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76화 (176/250)
  • #176. 쟁탈전 (4)

    사고 소식을 들은 김동권은 김은기를 불렀다.

    “어떻게 됐대?”

    “헬기 안에서 응급처치 받고 바로 병원으로 옮겼답니다. 자세한 건 검사를 더 해 봐야 알겠지만 발목 골절 외엔 괜찮은 것 같답니다.”

    “그래도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네. 그래서 지금 병원에 가 보려고?”

    “네. 사람이 다쳤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그래, 그래야지. 아무래도 조연출을 다시 뽑아야겠지?”

    “골절이면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요. 병원에 내일 프로덕션 정명도 대표도 와 있다고 하니까 가서 상의해 봐야죠.”

    “그럼 다녀와.”

    고개를 꾸벅 숙인 김은기가 국장실을 나왔다.

    그나마 이 정도로 끝나길 다행이라 여겼다.

    처음 사고가 났다는 소식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전현우 PD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다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주변에선 잘되는 드라마일수록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고 드라마 대박 나려고 그러는 거라 위로했지만 그런 말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를 희생해서까지 대박을 터트리고 싶진 않았다. 서둘러 병원을 가려는데 순간 뭔가 이상한 예감이라고 해야 하나, 불길한 느낌 같은 게 들었다.

    뭐지 싶은 그때 저 앞에서 한 남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처음 보는데도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얼굴을 반이나 덮은 덥수룩한 수염에 곰 같은 덩치 하며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얼굴까지……. 그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상하게 숨이 막힐 듯 답답함이 느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서서히 좁혀 들고 마침내 서로 스치듯 지나치는 순간, 김은기는 본능적으로 그 남자에게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상대 역시 마찬가지.

    마침내 걸음을 멈춘 김은기가 천천히 돌아봤다.

    성큼성큼 앞을 향해 걷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생각했다.

    낯선 남자에게서 익숙한 향기가 난다고.

    * * *

    “왜 사람을 오라 가라 불러? 귀찮게.”

    국장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권창욱의 모습에 김동권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맞은편으로 갔다.

    “권 작가, 꼴이 그게 뭐야? 통 소식이 없더니 자연인 코스프레라도 한 거야?”

    김동권의 지적에 그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수염 깎기 귀찮아서 놔뒀더니 이렇게 됐네.”

    “사람들이 안 쳐다봐? 누가 신고는 안 했고?”

    “신고?”

    “동물원에서 탈출한 곰이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잡아가라고 신고 안 했느냐 말이야.”

    “지금이 농담할 때야?”

    “농담이라니, 진담인데. 우리 권 작가, 작가 안 했으면 뭐 먹고 살았을까?”

    “뭘 하든 먹고는 살았을 테지. 그보다 귀찮게 왜 오라 가란데?”

    “당신, 잊은 모양인데 아직 계약서에 도장 안 찍었어. 드라마는 방송 타기 시작했는데 계약서에 도장도 안 찍은 사람은 권 작가뿐일 거야, 아마.”

    “크흠, 구두 계약도 엄연한 계약인데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아니면 우편으로 보낸다거나. 꼭 이렇게 사람을 오라 가라 해야 하냐고?”

    “어. 그래야 이렇게 한 번씩 바람도 쐬지. 그렇게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으면 몸에서 쉰내 나.”

    김동권의 말에 권창욱이 자신의 몸에서 냄새가 나는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다 자신이 한 짓이 민망했는지 멋쩍은 그가 김동권을 보며 괜히 성을 냈다.

    “냄새가 나긴 무슨 냄새가 난다고 그래?”

    “그래도 신경이 쓰이긴 하는 모양이네. 이왕 나온 거 이발소라도 가서 당장에 그 수염부터 밀어. 돈 벌어서 뭐 하냐?

    “남이야 수염을 밀든 말든. 계약서나 빨리 줘 봐.”

    한숨을 내쉰 김동권이 계약서를 들이밀었다. 이미 전화로 들었던 내용과 비교해 보며 생각보다 꼼꼼히 살피는 권창욱의 모습에 슬쩍 눈치를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근데 황성준 PD랑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다른 PD들이 하자고 할 때도 꼼짝 안 하더니 황 PD가 뭐라고 했길래 같이 드라마를 하냔 말이야.”

