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 (3)
한남동의 작은 규모의 일식집.
“갑자기 불러내면 어쩌자는 거예요?”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눌러쓴 대진일보 이성철 기자는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 온 김강철을 향해 다짜고짜 화를 냈다.
“박현호 그 인간이 언제 어디서 나를 감시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이렇게 만나는 거 들키는 날엔 나 모가지 떨어진다고요.”
“그렇게 걱정되는 사람이 못 나오겠다고 하면 되지 뭐하러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나왔습니까?”
정곡을 찔린 그가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에휴, 하여간 그놈의 호기심이 늘 문제야. 서로 몸 사리는 데도 나를 부른 거면 분명 기사 때문일 텐데 기자가 돼서 가만있습니까? 특종을 내고 싶은 건 기자로서 본능이라고요.”
“결국 본인 때문에 나오셔 놓고 왜 화를 냅니까?”
“아니, 내가 화를 내긴 무슨 화를 냈다고…….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일단 그 모자랑 선글라스 좀 벗지 그래요? 이 가게 오늘 전세 내서 다른 사람들 안 나올 텐데요. 아무렴 전세 낸 가게까지 박현호의 눈과 귀가 있겠습니까?”
“정 그러시다면.”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어던진 그가 한결 개운한 얼굴로 물었다.
“이제 됐으니 용건이나 말해 보세요. 무슨 일인데요? 뭐, 혹시 박현호 물 먹일 일인가?”
“약간은?”
“그거 잘됐네. 하여간 재수 없는 그놈 탓에 내가 제명에 못 살 것 같으니까. 뭔데 그래요?”
일단 기자 수첩부터 꺼내 적을 준비부터 한 이 기자를 향해 김강철이 입을 열었다.
“기사는 아니고, 혹시 찌라시 쪽에 아는 사람 있어요?”
“찌라시는 왜요? 뒤 구린 일이라면 별로 가담하고 싶지 않은데…….”
“걱정 마세요.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간 좀 보려고요.”
“엥? 갑자기 간을 본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아해하는 그의 얼굴에 김강철이 살짝 웃었다.
* * *
마담뚜가 약속 장소로 잡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음식 맛이 그저그랬다. 그나저나 맞선 상대가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전공했다고 해서 굳이 맞선 장소를 이런 곳으로 정하는 건 아니지 싶었다. 당연히 호텔 레스토랑이 편했던 그는 이런 곳을 좋아한다는 요즘 여자들의 감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식사를 하던 민준호는 자신의 맞선 상대를 힐끔 봤다.
긴 생머리, 새하얀 피부, 전체적으로 말랐으면서 적당히 굴곡 있는 몸매가 꽤 봐 줄만 했다.
성악을 전공한 동창을 곁에서 지켜봐 온 탓에 그녀 역시 몸집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어느 정도 눈치챌 수 있었다. 이탈리아까지 가서 성악을 전공했다는 건 그녀가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것보다 재벌가 자식으로서 필요했던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어차피 사람들은 이탈리아에 어떤 학교가 있는지 다 알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이탈리아라고 하면 오페라가 시작된 곳이었으니 실력이 있겠거니 하고 연관 지어 생각했을 뿐이었다.
애가 어리다고 하더니 영 사교성도 없고 먼저 만나자고 했던 것치고 생각보다 말이 없어서 호감도가 살짝 떨어진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민준호가 목을 큼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한 여사님 말씀으로는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하던데, 제가 기억력이 안 좋아서요. 혹시 그때가 언제였죠?”
“오빠 인도로 가시기 일 년 전쯤일 거예요. 아, 오빠라고 불러도 돼죠?”
“아, 그럼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자가 오빠라고 하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민준호는 오늘 맞선을 나온 뒤 처음으로 조금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어머니랑 연말 모임에 갔다가 뵀어요. 그때 오빠 와인을 많이 드셨는지 살짝 취해 있어서 아마 기억을 잘 못하실 거예요.”
그녀의 말에 그날의 일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막내 동생이 자신을 제치고 그룹의 후계자가 되었다며 열 받아 했던 장석제를 위로해 주느라 같이 몇 잔 주고받다 보니 취해 버렸다. 그런데 그때 만났다고?
“이렇게 다시 만났을 줄 알았으면 취해 있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혹시 그날 내가 뭐 실수하거나 그런 거 없어요?”
“없었어요. 그냥 연장자로서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 대해 조언 많이 해 주셨죠. 덕분에 제가 더 힘을 낼 수 있었던 거구요. 그래서 오빠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술을 마신 데다가 너무 오래전 일이라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었지만 자신을 향해 웃는 그녀의 모습에 나쁜 일은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소소한 이야기를 더 나눈 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레스토랑 밖으로 나왔다. 민준호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기 위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자리에 오른 그녀가 그를 향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마저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뒤를 받쳐 줄 든든한 처가가 필요했다. 가뜩이나 누나인 민지선이 별 볼일 없는 집에 시집을 갔으니 이참에 자신의 뒷배를 든든히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송일 그룹 정도라면 꽤 괜찮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운전을 하는 내내 말을 고르던 민준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크리스마스에 뭐 해요? 괜찮으면 식사나 할래요?”
“어쩌죠? 그날 저 일이 있는데.”
당연히 된다는 대답을 들을 줄 알았던 그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대답에 크게 실망했다.
“바쁘다니 할 수 없죠.”
“아,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은 그때.
“실은 그날 제가 공연을 하거든요.”
