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쟁탈전 (2)
황성준은 조카인 황현석을 앞세워 대형 마트 안을 휩쓸고 있는 중이었다.
“야, 현석아. 너는 루테인 좀 찾아봐라. 난 홍삼을 찾을 테니까.”
“갑자기 그건 왜요?”
“작가님 작업실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 있냐? 요즘 다들 눈 건강 생각해 루테인 먹는다며? 그러니 챙겨야지.”
“삼촌은 다른 작가님 작업실 갈 때는 그냥 가시면서.”
“그거야…….”
조카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황성준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동안 내가 괜히 그랬겠냐? 그게 다 작가들 취향에 맞춘 거라고. 성의 표시를 보이는 걸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어떤 작가는 어차피 자기 취향도 아닌 거 뭐 하러 가지고 오냐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어.”
“아, 그럼 그래서 삼촌이……?”
“그래. 아무렴 내가 작가들한테 돈 쓰기 아까워서 그랬겠냐? 이까짓 거 얼마나 한다고. 그러니까 너도 이런 건 좀 배워. 어차피 이 바닥도 인맥이 절반이야. 그러니 평소에 작가들 성향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고. 알았냐?”
“네. 권 작가님은 이런 선물 받는 거 좋아하시는 분인가 봐요.”
“솔직히 권 작가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지, 진짜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 나도 권 작가랑 일해 보는 건 처음이거든. 그래서 무난한 선물 좀 사 가려는 거야. 원래 남자 나이 50이 넘으면 건강 챙기기 마련이거든.”
“삼촌은 50이 안 넘었어도 건강 챙기시잖아요.”
“너 지금 아군이나 적군이냐?”
“죄송합니다.”
“이게 다 너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창욱 작간데 잘 보여야 할 거 아냐?”
“에이,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랬다고 저 때문이 아니라 삼촌 때문이잖아요. 국장 자리 놓고 김 PD랑 다투느라 그런 거 제가 모를 줄 알아요?”
“국장 되면 나만 좋냐? 너도 좋지.”
“뭐, 그건 인정합니다. 그나저나 김 PD 많이 컸네요. 따까리 하던 놈이 언감생심 국장이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김동권이 그 자식 때문에 우리가 뭔 꼴이냐? 그러니 권 작가한테 잘 보여야 한다 이 말이야. 권 작가한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어요.”
“알겠습니다. 루테인 좋은 걸로 골라 올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러더니 횅하니 사라졌다. 얼마 안 있어 종류별로 루테인을 골라 온 조카의 모습에 황성준은 이마를 짚었다. 그중 알아서 적당히 골라 오면 될 것을.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선물을 챙겨 들고 권창욱의 작업실로 향했다.
보통의 작가들이 방송국과 가까운 여의도나 상암동에 작업실을 두는 것과 달리 권창욱은 경치 좋은 가평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앞에는 호수가 있고 뒤에는 산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끝내주게 좋은 경치에 황현석이 감탄하며 입을 열었다.
“이런 데 살면 없던 아이디어도 나오겠어요.”
“그럼 너도 이쪽으로 이사 오지 그러냐?”
“글만 쓰면 이런 곳에서 살죠. 근데 제가 작가는 아니잖아요. 현장도 다녀야 하는데 이런 시골은 좀…….”
“하여간 말이나 못 하면.”
조카의 모습을 어이없게 보던 그는 종이에 적힌 주소와 동일한 어느 전원주택 앞에 섰다. 그리고는 이내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MBS 황성준이라고 합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잠시 후 대문이 철컥하고 열렸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권창욱은 다른 작가들에 비해 소문이 무성한 작가였다.
그는 단 한 번도 대본 리딩이나 제작 발표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어도 언론 인터뷰를 한 적도 없었다.
겨우 한다는 게 서면 인터뷰가 전부. 그런 그를 두고 과거가 켕기는 탓에 은둔 생활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퍼지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 탓에 황성준 역시 권창욱을 만나는 게 조금은 겁이 날 정도였다.
사실 그가 권 작가를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다 보니 아는 작가를 통해 권창욱이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리에 전화로 애걸복걸한 게 전부였다.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게 어떻게 보면 기적이라 생각될 정도.
