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79화 (179/250)
  • #179.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 (2)

    어느새 연말이 성큼 다가왔다. 거리엔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곳곳엔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왔다.

    마침 분위기를 맞추려는 듯 하늘에선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스테이크를 썰던 민 회장은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다 슬쩍 아내 윤정숙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스테이크 맛, 괜찮지 않아?”

    “이번엔 누구예요? 박 비서? 최 이사? 설마, 손 실장은 아닐 테고.”

    “내가 인터넷 직접 검색해서 찾은 곳이야. 사진 보니까 당신이 좋아할 것 같아서 예약했는데, 왜? 별로야?”

    “당신이 웬일이래요? 뭐…… 나쁘지 않네요.”

    무뚝뚝한 윤정숙이 저 정도면 최대한 표현한 것을 알기에 민 회장은 나름 흡족했다. 딸인 지선의 결혼을 계기로 외국에서 돌아온 윤정숙을 위해 민 회장은 바쁜 와중에도 주말엔 시간을 내려 애썼다.

    될 수 있는 한 함께 저녁을 먹으려 했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려 애썼다. 덕분에 윤정숙이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카라바조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더 좋아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진작 이런 시간을 보냈더라면 좋았을 것을. 민 회장은 결혼 후 처음으로 안정감을 맛보는 중이었다. 주말, 아내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일부러 인터넷을 찾아 맛집을 알아낸 보람이 있었다.

    아내 역시 자신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느낄 무렵, 윤정숙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참, 다음 주 주말쯤 준호 선을 보게 할 생각이에요.”

    “벌써?”

    “벌써라뇨? 다른 사람이 들으면 흉봐요. 지선이만 해도 왜 이렇게 결혼이 늦었냐 얼마나 말들이 많은데요.”

    “남일에 참 관심이 많군.”

    “원래 자기들 이야기보다 남의 이야기하기가 쉽잖아요.”

    “난 자식들한테 결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 이왕이면 본인들 원하는 사람이랑 했으면 싶어.”

    “그래서 정현이를 명하일보 배회장이 애지중지하는 막내딸하고 결혼시킨 거예요? 아님 본인의 경험담 때문인가? 정략 결혼해서 힘들었다는?”

    “여보!”

    “그렇게 발끈할 거 없어요. 사실이 그렇잖아요. 나도 당신이랑 결혼해서 힘들었다는 말 하는 거예요.”

    “……미안하게 생각해.”

    “당신한테 그런 소리도 듣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

    “그래도 난 이왕이면 내 자식들 좋은 집안에서 제대로 교육받고 잘 자란 사람하고 짝지어 주고 싶어요. 사랑해서 한다고 해도 쉽지 않은 게 결혼이에요. 그러니 이왕 결혼하는 거 실속을 차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거구요.”

    “당신 마음이 어떤 건지 모르지 않아. 하지만 무엇보다도 결혼할 당사자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데엔 변함이 없어.”

    “걱정 말아요.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랬다면 지선이 저런 결혼을 하게 놔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 나이 먹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구요. 다 준호가 원해서 하는 거예요.”

    “준호가?”

    “네.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다행히 우리 준호 괜찮다고 하는 집안이 있어서 선보기로 한 거고요.”

    “어느 집인데?”

    “송일 그룹 둘째요.”

    “송일 그룹, 송일 그룹이라……. 아, 그 이태리에서 성악 전공했다는?”

    “네. 당신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요.”

    “작년인가 경제인 모임에 갔다가 최 회장하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지. 어찌나 딸자식 자랑을 하던지 팔불출이 따로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거기 둘째는 우리 준호 짝으론 좀 어리지 않나?”

    “부모가 제 자식 위하는 거야 당연하다지만 아무렴 내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말 나온 김에 선자리 알아보려고 한 여사한테 연락을 했더니 그쪽에서 먼저 그러더라고요. 송일 그룹 둘째가 우리 준호한테 관심이 있다고요.”