    “글쎄…… 별말 안 했는데?.”

    “그럼 어쩌다 같이 일하게 됐는데?”

    “그냥 시기가 맞았던 거지. 내가 예전에 어떤 놈한테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드라마 쓰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거든. 그걸 들었는지 전화해서 이번에 같이하자고 애걸복걸하잖아. 그래서 하게 된 거지.”

    “그 정도나 됐으니까 자네가 움직였지 안 그랬으면 이번 드라마, 시작도 못 했을 수도 있었겠네?”

    “아니라곤 못 하겠어.”

    웬만해선 곁을 내주지 않은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황성준과 함께 일하게 됐다는 사실에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던 김동권은 다소 안심했으니.

    권창욱이 사인을 마친 계약서를 다시 꼼꼼히 살핀 김동권은 오랜만에 만난 김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 * *

    경우의 외가인 유진 그룹 산하 종합병원에 입원한 전현우는 침대에 앉은 채로 병실을 둘러봤다. 병원에 입원한 것 자체가 처음이기도 했고, 특히나 이렇게 넓은 1인실은 처음이었으니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가 싶은 걱정이 앞섰다.

    “저기, 작가님. 병실이 너무 넓은 거 같은…… 데요?”

    “제가 죄송해서 그러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히 쉬세요.”

    “네? 작가님이 죄송하긴 왜……?”

    “실은 전망대 공사 마무리가 조금 덜 된 상태였는데 촬영 날짜가 급하게 바뀐 거였거든요. 막을 수 있는 사고였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엄밀히 따지면 몸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제 잘못이죠. 그러지 마세요, 작가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왕 쉬게 된 거 몇 가지 검사도 받고 그러세요.”

    몸 둘 바를 몰라 머리를 긁적이는 전현우를 보며 내일 프로덕션 대표 정명도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 전 PD. 이참에 검사도 받고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기 민 작가가 병원비까지 다 내주겠대잖아.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어. 전 PD가 부럽긴 또 처음이네.”

    “아, 대표님!”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괜찮다니까.”

    “네, 대표님 말씀이 맞습니다. PD님은 그냥 마음 편히 쉬시면 됩니다.”

    “참, 현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저 때문에 촬영 딜레이되고 그런 건…….”

    드라마 촬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시간 엄수. 시간이 늘어나면 제작 비용도 늘어나니 혹시라도 자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지 못해 제작비가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전현우는 자신의 부러진 다리보다도 그게 더 걱정되었다.

    “하여간 여기서도 일이지?”

    “헬기 타고 온 뒤 곧바로 수습해 촬영했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다행이다. 그럼 조연출은 다시 뽑아야겠죠……?”

    <페르소나> 대본도 재미있었고 함께 일하게 된 사람들도 다 좋았던 터라 일하는 게 즐거웠던 전현우는 이런 드라마에 자신이 빠지게 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의지만으로 안 된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그는 더는 드라마에 폐를 끼칠 순 없단 생각에 아쉬움을 삼켰다.

    “네. 안 그래도 여기 대표님도 오셨고 조금 있다가 김은기 PD님도 오시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그 문제를 의논드릴 참이었어요.”

    경우의 말에 정명도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럼 저 대신 들어갈 사람을 추천해도 될까요?”

    전현우의 말에 경우가 미소 지었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후, <페르소나>가 마침내 첫 방송을 시작했다.

    * * *

    “태종상 영화제 여우 주연상은 <길 위의 방랑자>의 윤혜성 씨! 축하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은 윤혜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 주변에 앉은 사람들은 울먹이는 그녀를 다독이며 무대로 나가도록 도왔다. 조명이 쏟아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윤혜성이 천천히 무대 위로 올랐다. 마침내 트로피를 거머쥔 그녀가 수상 소감을 전하기 시작했다.

