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73화 (173/250)
  • #173. 쟁탈전 (1)

    “그쪽으로 사람을 보냈으면 하는데요.”

    경우는 한창 통화 중이었다.

    “네, 두 분 모두 보살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이왕이면 이쪽 일에 베테랑인 한국 사람이었으면 더 좋구요. ……그럼요. 필요한 건 없는지 잘 살펴 달라고 해 주세요. 그리고…… 이런 부탁을 해서 미안합니다, 서 실장님.”

    아무래도 미국에 가 있는 이세길과 그의 아내가 걱정된 경우는 그 두 사람을 돌봐 줄 사람을 찾아 달라고 서필진에게 부탁을 한 참이었다.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뉴욕에 있는 사람에게 메릴랜드 주에 있는 사람을 부탁하기 미안했지만 달리 대안이 없었다. 다행히 서필진은 흔쾌히 경우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경우는 소파에 앉아 있는 김종수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신경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작가님.”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그동안 너무 바쁘다고 잊고 있었어요. 이 부장님이나 대표님께 제가 죄송하죠. 거기다 저희 형 때문에 이 부장님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까 봐 그게 걱정이에요.”

    “그점에 대해서도 너무 걱정 말아요. 지금 세길이 그놈, 제수씨 말곤 다른 거 신경 쓸 겨를이 없거든요. 그나저나 거기까지 갔으니 차도가 있어야 할 텐데요.”

    “그렇게 되길 빌어야죠.”

    두 사람은 이세길의 아내가 쾌차하길 간절히 바랐다.

    어쨌든 세무조사 결과, 탈세로 인해 가산세가 부가되기는 했지만 경우가 빠르게 처리한 뒤, 언론 보도 자료를 돌린 덕분에 회사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물론 감사팀 이경표 부장의 횡령 혐의는 회사 안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쉬쉬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이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각심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마침 김종수에게 결재받을 일이 있어 그의 방을 찾았던 모기범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얼마 전 이세길과 있었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세길이 미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 모기범은 공항으로 그를 배웅 나갔다.

    그래도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일을 가르쳐 준 어떻게 보면 그에겐 아버지나 큰형 같은 존재였으니 인사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모기범의 손을 이세길이 쓰다듬었다.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그동안 죄송했어요. 사모님이 그렇게 많이 편찮으신 줄 몰랐어요. 금방 일어나실 거라 생각했는데…….’

    ‘병이라는 게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 버릴 수도 있고, 하룻밤 사이에 급속도로 나빠질 수도 있어.’

    ‘부장님 건강도 좀 챙기세요. 그 사이 얼굴이 많이 까칠해지셨어요.’

    모기범의 말에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던 이세길이 가방을 열어 봉투 하나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언제 또 볼지 몰라서…… 너한테 주는 선물.’

    ‘저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

    ‘괜찮으니까 받아.’

    열어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돈이었다.

    ‘부장님! 아니, 이게, 무슨, 저 이거 못 받아요. 아니, 안 받을래요. 가뜩이나 미국은 병원비가 장난 아니라는데, 받을 수 없어요.’

    ‘괜찮으니까 받아. 이거 안 받으면 나 다시는 안 볼 거라는 걸로 생각할 테니까.’

    ‘부장님…….’

    ‘다행히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병원비 걱정은 없어. 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받아. 너한테 뭘 줄까 하다가 이게 가장 필요할 것 같아서.’

    ‘…….’

    ‘기범아. 내가 널 막내 동생처럼 아꼈다.’

    ‘알아요.’

    ‘그래서 더 챙겨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 미안해.’

    ‘부장님이 미안하긴 뭐가 미안하다고 그러세요? 그리고 지금 부장님이 저 신경 쓰실 때에요?’

    ‘내가 그동안 몰라도 너무 몰랐네. 주변에 이렇게 좋은 사람이 많았는데 한동안 원망만 했어. 그래서 집사람이 대신 벌받는 건지도 모르지.’

    ‘그런 말씀 마세요.’

    ‘기범아, 너는 그렇게 되지 마. 나나 이 부장처럼 그렇게 되지 마라. 살다 보면 힘든 순간도 있을 테고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강요받을 수도 있을 거야. 그럴 땐 오늘을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회사 돈 횡령하는 사람이랑 부장님 비교하는 건 좀 아니죠!’