    “그쪽에서 먼저?”

    “네. 예전 어떤 모임에서 우리 준호를 좋게 봤다나 봐요. 안 그래도 다리 좀 놔 보려고 했는데 준호가 인도에 가 있었잖아요. 연분이 아니다 생각하고 그 딸도 이탈리아로 유학을 간 거죠.”

    “그런 사연이 있었군.”

    “그러다 다시 우리가 선 이야기를 하니까 그쪽에 물어보더라고요. 마침 졸업하고 완전히 귀국한 모양이에요.”

    “인연이 되려니 그렇게도 되는가 보군.”

    “준호만 괜찮다고 하면 결혼시킬까 해요. 송일 그룹 사모도 우리 갤러리 고객이라 가끔 만나는데 사람이 차분하고 얌전한 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내 생각이 중요한가? 당신 생각이 중요하지.”

    “그렇게 발 빼지 말고 아버지로서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 줘요.”

    “강 건너 불 구경하고 있는 걸로 보여? 박 비서가 그러더라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땐 아내 말을 따르는 편이 좋다고 말이야.”

    “당신 주변에 그렇게 충언을 해 주는 부하 직원이 있는 줄 몰랐네요. 박 비서, 지금 과장이었던가요? 부장으로 승진시켜 줘요.”

    평소 답지 않은 아내의 농담에 윤정숙을 가만히 보던 민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당신, 예전하곤 달라진 것 같아.”

    “갑자기 뭐예요? 괜히 할 말 없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아니. 요즘 내가 어떤 기분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서로 날 세우지 않고 남들 하는 것처럼 이렇게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꿈같아. 당신이랑 이렇게 밥 먹고 자식들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솔직히 좋아. 그래서 그런 생각도 들어. 당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데 나 때문에 그렇게 변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

    어느새 민 회장의 손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준호가 원한다면 결혼시키자고. 그리고 이참에 전무로 승진 시킬까 해. 인도에서 그만큼 고생했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그렇게 해요.”

    “준호까지 결혼하고 나면 경우 하나 남았군.”

    “경우는 놔둬요.”

    “왜? 참,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지?”

    “네, 재경 그룹 손 여사님 외손녀요. 생각보다 오래 잘 만나고 있는 모양이에요.”

    “이러다 우리 쪽 책 잡히는 거 아냐? 결혼 안 시키고 연애만 하게 한다고 그쪽에서 불만이라도 가지면 어떡해?”

    “걱정 말아요. 안하고 버티는 쪽은 그쪽이니까.”

    “왜? 우리 경우가 그 아가씨 짝으로 별론가?”

    “그게 아니라 둘 다 결혼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에요. 속이 타는 건 손 여사님이니까 놔둬요.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그쪽에서 알아서 바람을 넣을 거예요.”

    “그럼 다행이고. 근데 참 의외야. 당신이 처음 경우를 선 자리에 내밀었다고 했을 때 괜한 짓이라 생각했는데 지금껏 잘 만나는 것 보면 말이야.”

    “경우보단 그 아가씨 덕분이죠. 그나저나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뭘.”

    “경우 말이에요. 경우 보면서 당신은 아무 생각 안 들어요?”

    아내가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인지 모르지 않는 민 회장의 얼굴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당신, 아직도 욕심 버리지 않은 건가? 처음엔 준호, 그 다음엔 경우……. 경우가 싫다고 해서 포기한 줄 알았더니.”

    “자식 일에 어쩔 수 없다는 거 나도 잘 알아요. 하지만 당신도 들었을 거 아니에요.”

    “손 실장이 말해 주던가?”

