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82화 (182/250)

#182.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 (5)

안 그래도 요즘 심사가 뒤틀릴 것 같은 박현호는 아침부터 보고 싶지 않은 얼굴과 마주하고 있었다.

“형이 내 방까지는 어쩐 일이야?”

“요즘 회사가 좀 시끄러워야지. 내가 요즘 그거 수습하고 다니느라 발바닥에 땀이 날 지경이야.”

“어쩐지, 평소 운동이랑 담쌓고 사는 형이 요즘 들어 얼굴이 좋아 보인다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네.”

“지금 농담이 나오냐? 내가 좋게 이야기해도 너는 미안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아, 미안. 내가 원래 철이 없잖아.”

“엎드려서 절 받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 얼굴 마주하고 싶지 않는 건 피차간에 마찬가진데 뭐 하러 왔어?”

“노는 건 좋아. 근데 좀 조용히 놀 수 없어? 동네방네 그게 뭐야?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알아?”

“…….”

“집 사 줘, 차 사 줘, 드라마 OST도 일부러 꽂아 준 거라며? 덕분에 드라마도 망하고. 그 여자애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근데 내가 진작 말했잖아, 딴따라랑은 어울리지 말라고.”

“지금 기회다 싶어서 물어뜯고 싶은가 본데, 형은 뭐 달라? 아, 형은 안 들켰나? 형수님은 모르지? 그래도 나는 아직 결혼은 안 했잖아. 근데…… 형은 조심해. 형수, 한 성격 하잖아. 아, 나도 형처럼 딴따라가 아니라 입 무거운 여자 만났어야 했는데.”

“새끼, 하여간 입만 살아서는. 회장님 말씀만 아니면 그래, 나도 여기까지 오고 싶지 않았어. 근데 회장님이 직접 가서 전하라는데 나라고 별수 있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뭐라셨는데?”

“다음 달에 신사옥으로 옮긴다며?”

“…….”

“원래는 신사옥으로 옮기는 때에 맞춰 널 부사장으로 승진시키려 하셨어.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일이 터졌네. 주변 이목도 있는데 밀어붙일 순 없는 일이잖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으신가 봐.”

“그래서?”

“너 대신에 송추환 전무를 앉히겠다고 하시네.”

“형이 밀어붙인 건 아니고?”

“넌 아직도 아버지 모르냐? 내가 밀어붙인다고 해서 아버지가 오케이 하시겠어? 전적으로 아버지 생각이니까 오해하지 마.”

이마에 힘줄이 돋아난 박현호가 형을 째려봤지만,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너나 나나 아버지 눈치 보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건 매한가지야. 안 그래? 그러니까 너도 자중하는 척, 쥐 죽은 듯이 있어. 그래야 다음번 정기 인사 때 기회가 있지 않겠냐?”

“…….”

“더는 아버지 비위 건드리지 마. 아버지 아직 짱짱하시다.”

그렇게 통보를 끝낸 형이 방을 나가자 박현호는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쳤다.

“으아악!”

자리에서 일어선 박현호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방안을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번 일의 배후가 형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자신의 뒤를 캐 터뜨릴 만한 사람, 형 말고는 없었다. 어차피 자기가 어쩌지 못한 채널 DBN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 두기 위해.

형은 아니라고 했지만, 현재 대진일보 송추환 전무는 형의 사람이었다. 자신의 머리 꼭대기 위에 사람을 심어 두고, 이건 대놓고 감시를 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두고 봐, 내가 이대로 무너질 것 같아?”

애초 번지수를 잘못 잡은 박현호는 전의에 불타올라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 * *

연남동의 어느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던 경우는 뒤쪽에서 들리는 대화에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고 말았다.

“스튜디오 글로리……. 뭐 하는 회사야? 들어 봤어?”

“거기 요즘 잘나가는 드라마 제작사잖아.”

“드라마 제작사?”

“<뫼비우스> 몰라?”

“아, 그 드라마 만든 데가 거기야?”

“어. 근데 갑자기 거기는 왜?”

“주식 상장한다고 공모주 청약 날짜가 잡혀서.”

“그래? 그럼 이참에 나도 청약 한번 넣어 봐?”

요즘 어디를 가든 이런 대화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얼마 전, 스튜디오 글로리가 주식시장 입성을 확정하고 본격적인 기업공개 절차에 돌입했다.

