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 (4)
“도대체 이게 다 뭔데?”
“뭐긴, 여행 기념품이지. 어때?”
“설마 내 거라고 산 건 아니지?”
“무슨 소리야. 다 네 거지.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골랐는데.”
사이판으로 포상 휴가를 다녀온 형이 내놓은 선물에 신도윤은 그만 어이가 없었다.
“형, 내가 사이판을 사랑하는 줄은 몰랐네.”
모자며, 티셔츠, 심지어 에코백까지 사이판이 도배된 기념품을 자랑스럽게 내미는 형을 보며 그는 결국 웃고 말았다. 사이판에서라면 기분 삼아 하겠지만 한국에서는 절대 하고 다닐 것 같지 않았다. 그나마 티셔츠는 잠옷 대용으로 입는다고 해도 모자랑 에코백은 왜 산 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기뻐하는 형의 모습에 그는 잠자코 있었다.
“참, 가장 중요한 게 빠졌다.”
“또 있어?”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찾는 형의 모습에 신도윤은 이제 뭐가 나와도 놀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이번에 꺼낸 것은 의외의 물건이었으니.
“거북이 목각 인형이네?”
“어, 예쁘지?”
“조그만 게 귀엽다.”
손바닥 위에 들어오는 작은 거북이 목각 인형을 쓰다듬던 신도현은 동생의 손에 꼭 쥐여 줬다.
“스노클링 하는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거북이를 보면 행운이 온대. 그래서 거북이 보려고 한참 물속을 헤맸어. 근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나타나는 거야.”
“그래서 결국 못 봐서 아쉬운 마음에 이거라도 사 온 거야?”
“아니, 내가 누구냐? 의지의 한국인 아니냐? 결국엔 봤다 이거지.”
“잘했네. 앞으로 형 좋은 일, 있으려나 보다.”
“그래서 내가 받아 온 행운 너한테 주려고. 진짜 거북이 보고 받아 온 행운, 그 목각 인형에 고이 넣었으니까 이번 시험 꼭 합격할 거야.”
여행을 가서도 자신을 생각한 형의 모습에 신도윤은 괜히 코끝이 찡했다.
“아, 뭐야. 의사 고시 합격률이 얼만 줄 알아? 90퍼센트가 넘어. 이거 없어도 당연히 붙지. 나 말고 형이 가지고 있어. 그래야 다음 드라마도 잘 써서 대박 나야 할 거 아냐?”
한동안 슬럼프에 빠져 잘 쓰지 못한 자신을 걱정한 동생의 모습에 신도현은 괜히 동생의 등을 두들겼다.
“걱정 마. 형 이제 이런 거 없어도 잘하니까.”
“그래도. 참, 근데 형네 회사 괜찮아?”
“갑자기 우리 회사가 왜?”
“아니,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친구들이 그러더라고. 형 인터뷰했을 때 섬에서 사고 난 거 이야기했잖아. 그거 두고 말이 많더라고.”
“너 그 소문 믿는 거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근데 친구들이 얘기하니까 신경이 조금 쓰이는 거지.”
“하여간 애들이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그런 거 다 헛소리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신경 쓰지 말라 그래.”
“나야, 신경 안 쓰지. 경우 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근데 그런 소문 자꾸 돌면 회사에도 안 좋은 거 아냐?”
“걱정하지 마. 금방 해결될 거야. 뭐 우리 회사는 가만있겠어? 알고 있으니까 너까지 걱정할 거 없어. 그나저나 네 친구가 내가 형인 거 알아?”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자랑했는데. 우리 형 드라마 쓴다, 드라마 작가다, 하도 말해서 이제 걔들이 나보다 형네 회사 소식을 더 잘 알더라니까. 왜?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
“안 되기는. 그냥…… 동생은 의대생인데 형은 대학 문턱도 못 가 봐서……. 네 친구면 다들 공부 잘하는 수재일 거 아냐.”
“뭐래? 원래 나보다 형이 더 똑똑했거든. 형은 대학 못 간 게 아니라 안 간 거잖아. 먹고 사느라, 나 가르치느라 그런 거지. 지금도 형 머리 좋아. 형이 쓴 드라마 보면 뒤통수가 얼마나 얼얼한데. 반전이 좀 매워야 말이지.”
괜히 뿌듯한 마음에 신도현은 동생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자식! 그래도 키운 보람이 있네. 이제 공부해야지. 시험이 한 달도 안 남았다!”
“알았어, 잔소리는. 안 그래도 공부하려고 했다고.”