    “네. 그런 거 보면 우리 경우가 경영자로서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았다는 거잖아요. 내 자식이라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 거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받을 정도로 능력 있는 아들이 당신의 뒤를 이어 새명을 이어 나간다면 어떨까? 당신은 생각 안 해 봤어요?”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야. 이미 집 나간 녀석, 아쉬워 할 필요 뭐 있어. 그런 생각은 그만 둬.”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민 회장 역시 경우의 활약을 모르지 않았다. 갈수록 커지는 경우의 회사를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린 그는 만약 경우가 새명을 맡게 된다면 더 성장할 새명의 미래가 자연히 그려졌다.

    지선이도 능력이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경우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던 것들이 있었으니 이왕이면 능력이 있는 놈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어떨까 수도 없이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우가 진정 원하는 일이 뭔지 알기에 아쉬운 마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겪어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야. 그러니 당신도 괜한데 힘 빼지 마.”

    어깨를 으쓱한 윤정숙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요즘 박현호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했던가?

    일제강점기 남녀의 사랑을 그린 <마지막 사랑>이 폭망한 탓에 유니언 스튜디오의 주가가 떨어지고 손해가 극심했다. 덕분에 다시는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고 PPL에 한계가 있는 사극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권창욱 작가의 신작이라는 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약을 해 버린 게 화근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하지만 갈수록 시청률이 떨어졌다. 그 시작점이 자신이 투자한 JT 엔터테인먼트의 걸 그룹 다프네에게 드라마 OST를 부르게 한 지점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닫지 못했다.

    어차피 누군가는 불러야 할 드라마 OST였다. 이왕이면 제 식구나 마찬가지인 다프네가 부르는 게 나쁘지 않다고 가볍게 생각했다. 물론 거기서 그쳤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이후로도 계속 드라마에 개입했다. 과거 <핏빛 와인 잔>에 했던 것처럼 그것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다들 눈치만 볼 뿐, 바른말을 해 줄 사람이 옆에 없는 탓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까지 한 데에는 <페르소나>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같은 MBS, 프라임 시간대인 10시 드라마, 그것도 자신을 거절하고 민경우의 손을 잡은 신도현 작가의 작품.

    신도현이 자신이 아닌 경우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손을 써 가장 핫하다는 수목 시간을 꿰차고 들어갔다.

    하지만 겨우 이런 결과라니…….

    애초 그를 데려왔으면 이번에 이름을 날리는 건 스튜디오 글로리가 아닌 유니언 스튜디오가 되었을 거란 생각에 박현호는 더 배가 아팠다.

    “이 자식은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길래 신도현 하나도 모자라서 서필진까지 빼돌린 거야?”

    애초에 신도현이 그의 것이 아니었고 서필진이 돌아선 것도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경우에 대한 원망만 커져가고 있었다.

    신도현의 인터뷰 기사를 읽던 박현호는 결국 기사 창을 꺼 버렸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경우와 관련된 새로운 소식에 박현호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 * *

    경우와 단둘이 남게 된 김종수는 경우가 꺼낸 말에 놀라고 말았다.

    “주식 상장이라니요……?”

    “처음 제가 왔을 때보다 식구도 늘었고 그 사이 제작한 드라마, 영화도 많잖아요. 이제는 외연을 확장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렇게 갑자기요? 그동안 그런 언질도 없었잖아요?”

    “저도 처음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데요, 그런 제 생각이 회사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작가님이 성장을 막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항간엔 그런 소문도 있더라고요. 스튜디오 글로리가 제 개인 회사라고요. 제가 쓴 드라마 마음대로 제작하고 싶어서 투자한 회사라고요.”

    “말도 안 됩니다. 솔직히 작가님이 회사 발전을 위해 투자하신 돈이 얼만데……. 다른데 투자했더라면 훨씬 더 많은 수익을 올렸을 겁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뿐만이 아니죠. 안 그래도 빡세기로 유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협회의 압박까지 받아 가면서 말이죠. 이제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네. 아무래도 힘이 없어서 말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힘 좀 키워 볼까 싶어서 대표님과 상의 드리려고요.”

    생각을 아예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현실로 닥치자 김종수도 생각이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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