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왕관의 무게 (7)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살짝 고개를 숙인 의사가 옆을 비껴가자 이세길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는 멈춰 선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음의 준비? 지금 마음의 준비라고 했어? 당신 의사 맞아? 수술만 하면 된다고 했던 건 당신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마음의 준비? 의사가 돼서 그렇게 말하면 그만이야? 어떻게 해서든 살려 내야지.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면 그만이냐고!”
“진정하세요, 보호자분. 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옆에서 간호사가 말렸다. 그 바람에 의사의 멱살을 잡던 이세길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의사는 신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막 입원했을 때는 증상이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는 아내의 모습에 이세길은 그만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담백하게 말한 의사가 결국 그를 내버려 둔 채 자리를 떠났다. 그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서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간암으로 알고 있었다. 수술만 하면 건강을 되찾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막상 수술을 위해 복부를 열어 봤을 땐 상황은 훨씬 심각했다. 간이 문제가 아니라 췌장이 문제였다.
겨우 수술을 마쳤지만 그 이후 아내의 상태는 급속도로 나빠졌다.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그는 매일 괴로워했다. 그런 그를 찾아온 건 경우의 형인 민준호였다.
언론을 통해 그를 본 적은 있었지만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던 이세길은 그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의아했다. 그저 빨리 아내 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한 민준호의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미국에 있는 존스 홉킨스 병원에 앤디 핸더슨이라는 의사를 아십니까?”
“갑자기 찾아와서 그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췌장암의 권위자라고 하더군요.”
“……!”
“아내분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지금 뭐 하자는 수작입니까? 그건 또 어떻게 알았는데요?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돌아가세요!”
화가 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상관없다는 듯 민준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돕고 싶어서요. 어쩌다 보니 사모님의 병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명한 의사는 스케줄이 꽉 차 있을 테죠. 그렇지만 제가 손을 쓰면 진료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핸더슨 박사에게 사모님을 보이면 어떨까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낫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이세길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별 거 없습니다. 스튜디오 글로리를 흔들었으면 싶거든요.”
그도 재벌가 자식들이 후계 자리를 다투느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민경우는 후계 경쟁에서 빠지기로 했다고 들었으니 굳이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 민 작가 형 아닙니까? 동생한테 굳이 그런─.”
“남의 가정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있으신가 봅니다?”
“…….”
“어차피 남 일이잖아요. 내가 내 동생한테 뭘 하든 신경 쓰지 마세요. 지금은 사모님의 건강을 되찾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맞았다. 남의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자신의 아내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회사를 흔들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네. 그 정도면 됩니다. 직원들의 생계 문제도 있는데 동생 버릇 좀 들이겠다고 회사 문 닫게 할 순 없잖아요. 대신 제대로 흔들어 주세요. 제 동생의 정신이 번쩍 들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존스 홉킨스 병원에 제가 연락해 놓겠습니다. 물론 치료비 걱정도 하실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세운 회사였다. 민준호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 대가로 아내만 살릴 수 있다면,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뭐든 해 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내를 홀로 병원에 내버려 둔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퇴사한 뒤 처음으로 회사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다행히 업무가 많아 집에서도 일하기 위해 지정해 둔 고정 아이피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
퇴사하기 직전, 의심스러웠던 정황이 포착되었으나 상황이 상황이었던 터라 그냥 넘어가 버린 게 있었다. 이세길은 가장 먼저 그 부분은 살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회사 내부에서 돈을 가장 많이 굴리는 건 제작부였다. 배우 캐스팅 문제로 출연료 협상을 했던 것도 그였고, 드라마 예산을 짜는 것도, 촬영에 필요한 돈을 지급하는 것도 모두 그가 하던 일이었다.
그런 일을 몇십 년 간 해 온 그였으니 당연히 드라마 한 편 제작하는데 무슨 돈이 어디에 얼마나 들어가는지 빠삭했다. 마음 먹고 들여다본 결과, 감사팀 이경표 부장이 회사 돈을 빼돌리고 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그밖에 없었다.
해서 그는 곧장 이경표 부장을 찾았다.
“이세길 부장님, 오랜만이에요. 갑자기 회사 그만두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내 건강 문제로 그가 회사를 그만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대표인 김종수와 경우, 그리고 그를 대신해 제작부를 맡게 된 모기범까지 이렇게 셋이었다.
“그래, 이 부장. 작별 인사도 못 하고 갔지.”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감회가 새롭네요. 저 처음 부장 달았을 때 같은 이 씨에 같은 부장이라고 이 부장 형제라고 그러셨잖아요. 근데 갑자기 퇴사하셔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참, 지금은 뭐 하고 계신 거예요? 어디 좋은 자리로 옮기신 거예요?”
“그보다 자네한테 할 말이 있어.”
“할 말이요? 뭔데요?”
“자네, 아직도 회사 돈에 손 대고 있나?”
웃던 이경표의 얼굴이 삽시에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평정심을 찾은 그가 표정을 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회사 돈에 왜─.”
“변명을 듣자는 게 아니야. 어차피 회사도 나왔는데 내가 무슨 상관이 있겠어.”
“도대체 저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데요?”
“국세청에 고발할 생각이거든. 그러게 세금은 손대지 말지 그랬어. 그랬다면 이 부장을 건드리는 일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정말 고발하실 생각이세요?”
“그래. 걱정 마. 자네가 아니라 스튜디오 글로리를 고발할 거거든. 탈세 혐의로. 근데 어차피 내가 고발하면 자네 잘못이 드러나게 되겠지. 회사에 회계사는 자네 한 명이잖아. 안 그래? 좋든 싫든 자네가 일의 중심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
“그쪽으론 내가 자네만큼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아예 무지렁이는 아니야. 뭐가 어떻게 된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고. 그래도 그간의 정을 생각해 이 부장에게 미리 말해 주는 거야. 기회가 있을 때 도망쳐.”