스튜디오 글로리라는 이름이 생소한 사람들도 <뷰티풀 라이프>, <다잉 메시지>, <뫼비우스>를 제작한 곳이라고 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대박 난 드라마였으니 특히나 <뷰티풀 라이프>는 미국에서 리메이크가 되어 벌써 시즌 2를 성공시키고 시즌 3의 제작을 확정 지었다.

한국에서도 케이블 드라마의 가능성을 확인할 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원작자인 송지현이 소속되어 있는 것은 물론, 신도현, 김해영, 윤기동 등등 쟁쟁한 작가들까지 포진해 있었다.

그 밖에도 박종연 감독의 영화를 비롯해 제작된 여러 편의 영화 모두 손익분기점을 넘은 상태라 흥행에 실패한 적 없는 흥행 제조기로 통했다. 그런 알짜배기 회사의 주식시장 입성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상장 이후 주가가 상승세를 이어 갈지는 앞으로 제작할 드라마의 성적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으나 일단은 올 상반기 IPO 대어인 것만큼은 확실한 듯 보였다.

자신의 예상보다 좋은 반응에 경우 역시 기대감에 부풀기 시작했다. 자기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있던 그때,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경우를 발견한 안청모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왔다.

“처남!”

“오랜만이에요, 매형. 너무 바쁘셔서 한식구가 됐는데도 일이 아니면 만나기 더 힘들어졌어요.”

“그러게. 근데 나보다 처남이 더 바쁜 거 아냐? 요즘 어디를 가나 스튜디오 글로리 소식이던데? 주식, 그건 어떻게 됐어?”

“안 그래도 금융위원회에 증권신고서 제출했습니다. 1,500만 주 공모로 발행하기로 했거든요. 공모가가―.”

“그렇게 자세히 이야기해 줘도 몰라. 나 주식에 대해선 하나도 모르거든. 어쨌든 잘하고 있는 거지? 그럼 됐어.”

주식 이야기에 물러서는 안청모의 모습에 경우는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았다.

하긴 그 역시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공모주가 뭔지, 공모가는 어쨌는지 알지 못했을 테니까.

“그나저나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에 차기작 생각을 했다는 게 참 용하다, 용해.”

“어쨌든 작가니까요. 그리고 회사가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주식도 오르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 게 바로 참된 경영인의 모습인가? 이럴 때 보면 처남이 지선 씨 동생인 게 실감 나.”

“그거 칭찬이죠?”

“당연하지. 근데 왜 처남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려고 하지?”

“이럴 때 보면 우리 누나도 누나지만 매형도 대단하십니다. 우리 누나가 그렇게 좋아요?”

“뭘 그런 걸 물어.”

쑥스러워하는 안청모의 얼굴로 충분히 대답이 된 경우는 그저 웃고 말았다. 어쨌든 두 사람이 잘사는 것만큼 보기 좋은 건 없으니까.

“근데 작가님이 우리하고 판권 계약을 할까? 보니까 꽤 깐깐한 사람인 것 같은데……. 보통 이런 문제로 만나기 전에 비밀 엄수하기로 약속하고 그러나?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

“글쎄요, 저도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요?”

“굳이 만나자고 한 거 보면 거절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거야 모르죠. 예의 차려 거절하려고 만나자고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건 안 돼! 처남이 재미있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읽어 버렸단 말이야. 거절하면 내가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매달려 사정할 거야. 나, 이 소설 꼭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졌거든.”

그만큼 안청모의 각오는 대단했다.

“그나저나 미국에서 온 이후로 꽤 오랜만에 쓰는 거 아냐? 근데 원작이 있는 소설을 리메이크할 줄은 몰랐네.”

그의 말에 경우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귀국 후 아카데미부터 주식 상장에 이르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거기다 회사에서도 드라마 제작이 밀려 있을 정도로 소속 작가들 또한 열일을 했던 작년이었다.

당연히 대표에 있는 경우 역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아왔다. 덕분에 드라마 집필은커녕 크리에이터로 참여하지도 못했다. 다행히 기성 작가들이 많았으니 경우가 빠져도 한번 자리 잡은 시스템은 잘 굴러갔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으니 그 역시 본업에 충실해야 할 때.