결국 형에게 등 떠밀린 신도윤은 방으로 들어왔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시험, 다른 일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형이 행운의 거북이까지 사다 줬는데 방심하다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렇게 단단히 마음먹고 책을 펼친 그는 막판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공부하는 동생 뒷바라지를 제대로 못 해 줬단 생각에 신도현은 냉장고부터 열었다. 식재료를 살핀 그는 간식으로 뭘 만들지 고민이었다. 그러다 잠시 딴생각에 빠졌으니 동생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동생 친구들까지 알 정도면 소문이 많이 퍼졌다는 건데 정말 괜찮은 건가 싶었다. 잠시 전화기를 들었던 그는 이내 그만뒀다. 이미 이런 소동이 벌어질 걸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잘 해결되리라는 믿음 덕분이었다.
* * *
점심시간, 피크 타임이라 그런지 식당 안엔 사람들로 가득했다. 손님은 대부분 택시 운전기사, 개중에는 기사 식당이 까다로운 기사들 입맛을 사로잡았다며 맛집으로 떠올라 일부러 찾아온 이들도 있었는데 김봉규가 그랬다.
평소 자주 이용하는 단골 기사 식당에서 밥을 먹던 김봉규는 열심히 밥을 먹으면서도 그 시선은 모서리 상단에 걸려 있는 TV 화면을 향해 있었다.
뉴스에선 한국과 뉴질랜드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는 소식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서 G20 정상회담이 개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때 기사 식당의 문이 열리고 어깨 위로 소복하게 내린 눈을 털어 낸 한 남자가 혼자 앉아 있던 김봉규 앞에 와 자연스럽게 앉았다.
“여기 제육 덮밥 하나요!”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물을 한 잔 따라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남자의 모습을 힐끔 본 김봉규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 보자고 한 거예요?”
“내가 너 보자고 할 일이 뭐겠냐? 아무렴 너 보고 싶어서 밥 먹자고 불렀겠냐?”
“얼마짜린데요?”
“금액부터 부르냐? 무슨 일인지는 안 물어?”
“사람들 뒤나 캐는 찌라시에 기자 정신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거 회사 그만둘 때 버렸습니다. 나한텐 액수가 더 중요해요.”
김봉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이성철이 슬쩍 손가락 몇 개를 펴 보였다.
“얼마 안 되네요.”
“별로 대단한 건 아니 거든.”
“그럼 왜 찌라시로 해요? 그냥 인터넷에 싸질러 버리면 될 걸.”
“출처가 어딘지 알면 안 되거든. 그리고 네 말마따나 뒤가 구린 게 찌라시잖아. 같은 소식도 찌라시에서 나와야 뭔가 더 있을 것 같고 그러잖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손가락 빨고 있을 순 없잖아요. 액수가 양에 안 찬다고 그것도 안 하면 그나마도 없을 건데 내가 그렇게 바보는 아닙니다. 그러니까 얼른 말해 봐요. 뭔데요?”
“너 주식도 좀 하냐? 엔터 쪽에 주식 넣어 둔 거 없지?”
“아, 연예인 뒷얘기구나. 그러니 단가가 그 정도밖에 안 나오지. 왜요? 누가 이혼해요? 아니면 마약이라도 했어요?”
“열애.”
“겨우?”
실망하는 김봉규를 보며 이성철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뒤가 구린 이야기일수록 찌라시를 통해 퍼진다고.”
“단순히 열애로만 끝날 이야기가 아니라 이거죠?”
“그렇지.”
“무슨 일인데 선배가 이러실까?”
자신의 말에 낚인 김봉규가 몸 달아 하는 모습에 피식 웃던 이성철은 자기도 모르게 TV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고개를 돌려 TV 화면을 보는데 연예계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드라마 제작사인 스튜디오 글로리가 인터넷상에 무분별하게 퍼지고 있는 악성 루머에 가능한 한 모든 법적 조처를 할 거라는 소식이었다. 그 뉴스를 잠시 보던 이성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게 어떻게 간을 보는 거야? 밟아 버리겠다는 거지.’
그는 지난번 일식집에서 김강철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박현호 그 인간이 악의적인 소문을 준비하고 있다 이겁니까? 섬을 개발해 이득을 취하려고 섬 배경의 드라마를 일부러 제작했다고요?’
‘네. 섬은 절대 개방하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도 드라마 촬영에 이용할 예정이고요, 외부인 출입도 금지할 건데 개발하느라 공사를 남발해 사고가 났다니요. 너무 터무니없잖아요.’
‘그 인간은 왜 그런답니까?’
‘그쪽이랑 우리랑 얽히고설킨 역사가 좀 있거든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는데요?’
‘왜 알고 있을 것 같아요?’
‘설마 그쪽에도 사람 심어 놨어요?’