    “어, 제가 받을 줄 몰랐는데…… 정말 영광입니다. 영화를 찍으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좋은 감독님, 좋은 스탭분들, 좋은 동료와 함께 일하게 되어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찍으면서 같이 고생한 <길 위의 방랑자> 식구들과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눈물을 훔치면서도 미소 지은 윤혜성이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 윤혜성의 모습이 TV 화면 속 장면으로 디졸브되었다. 천천히 카메라가 줌아웃 되면서 거실의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드레스는 물론이고 윤혜성이 소중하게 받아 든 트로피 역시 소파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태풍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듯 집안은 온통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커다란 거실 창 앞에 윤혜성이 서 있었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 반짝이는 야경에 감탄한 법도 하건만 윤혜성의 얼굴엔 어쩐지 공허함만 가득했다.

    잠시 후, 휴대폰을 꺼내든 그녀가 문제 메시지를 확인했다.

    ‘당신들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죽어서도…….’

    근심 가득 문자 메시지를 보던 윤혜성은 전화를 든 손을 힘없이 아래로 내렸다. 한숨을 내쉰 그녀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바로 그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벨소리에 흠칫 놀란 그녀가 천천히 전화기를 드는데 발신자를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긴장되는 마음으로 집에서 <페르소나> 첫 방송을 지켜본 후 다음 날 스튜디오 글로리로 출근한 신도현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일찍 나오셨네요.”

    “아, 작가님. 안녕하세요.”

    “근데 얼굴이 왜 그래요? 혹시 어제 첫 방 때문에 잠 잘 못 잤어요?”

    “그게 아니라…… 제가 너무 기대했던 모양이에요. 생각보다 시청률이 잘 안 나왔거든요.”

    “얼마나 나왔는데요?”

    “……11퍼센트요.”

    “예? 작가님, 너무 욕심이 많은 거 아니에요? 그 정도면 꽤 잘 나온 거예요.”

    “그렇긴 한데…… 전 더 나올 줄 알았거든요.”

    갈수록 드라마 시청률이 낮아지는 추세긴 했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지난번 경우와 함께한 <뫼비우스>의 첫 방 시청률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었다.

    신도현은 다른 것보다도 혹시나 <뫼비우스>의 시청률이 잘 나온 이유가 자신 때문이 아닌 경우 덕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이자 존경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경우는 뛰어넘고 싶은 상대이기도 했다. 그러니 시청률이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알지 못한 경우가 해맑게 말했다.

    “월요일이라 그럴 거예요. 원래 월요일엔 시청률이 조금 안 나오잖아요. 시청자 반응도 좋던데요, 뭘. 내일은 분명 더 잘 나올 테니까 기대해 보세요.”

    “그럴…… 까요?”

    “당연하죠. 작가님은 작가님만이 할 수 있는 기발함이 있잖아요. 제가 그걸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저, 저를요?”

    “네. 흉내 내고 싶은데 안 되더라구요. 저는 철저히 시청자 취향 생각해서 쓰는 편이거든요. 여기서 이게 나오면 사람들이 좋아하겠다, 그렇게요. 덕분에 시청률이 잘 나오긴 하는데 돌아서면 기억에 남는 건 없잖아요. 근데 작가님은 저랑은 다르죠.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잖아요. 아주 좋은 쪽으로. 그래서 시청자들이 작가님 드라마에 매력을 느끼는 거구요. 오래 지나 다시 생각나게 만들고 곱씹게 하죠.”

    자신은 질투만 했는데 그런 경우가 자신을 인정해 주자 신도현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생각해 보니 늘 그랬다. 경우는 어떤 상황에서도 늘 자신을 지지해 줬고 믿어 줬다. 드라마가 잘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해결책을 찾도록 도와줬다.

    “작가님은 늘 좋은 말씀만 해 주시네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겁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분위기가 훈훈해질 무렵 모기범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지금 내일 프로덕션에서 OST 녹음한 파일 보내왔는데요?”

    “그럼 들어 봐야죠.”

    경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신도현은 함께 모기범의 뒤를 따랐다.

    “아, 혹시 그 기사 보였어요? <반란> OST요.”

    “아니요? 왜요? 무슨 문제 있어요?”

    경우의 물음에 모기범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걸그룹 다프네가 부르기로 했거든요. 이미 녹음도 끝났고 곧 발매한다던데요.”

    모기범의 말에 경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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