대본만 보내오고 대본 리딩조차 참석하지 않는 통에 그를 만날 기회조차 없었던 두 사람은 어쨌든 첫 촬영을 앞두고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눈치 없는 조카는 차치하고서라도 황성준은 어쩐지 조금 떨렸다.
너른 정원을 지나 마침내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젊고 밝은 아우라를 풍기는 미남자가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아, 작가님 처음 뵙겠습니다. 황성준이라고 합니다.”
“황현석입니다.”
“아…… 저는 보조 작간데요.”
“네?”
“선생님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어쩐지 생각보다 젊다 했다. 긴장한 탓에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던 황성준은 그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넓은 거실 창 앞에 둔 커다란 테이블, 한 남자가 키보드를 느리게 탁탁탁 치고 있었다.
“선생님, 손님 오셨는데요.”
그러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권창욱과 눈이 마주친 황성준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 * *
별장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멋들어진 외관과 달리 내부는 아무것도 없는 탓이었다. 꼭 필요한 싱크대나 화장실만 있을 뿐 거실은 휑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이들에게 경우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기간이 촉박해서 안까지 꾸미진 못했네요. 어차피 실내는 세트장에서 촬영할 거라 외관만 먼저 신경을 쓴 거거든요. 그래도 전기 사용 가능하고 물도 나오니까 하룻밤 묵는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확실히 텐트 치고 야영을 할 거라 생각했으니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날씨도 쌀쌀한데 이런 날 야영이라도 했다간 감기 걸리기 십상이었다.
뱃멀미로 고생했던 촬영 감독 임시찬은 물론이고 조연출을 맡은 내일 프로덕션 소속 전현우 PD를 남겨 둔 채 다른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섬을 살폈다.
신도현은 섬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카메라에 담았다. 물론 그의 옆에는 한진명이 있었으니 두 사람은 드라마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생각보다 잘 맞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경우는 그의 옆을 따라 걷고 있는 김은기에게 물었다.
“혹시 촬영에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 보완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나보다 저 두 사람의 의견을 들으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의견을 보태 본다면 저쪽에 전망대를 설치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전망대요?”
“네, 아까 보니까 저쪽이 거의 낭떠러지더라구요. 드라마 속 첫 번째 희생자가 혼자서 일출을 보러 나왔다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전망대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요.”
“아, 난간이 있는 곳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진 않을 테니까요?”
“네, 그 아래쪽이 마침 대나무 숲이 있으니 시체가 가려지기에도 안성맞춤일 거구요. 그리고 이런 섬에 전망대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김은기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 경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섬 이곳저곳을 돌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권창욱 작가님은 어떤 분이세요? 예전에도 다작을 하신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더 뜸하잖아요.”
“그렇죠. 조금은 완벽주의? 아시잖아요, 자료 조사 철저하기로 유명하신 거.”
“아, 저 이번에 쓰신 드라마 시놉시스 봤어요. 완전 책 한 권 수준이던데요? 아니지, 한 권도 더 넘죠?”
“그게 그나마 적은 편입니다”
“예?”
김은기의 말에 경우가 놀랐다. 보통 작가들이 쓰는 시놉시스의 양을 몇 배나 능가하는 엄청난 분량인 탓이었다. 등장인물 소개가 상세하게 되어 있는 건 물론이고 회별 줄거리가 거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는데 그게 적은 편이었다니.
“예전에 권창욱 작가님이 <응급실>이라는 드라마를 쓰셨거든요.”
“알아요. 저도 재미있게 봤는걸요.”
“그때 B팀 연출을 맡은 게 김동권 국장님이세요.”
“아, 그래요? 몰랐어요.”
“보통 작가들도 현장을 잘 안 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본 수정을 한다거나 이렇게 촬영 답사를 오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근데 권 작가님은 그런 게 다 소용없죠.”
“하긴 그렇게 자세히 시놉시스를 쓰는 걸 보면 자료 조사를 엄청 꼼꼼하게 했다는 건데 굳이 나올 필요 없을 것 같긴 하네요.”
“맞습니다.”
