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75화 (175/250)
  • #175. 쟁탈전 (3)

    “박 씨, 여기 타카 좀 쏴야 하지 않아?”

    “잠깐만 기다려.”

    김은기가 말했던 자리에 어느새 데크가 깔린 전망대가 생겼다. 잠시 짬이 생긴 김 씨가 주변을 둘러보다 감탄하며 말했다.

    “그나저나 돈이 얼마나 많길래 이런 데다 별장을 짓냐? 누구는 이렇게 경치 좋은 데 와서도 일만 하는데 누구는 팔자도 좋네……. 에이씨, 부럽게.”

    “김 씨 몰랐어? 개인 별장이 아니라 드라마 찍는다던데?”

    “드라마? 이런 섬에서 무슨 드라마?”

    “섬에서 드라마 찍지 말란 법 있어? 그러니 바람 불고 태풍 올지도 모르는 데다 저렇게 컨테이너로 집을 짓지. 아무렴 돈도 많은 부자가 이렇게 급하게 지을라고.”

    “하긴. 어쩐지 급하게 짓더라니. 근데 무슨 드라만데?”

    “왜? 드라마 찍는다니까 없던 관심이 생겨?”

    “애들한테 말은 해 줘야 할 거 아냐? 니들 아빠가 이렇게 고생해서 돈 벌고 있다, 하고 말이야.”

    “하여간……. 그러니까 자식들한테 꼰대 소리를 듣는 거야.”

    “뭐?”

    “됐고. 타카 박아야 할 곳이 어디라고?”

    “이쪽.”

    김 씨가 가리킨 곳에 타카를 쏘던 박 씨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필이면 심이 다 떨어졌네.”

    “전쟁터 나가는 군인이 총알을 빠뜨리고 오면 어떡해?”

    “차에 실어 놓고 배 타기 전에 깜빡 놓고 왔어. 어쩌지?”

    “어쩌긴, 다음에 올 때 해야지. 관광지도 아니고 촬영한다며? 그 전까지 해 놓으면 될 거 아냐. 아무렴 애들도 아니고 이런 데 매달리기야 하려고. 참, 우리 내일은 어디 작업하기로 했지?”

    “과천.”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려면 마무리 짓자고. 늦기 전에 뭍으로 나가야 할 거 아냐?”

    “그래, 그러자고.”

    시계를 보던 인부들은 별일 있겠나 하고 미완인 채로 일을 마무리했다.

    * * *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테이블 위에 세팅해 놓은 안청모가 시계를 봤다. 10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드디어 MBS 수목 드라마 <반란>이 첫 방송되는 날이었으니 일찌감치 소파에 앉은 그는 드라마가 시작되길 초조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권창욱 작가의 드라마라는 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MBS 드라마국 국장 자리를 놓고 겨루는 자리다 보니 더 관심이 쏠리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드라마국 국장이라는 자리가 드라마 하나를 놓고 결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 드라마로 향방이 바뀔 수 있는 만큼 그 역시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김은기를 두고 국장에 앉아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긴 했으나 그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드라마를 정말 좋아하는 김은기 같은 사람이야 말로 국장 자리에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다만 <페르소나>보다 한 달가량 먼저 방송이 시작된 터라 이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초조해졌다.

    회사 일로 바빠 이제 퇴근한 민지선이 씻고 거실로 나왔다.

    “이게 다 뭐예요?”

    “늦게 퇴근한다길래 저녁 부실하게 먹었을까 봐 사 왔어요. 지난번에 가로수길 갔을 때 카페에서 먹었던 치즈케이크요.”

    “어쩜, 거기 맛있어했던 걸 또 기억했어요?”

    “그럼요. 지선 씨가 좋아하는 건데 기억해야죠.”

    “나 이러다가 살찔 것 같아요. 아, 근데 너무 맛있어.”

    “자기는 살 좀 쪄야 해요.”

    “나중에 나 살 쪘다고 구박하기 없기.”

    “구박이라니요. 이렇게 예쁜데.”

    활짝 웃는 지선의 얼굴에 그는 이게 바로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때 마침 <반란>의 오프닝이 시작되고 있었으니.

    “아, 저 드라마가 지난번에 말했던 그 드라마예요?”

    “네.”

    “참 신기하네.”

    “뭐가요?”

    “그때 자기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 유학파라고. 유학파가 사극 연출을 한다는 게 조금 생소하게 느껴져서요. 아닌가? 내가 이상한 건가? 하긴, 사극이나 현대극이나 어차피 드라마인 건 다 똑같은데 왜 그런 생각을 했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잖아요. 그러니까 이상한 건 아니죠. 이제 시작하네요.”

