. 윤태화라는 필명 자체가 돌아가신 아버지 존함이거든요.”

    소설 문체와 작가 사이의 괴리감을 마케팅에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윤태화는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그녀는 작품 이외의 것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비밀 엄수가 첫째 조건이었다.

    확실히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믿기지 않았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됐다.

    “어떻게 그렇게 그룹 사정에 대해서 상세하게 쓸 수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자료 조사를 꽤 많이 했죠. 취재도 많이 했고요. 운이 좋게도 재벌가에서 일한 분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분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녀의 설명에 납득이 됐다. 그러니 그런 디테일한 설정이 가능했을 테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양의 제국>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습니다. 저희와 계약 하시죠?”

    “좋습니다.”

    긍정적인 답변에 안청모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드라마 보면 기획안이라는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드라마로 만들 건지 기획안을 먼저 작성해 주세요. 그게 마음에 들면 그때 계약하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그렇게 윤태화가 돌아가자 안청모가 성을 내며 열변을 토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처음부터 안 된다고 하든지. 기획안이 마음에 들면 계약을 하겠다니? 마음에 안 들면 안 하겠다는 거잖아. 사람을 똥개 훈련 시키는 거야, 뭐야? 처남, 그만둬. 우리 이거 하지 말자.”

    “언제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으면서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작가가 저렇게 막무가낸 줄 몰랐지. 아니, 본인도 작가면서 어떻게 그런 걸 요구할 수 있어? 기획안은 그냥 뚝딱뚝딱 쓰면 나오는 건가?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하면? 그동안 들인 수고는 어쩌라고?”

    단순히 드라마 기획안이라면 모를까 원작 소설이 있는 드라마 기획안은 훨씬 까다로웠다. 거기다 원작이 있다고 해도 엄연한 창작물인데 평가를 받아야 한다니 안청모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안청모와 달리 경우는 의외로 침착했다. 그런 조건을 단 윤태화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드라마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려해야 할 점은 작가의 의도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 점을 종종 망각한 드라마들이 있었다.

    <태양의 제국> 같은 큰 인기를 끈 소설은 기존 소설 팬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시청률을 생각해 그들을 신경 썼다가 배우 캐스팅에서부터 스토리까지 개입하려한 탓에 스토리가 산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한 드라마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려다 기존 소설이 가진 장점을 희석하고 드라마 클리셰를 가득 넣어 작가의 의도를 망쳐 버린 드라마도 여럿 있었다. 당연히 윤태화의 입장에선 자신의 작품이 훼손되는 걸 막고 싶었을 것이다.

    윤태화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던 경우는 그 길로 돌아가 기획안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윤태화의 승낙을 얻어 낼 수 있었으니 생각보다 험난했던 과정을 떠올린 경우는 이 짓도 두 번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 * *

    “그럼 다음 주 토요일 어떻습니까?”

    민지선이 결혼할 때와 다르게 이번 상견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애초 송일 그룹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었으니 호구 조사를 할 것도 없었다. 상견례라기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하듯 그렇게 흘러갔다.

    어느새 부부 동반 골프 약속까지 잡으며 친분을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부모들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질수록 당사자인 최영윤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 갔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자신이 시작한 일이었으나 스스로도 잘하고 있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물기를 닦은 그녀는 거울을 보며 몇 번이나 다짐했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듯싶어 밖으로 나오는데 화장실 앞에 누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우였다.

    “괜찮아요?”

    뜻밖의 상황에 놀란 최영윤이 대답도 못 한 채 그를 보고 서 있었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아서 저 혼자 따라 나왔어요. 많이 안 좋으면 의사를 부를까요?”

    “아, 아니에요.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봐요.”

    경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냥 지나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른 척 외면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보육원 생활을 하며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많이 먹고 자란 탓에 자연히 느껴졌다. 저건 아무리 봐도 결혼을 앞둔 신부가 보일 만한 얼굴이 아니었다.

    물론 그녀의 말처럼 긴장을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말없이 최영윤을 바라보던 경우가 이내 한숨을 내쉬더니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이거 제 명함입니다.”

    “…….”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혹시 하고 싶은 이야기라든가, 털어놓고 싶은 얘기 있으면 하세요.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숙인 경우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가 싶어 뒤늦게 돌아봤지만 경우는 이미 남자 화장실로 사라진 뒤였다. 쫓아 들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가 나오길 기다리는 것도 우스웠다.

    최영윤은 자신의 손에 쥐여 준 경우의 명함을 복잡한 눈빛으로 잠시 바라봤다.

    ‘제까짓 게 알면 뭘 안다고…….’

    명함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려던 그녀는 멈칫했다. 그리고 경우가 사라진 남자 화장실을 잠시 바라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