돈이면 뭐든 된다고 하더니 경쟁사에 사람까지 심어 두는 그들의 모습에 이성철은 몸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날 걸 알고 있다면 그 전에 막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그러다 이미지 나빠지면 안 좋을 것 같은데?’
‘어차피 소문이라는 게 막을 수 없어요. 대신 사람들 마음속에 두려움을 심어 줄 겁니다. 다신 건들지 못하게 말이죠.’
하필이면 엮여도 이런 무서운 인간들과 엮인 건가 싶은 생각에 이성철은 자신의 신세가 불쌍했다. 하지만 주머니에 쌓이는 돈을 보면 그런 생각도 싹 사라졌으니 그냥 돈이나 벌자 생각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김봉규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찌라시는 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살이 붙어 처음과는 조금 달라질 거라는 것도 모두 계산된 것이었다.
* * *
“오늘은 어떤 재미있는 소식이 날 기쁘게 해 주려나?”
막 출근한 박현호는 노트북이 부팅되는 동안 기대감에 손바닥을 비볐다. 금방 부팅이 끝나자 평소 자주 접속하는 커뮤니티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이게 뭐야?”
분명 스튜디오 글로리와 관련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야 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이번 일을 계기로 망나니 민경우와 얽힌 사건이 하나라도 나올 거라 믿었다. 운이 좋으면 갑질 동영상도 나올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온통 미담뿐이었다.
특히 이번 섬 사고 당사자는 경우 덕분에 VIP 병실에 처음 와 봤다며 인증샷까지 첨부했다. 그 이후로도 이어진 경우의 미담. 재벌이면 무조건 빨아 준다는 댓글도 있었으나 화력은 거의 없었다.
대신 커뮤니티를 장악한 다른 사건이 있었으니 얼마 전 종영한 <페르소나>를 연상하게 하는 이슈, 스폰서에 관한 소문이었다.
분명 처음엔 드라마 제작사 오너가 걸 그룹의 멤버와 열애 중이라는 찌라시였는데 열애설은 사람들을 거쳐 가면서 어느새 스폰서로 바뀌어 있었다.
신기한 건 찌라시엔 이름이나 누군가를 특정하는 단어도 없었는데 댓글엔 박현호와 다프네의 멤버인 주노가 함께 따라다녔다.
“도대체 누구야? 이런 말도 안 되는 걸 누가 퍼다 나르는 거야?”
방 밖까지 박현호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일인가 걱정하는 이 비서를 김 대리가 다독였다.
“괜찮아. 전무님 가끔 저러셔. 내가 좀 이따가 음료라도 가져다드릴 테니까 이 비서는 하던 거마저 해.”
감사의 뜻으로 살짝 고개 숙인 이 비서를 보던 김 대리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바로 그 시각, 김 대리에게서 문자를 받은 김강철이 웃으며 경우에게 말했다.
“엄청 화났다는데?”
“하여간 붕어, 아니면 닭이 분명해. 어차피 건드려 봐야 소용없다는 거 알 텐데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건가?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앞선다, 진짜.”
“걱정하는 놈 얼굴이 그렇냐? 사악한 놈 같으니……. 근데 그 주노라는 여자애 말이야. 괜찮을까?”
“뭐가?”
“아니…… 좀 걱정되잖아.”
이런 일에 휘말리면 어쩌면 방송 생활이 끝날 수도 있다. 두 사람의 신경전에 괜한 피해자가 나오는 건 아닌지 김강철은 그게 걱정이었다.
그러자 경우는 그의 앞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내려놓았다. 모두 박현호와 주노라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미안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요구했대. 박현호가 JT 엔터에 왜 갑자기 투자했겠어?”
“와, 요즘 애들 무섭다, 무섭다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애 아니야. 다 큰 성인이지. 그리고 성인이라면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 거라면……. 근데 나 몰래 이런 건 언제 알아봤냐?”
“바쁜 너한테 이런 일까지 시킬 거 없잖아. 아, 그때 네가 소개해 준 걔한테 시켰는데…… 몰랐어?”
“어. 아무 소리도 안 하더라고.”
“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입도 무겁네. 마음에 들어.”
이 찌라시를 계기로 그동안 쉬쉬하고 있었던 박현호와 유니언 스튜디오의 관계가 드러났다. 덕분에 JT 엔터의 모기업인 스타 엔터는 물론 유니언 스튜디오의 주가가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다프네의 팬들은 주노에게 팀을 위해 탈퇴하라고 요구했다.
대형 스캔들로 연예계가 혼란에 휩싸인 그때 분위기를 전환하듯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 글로리가 주식 상장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을 끝으로 2014년이 가고 2015년이 밝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