“일이 있다는 게…….”
“네, 예술의 전당에서 제 독창회가 있어요. 처음엔 부끄러웠는데 오빠가 와 주신다면 기쁠 것 같아요.”
“그런 거라면 당연히 가야죠.”
공연까지 한다니 조금 의외긴 했다. 아예 못 들어줄 실력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독주회면 다른 사람이 나오지 않고 오직 그녀만 한다는 건데 그게 상대적으로 비교도 덜 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벌써 다 왔네요.”
“바래다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한 걸요.”
“오랜만에 오빠를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전화해도 되죠?”
“그럼요.”
“그럼, 크리스마스에 뵈요.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땐 말씀 놓으세요.”
“그래요. 아니, 그러자.”
수줍게 미소 지은 그녀가 차에서 내렸다. 자신을 향해 소심하게 손을 흔드는 그녀의 모습에 민준호는 그녀가 완전히 자신에게 푹 빠졌다고 생각했다. 오늘의 맞선은 꽤나 성공적이었다고 확신했다.
민준호의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선 채 지켜보던 최영윤은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그녀는 손으로 자신의 광대를 눌렀다. 억지로 웃고 있었더니 얼굴이 경직될 것만 같았다.
자신을 향해 웃고 있던 민준호를 떠올린 그녀가 이를 갈았다.
‘세상이 다 네 마음대로 되는 것 같지. 그런데 어떡하냐?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가 인도로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았을 땐 하늘이 마침내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되뇌었다.
‘기다려라, 민준호. 당한 만큼 반드시 갚아 줄 테니까.’
* * *
더 퍼스트 밀레니엄 호텔로 향하는 강희주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운전을 하는 내내 경우와 나눴던 전화 통화를 떠올렸다.
‘혹시 목요일 저녁에 시간 돼요?’
‘무슨 일 있어요?’
‘그건 아니고……. 많이 바쁘죠?’
‘그렇죠. 안 그래도 요즘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서 솔직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요. 크리스마스 때 작가님 만나려고 죽기 살기로 일하고 있어요, 지금.’
‘알았어요. 그럼 일해요.’
‘무슨 일 인데요?’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거예요. 신경 쓰지 마요. 그럼 끊습니다.’
사실 그녀는 이미 경우가 왜 전화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는 게 유일한 취미였던 그녀였기에 굳이 경우가 말하지 않아도 그의 신상 정도는 꿰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이번에 젊은 기업가상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새로울 것도 없었다.
우수 기업가상.
미국에서 시작돼 60여개 국 145개 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모범적인 기업가에게 수여하는 이 상은 기업가들의 오스카상이라고도 불렸다.
그런 우수 기업가상에서 경우는 무려 젊은 기업가상을 수상하게 되었으니 그간 드라마 제작사 대표로서 그가 해왔던 일을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경우가 말했던 목요일은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으니 기쁜 날 자신을 만나고 싶어 전화했다는 경우의 말에 기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처음과 달리 점점 자신을 향해 마음을 열어 가는 경우의 모습에 강희주는 기뻤다. 그가 조금 강하게 밀어붙였더라면 없는 시간이라도 냈을 텐데 하여간 사람이 너무 배려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그런 그에게 자신이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도착한 호텔.
될 수 있는 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느라고 예상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걸렸다. 늦지 않았나 걱정하며 시상식 장소로 서둘러 간 강희주는 아직 시상식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본 식은 끝났지만 수상한 한 사람들을 축하하는 공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경우가 어디 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강희주는 멀리 서 있던 경우를 한눈에 알아봤다. 평소라면 입지 않았을 턱시도가 근사하게 잘 어울렸다. 어떻게 놀라게 해 줄까 생각하던 그녀의 얼굴이 굳어진 건 순식간이었다. 경우의 곁에 드레스를 입은 아리따운 여자가 서 있는 걸 본 탓이었다.
그저 단순히 대화만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었는데 이상하게 화가 났다. 특히나 여자가 뭐라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친절하게 답하는 경우의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당장에 쫓아가 뭐 하는 거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순간 떠오른 할머니의 말씀에 그녀는 멈칫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결혼을 왜 하는 거 같아? 공식적으로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니까 건들지 말라고 공표하는 거야.’
‘너 잊었어? 민 작가 보고 와서 좋다고 소개해 달라고 한 건 너야. 먼저 좋아하는 것도 너고.’
‘근데 민 작가 좋게 생각하는 게 너뿐일 것 같아? 남자한테 관심이라고는 없는 네가 유일하게 먼저 관심 보인 사람이야. 그럼 다른 여자들 눈에도 그렇지 않겠어?’
강희주는 그제야 처음으로 할머니의 말뜻을 이해했다. 먼저 좋아했던 것도 저였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뻣뻣했던 경우가 변화된 모습에 만족한다고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불안해하는 것은 자신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더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물러서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서 있던 그때, 마침 경우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발견하고 눈이 커지는 경우의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어리자 불안했던 강희주의 마음도 금세 풀려 버렸다. 경우가 성큼성큼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떻게 왔어요?”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해서 좀 알아봤죠. 이런 일이 있었으면 말을 했어야죠.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네.”
“와 줘서 고마워요. 와, 생각지도 못했는데 오늘 받은 가장 큰 선물인 것 같은데요.”
예상했던 대로 기뻐하는 경우의 모습에 강희주도 덩달아 기뻤다. 서프라이즈는 생각했던 것만큼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녀 마음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