    ‘그러지 마. 이 부장도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겠어? 남들이야 자식 교육 때문에 미국 유학 보낸 줄 알지만 그거 아냐. 사실 이 부장 아들이 ADHD인가? 그거래. 정도가 심해서 학교 다니기가 힘든가 봐. 그러니 유학을 갈 수밖에 없었던 거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근데 말이 쉽지, 유학 학비 대기가 쉬워? 가뜩이나 애들 돌본다고 아내까지 다 나간 마당에 혼자서 뒷바라지 하기 힘들었을 거야. 그래서 결국 잘못된 유혹에 빠진 거고. 시작이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은 쉽거든. 그렇게 괴물이 되는 거다.’

    ‘…….’

    ‘차마 그런 사람을 내 손으로 잡아넣을 순 없었다. 아니다, 이것도 그냥 나 편하자고 하는 변명이야. 그러니까 기범아, 너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마. 시작도 하지 말고, 그런 쪽으론 생각도 마. 알았어?’

    ‘……네. 알겠어요.’

    겨우 대답을 했지만 모기범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 역시 그런 유혹에 빠질 뻔했으니까.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그날의 일이 떠오른 모기범은 결재는 나중에 받자며 돌아섰다. 이런 얼굴로 두 사람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탓이었다.

    * * *

    “수건 챙겼고 속옷 챙겼고 여분의 옷도 챙겼고…… 또 뭐 챙기지?”

    어딘지 모르게 들뜬 형의 모습에 신도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형, 분명 일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나 일하러 가.”

    “근데 지금 완전 놀러 가는 것 같거든.”

    “무슨 소리야. 그냥…… 장소가 장소다 보니 뭐 설레기도 하고 또 내가 언제 섬에 가 보겠어. 그것도 무인도라는데.”

    “그럼 잠은 어디서 자?”

    “텐트치고 자지. PD님이 텐트 집에 있다고 나보고는 그냥 몸만 오면 된다고 그러시네.”

    “그런데서 드라마를 찍는다고? 아무것도 없는데? 전기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다 알아서 하시겠지. 드라마 하루 이틀 찍겠냐? 의사 선생님은 공부나 하세요.”

    “아니, 내 말은…… 걱정되니까 그러지. 그냥 섬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무인도야?”

    “생각해 봐. 사람 사는 섬이면 촬영한다고 외지인들 들락거리는데 섬 사람들이 편하겠냐? 그러니까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찍는 거지.”

    “그런가?”

    “걱정할 거 없대두 그러네. 어차피 실내 촬영은 세트장에서 찍을 거고, 야외 촬영만 하는 건데. 그럴 듯하게 세트 지어서 하면 돼.

    “촬영도 촬영인데 나는 지금 형이 더 걱정되거든? 집, 회사 말고는 어딜 간 적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섬을 간다니까 그러잖아.”

    “대본 쓰는데 적어도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냐. 사진으로 보는 것도 한계가 있어요.”

    “그래, 그렇기야 하지. 가지 말라고 말릴 수도 없고……. 해지면 절대 물 가까이 가지 마. 잘 알지도 모르면서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내가 애냐? 형 걱정 말고 너나 공부 열심히 해. 재수는 없어. 단박에 붙어야 하는 거야. 알지?”

    신도현의 동생 신도윤은 의사 국가고시를 앞두고 공부하는 중이었다.

    “알았어, 하여간 잔소리는. 근데 형, 세면도구만 챙길 게 아니라 노트북도 챙겨야지.”

    “아, 맞다! 노트북!”

    “쯧쯧쯧. 근데 무인도면 전기도 안 들어오는 거 아냐? 노트북 가지고 갔다가 써 보지도 못하고 도로 가지고 나오면 재밌겠다. 그럼 완전 짐이잖아.”

    “아니, 이 녀석이! 그럼 노트북 가지고 가지 말까?”

    해맑게 미소 짓는 형의 모습에 신도윤은 어이없이 웃고 말았다.

    “농담이야, 농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그래도 노트북은 챙겨야지. 구경 잘하고 와서 내가 이야기해 줄 테니까 넌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알았지? 참, 섬이라 휴대폰 안 터질 수도 있으니까 연락 기다리지 말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생각해. 괜히 공부하는데 방해된다.”