“어째서…… 부장님이 왜 이러시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자네한테 이해를 구하자는 게 아니야. 이유 같은 건 중요하지도 않고.”
“부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어떻게든 원상 복구 시킬 테니까─.”
“내 말 뭘로 들었어! 이제 자네 손을 떠난 거야. 자네가 뭘 하든 말든 상관없다고.”
“그렇게 되면 회사에 큰 지장이 생길 겁니다.”
“돈 빼돌릴 때도 그런 생각 했던가? 이제 와서 회사 생각하는 척하는 거 우습지 않아? 잘 생각해. 자네한텐 마지막 기회야.”
그렇게 이세길이 돌아갔다. 이경표는 얼이 빠진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작가실에 돌릴 간식을 사러 왔던 신도현이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으니.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대충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것 같았다.
아쉽게도 국세청에 신고하겠다는 이세길의 말을 듣지 못했던 탓에 신도현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 그 탓에 이 일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래도록 망설였다.
“제가 조금만 제대로 알아들었더라면 회사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작가님이 말씀하셨더라도 어차피 세무조사는 피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도요. 뭐든 했을 텐데…….”
“그 일 때문에 드라마 집필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죠?”
“그게…….”
“무엇보다 일이 우선이죠. 이제부턴 저한테 맡겨 놓으세요. 그리고 드라마에만 집중하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이 일에 이세길이 있음을 알게 된 경우는 이 모든 사실을 김종수와 상의했다.
* * *
비행기로 환자를 이송하는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준비 기간만 해도 열흘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내일이면 드디어 미국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이세길은 기분이 이상했다.
기대감 반, 두려움 반이었다. 부디 그곳에선 조금의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평안하게 잠든 아내를 바라보며 그는 기도했다. 부디 이번 여행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올 수 있기를.
그런 그를 김종수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수씨는 좀 어때?”
“왔으면 용건이나 말하세요. 괜한 거 묻지 말고.”
“정말 자네가 그랬어? 국세청에 고발한 사람.”
“다 알고 왔으면서 뭘 물어요. 맞아요, 내가 그랬어요.”
“이 사람아!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나도 몰라요. 그냥 나 살자고 그랬어요. 남의 집안 문제, 형제 다툼, 나도 그런 거 신경 쓰고 싶지 않다구요! 그런데 어쩌라고요? 집사람이 저렇게 죽어 가는데, 그래서 내가 죽을 것 같은데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이세길의 절규 어린 말에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경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일에 또 형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별일 없이 잠잠하던 차라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보고받는 걸 미뤘더니 그새 이런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경우는 병원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형, 어디야? 내가 지금 그리로 갈게.”
* * *
전화를 끊은 민준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의 방을 나간 그는 비서를 포함해 부하 직원들에게 퇴근할 것을 권했다. 그런 다음 다시 자리로 돌아온 그는 손님 맞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가자 마침내 경우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왔어? 앉아.”
“형, 도대체 뭐 하는 수작인데?”
“오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게 뭐야? 일단 진정해. 커피 줄까? 아님 차?”
“말 돌리지 말고! 언제는 미안했다며? 이제 잘 지내보자며? 근데 지금 뭐 하는 짓인데? 이게 미안한 사람이 하는 짓이야?”
“내가 뭘 어쨌는데?”
“형!”
“탈세한 거 너한테 미리 알리지 않아서? 그럼 횡령하는 놈이 있다고 너한테 친절하게 알려 줬어야 했나? 그랬으면 넌 어떻게 했을 거 같아? 조용히 처리했겠지. 그 이 부장이라는 놈, 퇴직 처분하고 그냥 그대로 덮어 줬을 거야. 아냐?”
“…….”
“뭐,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이 부장이 도망쳐서 좀 안타깝긴 했어. 그놈 손목에 쇠고랑 차는 거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어떻게 하나같이 그렇게 정에 약한 건지.”
“그래서 아픈 사람 잡고 협박했어? 뭐가 됐든 좋으니까 나 물 먹이라고 했냐고?”
“아니. 난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고 사람만 믿는 것 같아서 세상이 어떤 건지 가르쳐 주고 싶었을 뿐이야. 어차피 그 사람도 내 덕분에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됐는데 도대체 여기 어디에 네가 화낼 포인트가 있는지 난 모르겠다.”
“…….”
경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형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회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도 자신이었고 이세길의 아내가 어느 정도 아픈 건지 챙기지 못한 것도 자신이었다. 형이 말을 하면 할수록 경우는 자신의 부족한 점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경우야. 형이니까 이런 말하는 건데, 세상살이가 그렇게 만만치 않아. 특히나 다른 사람들 위에 있는 사람은 말이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경계하고 긴장을 놓쳐선 안 돼. 그래야 아랫사람이 딴 생각을 못 하지. 안 그래?”
정말 그런 걸까?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걸까? 이경표가 그렇게 됐던 건 결국 나 때문이었을까?
잠시 생각에 빠졌던 경우는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바람에 민준호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하마터면 형이 하는 개소리가 맞는 소리라고 착각할 뻔했네.”
“뭐?”
“근데, 난 형이 아니야. 형이랑 다르거든. 어쨌든 조언 고마워. 덕분에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는데 이번에 해결했으니 전화위복으로 삼지 뭐. 근데, 난 형처럼은 안 할래. 그러니까 다시는 내가 하는 일에 끼어들지 마.”
경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미련 없이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