    드라마가 시작되자 그는 무섭게 집중했다.

    일하는 남자는 멋있다고 그런 안청모의 모습에 아내 민지선이 미소 지었다.

    * * *

    드라마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김동권이 TV를 껐다. 국장실에 함께 드라마를 보던 경우에게 물었다.

    “어때?”

    “솔직히 좋은데요. 그런 말 있잖아요. 명불허전.”

    “그래서? 자신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글쎄요.”

    생각했던 것보다 <반란>의 1화는 꽤 진한 여운을 남겼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지으며 삼시 세끼 등 따시고 배부르게 먹는 게 소원인 평범한 길동은 어느 날 새로 부임한 군수의 횡포로 아버지를 잃는다.

    군수를 죽이겠다며 달려들지만 결국 붙잡힌 길동은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 대신 서낭나무에 묶이는 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역시 사람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무서운 형벌이었으니 동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딱하게 여겼다. 그러나 누구든지 길동을 돕는 사람이 있으면 똑같은 벌을 내리겠다는 엄포에 아무도 길동을 돕지 못한다.

    뜨거운 뙤약볕에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해 정신이 혼미해지는 그때 하늘이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이고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그러고는 쏟아지는 빗줄기.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마신 길동은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마침내 미친 듯이 빗물을 받아먹는다. 자신의 몸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느낀 그는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줄을 끊어 내고 양반과 상놈을 가른 세상을 향해 복수를 다짐한다.

    방송이 끝난 뒤 시청자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경우는 즉시 휴대폰을 꺼내 커뮤니티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생각은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역 누구임? 연기력 쩜

    ―이목찬이라고 떠오르는 아역 스타. 광고도 여럿 찍었음

    └ 무슨 광고? 난 왜 처음 봤지?

    └ 스타 플래닛!

    └ 헐, 걔가 걔라고?

    ―연기도 좋았지만 스토리가 괜찮았음.

    ―나 연산군 나오길래 인터넷 뒤졌네. 홍길동이 실존 인물이라니…… 대박!

    ―근데 작가가 권창욱이라 안 했음? 원래 스타일이 이럼? 마지막에 저건 그냥 판타진데?

    └ 걱정 마세요. 그게 권창욱 작가 스타일입니다. 저런 현실 불가능한 설정 하나쯤 넣고 가는 게 포인트죠.

    └ 마자마자, 인정. 고증 쩌니까 무거워질까 봐 일부러 저런 요소 하나 넣는 걸로 알고 있음.

    ―맨날 로맨스만 보다가 이거 보니까 10년 묵은 채증이 내려간다

    └ 채증이 아니라 ‘체증’

    ―시청률 30퍼센트 가자!

    댓글을 읽던 경우에게 김동권이 말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이 어딨겠어. 어쨌든 <반란>도 우리 MBS 드라만데, 안 그래?”

    “무슨 뜻인지 압니다. 국장님이시니 한쪽 편만 들 수 없다 이거지요? 걱정 마세요. 국장님 대신해 제가 서포트 확실히 할 테니까요.”

    “그래, 경우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참, 내일부터 섬 촬영이라고 했지?”

    “네. 세트장 촬영 어느 정도 했으니까 그동안 못했던 야외 촬영 싹 해야죠.”

    “너도 가냐?”

    “아니요. 전 서울에서 대기 타고 있어야죠. 저까지 섬에 들어갔다가 무슨 일 생기면 안 되잖아요.”

    “드라마 촬영하는데 무슨 일 생길게 있나?”

    “사람일이라는 게 모르는 거잖아요.”

    “하긴. 그럼 난 한 PD 격려나 해 주러 가야겠네. 지금 속 타는 건 아마 김은기보다 한 PD일 테니까.”

    두 사람이 국장실로 나올 무렵 <페르소나> 팀은 섬에서의 촬영 탓에 장비를 챙기느라 야단법석이었다. 웬만한 장비들은 이미 섬으로 보내 놓은 상황이었으나 덜 챙긴 것들까지 해서 오늘 출발을 해야 했다. 내일부터 촬영을 하려면 미리 준비가 끝나 있어야 했으니.

    무인도에서의 촬영에 설레는 이들도 있는가 하면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연출을 맡은 전현우 PD가 그랬다. 지난번 답사를 위해 섬에 갔다가 고생한 기억이 떠오른 그는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먹는 멀미약은 물론이고 귀 밑에 붙이는 것까지.