    “공부는 내가 전문이거든. 걱정 말고 잘 다녀오셔.”

    “알았다. 너 시험 합격하고 나 드라마 끝나면 우리도 같이 여행가자. 우리 여행 가 본 적 없잖아.”

    형의 말에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사는 게 바빠서 여행 한 번 한 적 없는 형제는 이제야 남들 평범하게 누리는 것들을 할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알았어. 여행 가자. 이왕 가는 거 재밌게 잘 놀다 와.”

    “놀기는. 일하러 가는 거라니까 그러네.”

    “일은 핑계고 보나 마나 해 떨어지기 전부터 술판일 걸. 안 봐도 뻔하지.”

    동생의 잔소리를 뒤로 하고 신도현은 곧장 인천항으로 향했다.

    인천항으로 향하는 그의 기분은 남달랐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 윤혜성의 추모식을 가기 위해 그녀의 지인들이 이런 곳을 지나 인천항으로 가겠구나 싶었다.

    물론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전혀 상관없이 신도현의 마음은 어릴 때 학교 소풍을 가는 것처럼 설렜다는 게 문제였지만.

    다행히 늦지 않게 항에 도착한 그는 처음 느껴보는 바다향과 항구의 부산스러움을 몸소 경험하고 있었다. 그는 인천항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글을 쓰기 위해 인터넷으로 자료를 수집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으니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페르소나>는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그러니 드라마 집필은 물론이고 나중에 촬영을 위해서라도 사전 답사는 필수였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무인도가 여럿 있었으니 거기서 그중 하나에서 촬영을 하기로 사전에 허가를 받아 둔 상태였다.

    “신 작가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신도현이 돌아봤다. 그러자 작은 낚시배에 탄 경우가 신도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서둘러 그곳으로 간 그가 배에 올랐다.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에 탑승한 상태였다. 다들 하품을 하는 등 피곤한 기색이었기에 혼자만 들떠 있었던 신도현은 괜히 머쓱해졌다.

    “제가 좀 늦었죠?”

    “아니에요. 시간 맞춰 오셨는데요, 뭘. 이제 다 왔으니 출발할까요?”

    경우의 말에 배가 출발했다.

    그렇게 40여 분 달린 끝에 어느 작은 섬에 도착했다. 배가 작은 탓에 흔들림이 심했던 터라 사람들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드디어 땅을 밟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서둘러 배에서 내린 이들은 생각보다 음침한 섬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드라마에 꼭 맞는 분위기였다. 정말이지 뭐라도 일어날 법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작가님, 이게 다 뭐죠? 분명 무인도라고 들었는데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촬영을 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시놉 보고 준비를 좀 해 봤는데, 어때요? 드라마 속에 나오는 별장 같이 보이나요?”

    분명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그런데 섬의 한 가운데 별장이 하나 떡하니 세워져 있었으니 김은기는 물론이고 한진명까지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 신도현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작가님,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오셨어요? 어떻게 제가 상상하던 별장 모습, 그대로인데요?”

    “다행이네요. 겉보기엔 그럴 듯해도 사실 저거 컨테이너예요. 컨테이너를 이용해 외장재로 꾸며서 그럴 듯하게 만든 거거든요. 좀 더 제대로 짓고 싶었는데 기간이 짧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직 완성된 게 아니니까 의견 있으시면 말씀만 하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다 완성된 듯 굉장히 그럴 듯했다. 신도현은 물론이고 한진명도 어떻게 촬영을 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그중 그나마 이성적이었던 김은기가 경우에게 물었다.

    “근데 여기 무인도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무인도에다 저런 거 막 지어도 괜찮을까요? 그런 것도 허가를 내주나 보죠?”

    “아, 아무래도 이것저것 해야 할 게 많아서 그냥 사 버렸어요.”

    “예? 사요? 뭘?”

    “이 섬이요. 앞으로도 섬에서 촬영할 일이 있을 때 이용하면 좋잖아요. 하다못해 저희 회사 사람들 워크숍 해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이제 들어가 보죠.”

    김은기는 입을 벌린 채 앞장서서 걷는 경우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아무래도 MBS 드라마국 국장보다는 스튜디오 글로리가 더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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