“되게 포스 있고 그런 분이실 것 같은데…… 한번 뵙고 싶네요.”
“글쎄요,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작가님이 두문불출하는 건 솔직히 다른 이유도 있거든요.”
의미심장하게 웃는 김은기의 모습에 경우는 의아했다. 뭔가 더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물으려던 순간 순식간에 어두워진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
“근데 어째 하늘이 흐리네요. 비 소식은 없다고 들었는데.”
“원래 섬 날씨가 그렇잖아요. 해 떴다가도 금방 비 오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그러나? 꼭 드라마 시작이랑 비슷한 것 같아 으스스하네요.”
아닌 게 아니라 아까보다 바람이 훨씬 매서워졌다. 그 바람에 생각보다 빨리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이더니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죠.”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자 섬을 탐방하던 이들은 별장 안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 * *
권창욱을 처음 본 황성준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작가님, 처음 뵙겠습니다. 황성준이라고 합니다.”
“황현석이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콧수염은 물론이고 구레나룻까지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하며 운동을 했는지 떡 벌어진 어깨가 마치 드라마 속 산적의 모습은 연상케 했다.
‘그러고 보니 수염만 없으면 딱 김은기 같네. 하필이면 닮아도 왜 그 자식을 닮아? 찝찝하게.’
먼 친척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던 황성준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본격적인 이야기에 돌입했다.
“캐스팅엔 일절 관여하지 않으시겠다고 해서 저희가 최대한 등장인물에 맞는 사람들로 캐스팅했는데 명단은 받아 보셨습니까?”
“네, 봤습니다.”
“이번 캐스팅 중에서 가장 잘한 게 연산군 역의 유재성 씨라 생각됩니다. 이전 드라마 <타인의 시선>에서 했던 연쇄 살인마 역할이 이번 드라마로 이어지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 드라마 <반란>은 연산군 시절 실존했던 인물이자 허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의 모티브가 된 홍길동의 이야기를 담은 퓨전 사극이었다.
사실 권창욱은 의학 드라마, 법정 드라마, 수사 드라마 등등 주로 전문직 주인공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써 왔다. 하지만 그가 진짜 쓰고 싶었던 건 사극.
최근 사극 드라마는 가상의 세계를 기반으로 신분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있는 남녀 주인공의 애절한 로맨스가 주로 제작되는 바람에 예전 같은 정통 사극을 찾아보기 힘들어진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번 드라마 <반란>이 정통 사극은 아니었지만 고증 철저한 권창욱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벌써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실제로 대본 리딩 때 다들 대박이 날 거라며 입을 모았으니 황성준 입장에선 어떻게든 이 드라마를 좀 더 잘 이끌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혹시 캐스팅된 배우들 중 마음에 안 들거나 이미지에 안 맞는다고 생각되는 사람 있으면 말씀하세요. 아직 촬영 들어가기 전이니 충분히 교체 가능합니다.”
“뭐, 됐습니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셨을려고요. 그대로 가시죠.”
“그래도 드라마 집필을 하신 작가님 의견을 아예 못 들어서 저희가 좀―.”
“내가 괜찮다잖아요.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마세요. 저 그런 거 딱 질색입니다. 귀찮은 건 더 싫고요. 아시겠습니까?”
작가들 까칠한 거야 익히 겪어 봐서 알고 있었으나 권창욱의 모습은 솔직히 의외였다. 완벽주의, 디테일의 끝판왕이란 그가 이런 모습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사실 그는 지독한 귀차니스트였다. 대본 리딩이나 제작 발표회, 언론 인터뷰를 하지 않은 건 다 그의 귀찮아하는 성격 탓이었다. 그나마 드라마 쓰는 일에는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지만 촬영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란 생각에 미온적이었다.
이미 같이 일해 본 사람들은 알고 있었으나 처음이었던 황성준은 그런 그의 성향을 알지 못한 탓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우리가 이 바닥에서 하루 이틀 일하나요? 그만한 실력이면 됩니다. 뭐, 예술 할 것도 아니고 어차피 드라마는 대본발인데 대본만 좋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러니까 대본대로만 하세요, 대본대로.”
단호한 그의 태도에 결국 황성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