    하지만 그 같은 노력이 모두 헛수고였으니 섬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위액까지 모두 토해 내야 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 아니요, 사실 안 괜찮은 것 같아요.”

    “조금 누워 있어. 촬영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 있으니까.”

    “죄송해요.”

    “죄송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한진명은 괜찮다고 했지만 누워 있는 전현우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연출을 맡은 PD는 주로 배우들의 연기 디렉팅만을 신경 썼다. 촬영 중 가장 중요한 건 배우들의 연기였으니까. 그러니 촬영 전 모든 준비는 조연출인 자신이 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하다니……. 바늘 침대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견디다 못한 전현우가 가지고 온 약을 더 챙겨 먹고 결국 밖으로 나갔다.

    “괜찮냐?”

    “왜 벌써 나오고 그래?”

    “애냐? 뱃멀미를 하게?”

    파리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전현우에게 다들 한마디 씩 건넸다. 그런 이들에게 일일이 인사하려니 더 죽을 맛이었다. 메스꺼운 것만 좋아지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그래도 누워 있는 것보다 돌아다니면 금방 회복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나저나 뱃멀미라니…….

    그가 배를 탄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대학 다닐 때 괜한 감상에 젖어 목포까지 버스를 타고 단 뒤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아무렇지도 않았건만. 그래서 지난번 무인도에 올 때 뱃멀미를 한 게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그날만 그랬던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약까지 먹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도 이러는 것 보면 지난번보다 상태가 더 심각한 것 같았다.

    어쨌든 이리 저리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던 그는 순간 몸이 휘청이는 것 같았다.

    “아, 어지러워. 약을 너무 많이 먹었나?”

    울렁거림은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이젠 어지러웠으니 이러다 현장에 방해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때 마침 눈에 보이는 전망대.

    별장 앞 마당을 배경으로 촬영이 준비되고 있었으니 전망대에서 쉬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바다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크게 하자 조금은 괜찮아진 것도 같았다.

    몸을 돌려 난간에 기댄 채 촬영 준비를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잘 돌아가는 현장을 보며 코를 훌쩍이던 그는 어디선가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약 기운 탓인지 소리에 반응하는 게 느렸던 그는 무슨 일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마무리가 덜된 전망대 난간이 뜯어지면서 그 너머로 몸이 기울고 말았다.

    “으악!”

    “현우야!”

    * * *

    “으으으.”

    “전현우, 정신 차려!”

    다행히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발목을 부여잡은 채 전현우는 고통을 삼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발목을 심하게 다친 것 같아요.”

    누군가의 말에 한진명은 전현우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아악!”

    비명에 가까운 소리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들것이라도 가져와야지. 참, 우리 타고 들어온 배는 어쨌지?”

    “죄송해요. 이런 일 있을 줄 모르고…… 아까 선장님이 바다에 던져 놓은 그물 거둬 오셔야 한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거든요.”

    “뭐? 지금 인천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40분은 걸릴 텐데…….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항구에 전화 좀 해 봐. 출발 가능한 배, 아무거나 빨리 보내 달라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필이면 배가 없었다. 이런 것도 예상했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진명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았다.

    바로 그때!

    “PD님 전화 좀 받아 보세요.”

    “누군데?”

    “민경우 작가님이요.”

    그새 누가 서울까지 전화를 한 건지 순간 욱하고 화가 올라왔지만 간신히 화를 가라앉힌 한진명은 전화를 받았다. 괜한 걱정을 끼치게 한 건 아닌가 싶었는데 경우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금방 출발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그러더니 전화가 끊어졌다.

    아니, 이 와중에 뭘 기다리라는 건지 초조한 그때 임시찬 촬영 감독이 한진명의 어깨를 짚었다.

    “걱정하지 말고 민 작가가 하자는 대로 해. 일단 전 PD 좀 옮기고.”

    태연한 임시찬의 모습에 한진명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쨌든 조금 더 편한 장소로 전현우를 조심히 옮기느라 진땀을 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디선가 두두두두두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모자가 날아갈까 꽉 붙잡고 있던 막내 스텝 하나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어? 저기 보세요. 헬기 떴어요.”

    설마 저 헬기가 이쪽으로 올까 싶었던 사람들의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주변을 돌며 적당한 착륙 장소를 찾던 헬기가 마침내 땅에 닿았다.

    헬기의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가장 먼저 뛰어나왔다. 태양을 등지고 뛰어오는 바람에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들 누굴까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내 얼굴이 드러났으니 바로 경우였다.

    한진명은 달려오는 경우를 보며 재난이 일어난 현장에 사람들을 구하러 나타난 드라마 속 주인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