서점에서 우연히 읽게 된 소설에 매료된 그는 이 소설을 드라마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동의를 구하기 위해 안청모에게 추천했는데,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바로 출판사에 연락해 작가와 약속을 잡게 된 게 오늘. 두 사람은 긴장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물론 그가 이 소설을 선택한 건 재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안청모와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카페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카페 안을 살피던 그가 경우 쪽을 보더니, 주저 없이 곧장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마침내 그가 경우 앞에 섰다. 인기척에 경우가 돌아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민경우 작가님?”

의아한 얼굴로 자리에 일어선 경우를 향해 그가 말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윤태화라고 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작가의 정체에 경우는 얼떨떨했다.

* * *

점심 식사를 위해 다들 자리를 비운 사이 김재열 대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신사옥으로 옮기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차피 전문가가 알아서 해 줄 테지만 중요한 건 따로 챙겨야 했기 때문에 틈이 나는 대로 직원들은 필요 없는 짐을 정리하고, 서류를 파쇄하는 등 이사 준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개중에는 그것 때문에 점심도 거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는 아니었다.

박현호의 직속 비서인 김재열은 아까부터 컴퓨터 화면만 바라본 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점심도 거르시더니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이 비서가 관심을 보이자 놀란 김재열 대리는 얼른 화면을 꺼 버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 비서, 식사 맛있게 했어?”

“네. 혹시 몰라 이거 사 왔는데…….”

이 비서가 내민 건 샌드위치.

“고마워, 잘 먹을게.”

“대리님, 근데 어디 편찮으세요? 요즘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여요.”

“괜찮아. 뭐 일이 일이다 보니 그런 거지. 나 신경 쓰지 마.”

“네.”

그렇게 적당히 이 비서의 관심을 돌린 김 대리가 다시 컴퓨터 화면을 켰다. 화면엔 주식시세표가 떠 있었다. 그가 산 주식은 유니언 스튜디오. 드라마 <반란>의 제작을 맡기로 한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그는 당연히 오를 거라 생각해 주식을 매수했다.

처음엔 그의 예상대로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주가가 빠르게 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드라마의 시청률이 떨어지자 주가도 함께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박현호의 스캔들.

사람들이 박현호와 유니언 스튜디오의 관계를 잘 몰랐던 탓에 영향이 없을 줄 알았는데, 박현호가 탈탈 털리는 바람에 유니언 스튜디오의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스캔들이 터지기 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발을 빼기엔 주가가 많이 떨어져 손해였다.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이야!’

사실 그가 김강철에게 박현호의 사생활을 넘긴 게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이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사에 대한 보복 심리였다. 앞에서는 그의 비위를 맞추지만 뒤에선 그의 뒤통수를 치고 있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꼈다.

결국 자신이 벌인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지만 그는 그마저도 박현호 탓을 하고 있었다.

그 탓에 어쩌면 그는 충동에 휩싸여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가뜩이나 떨어진 주식 탓에 스트레스가 쌓여 있던 그는 가지고 있던 돈을 다 털어 다른 곳도 아닌 스튜디오 글로리의 공모주에 청약을 넣었다. 그리고 마침 오늘은 스튜디오 글로리가 코스닥에 상장하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주식 상황을 살펴보고 있던 김 대리는 자꾸만 손에 차는 땀을 닦으며 초조해했다.

보름 전 그가 청약을 넣었던 공모가는 2만 6,000원이었다. 그런데 오늘 코스닥 시장에 입성한 스튜디오 글로리의 시초가는 3만 9,000원,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고 있다는 거였다.

바짝바짝 마른 입술에 자꾸 침을 묻히던 그는 장이 마감할 때까지 화면을 향한 시선을 멈출 수 없었다. 주식시장에 발을 들인 이래로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째깍째깍, 조용한 사무실을 가득 채우는 시계 소리가 자신을 압박하는 것 같아 김 대리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화면을 향한 그의 눈동자가 요동치던 그때, 스튜디오 글로리는 4만 8,0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아 버렸다.

이날 스튜디오 글로리의 시가 총액은 2조 1,600억 원, 유니언 스튜디오의 시가 총액을 압도해 버렸다. 그동안 주식으로 손해 본 것을 회복했다는 기쁨도 잠시, 업계 1위라던 유니언 스튜디오가 후발 주자인 스튜디오 글로리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더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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