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71화 (171/250)
  • #171. 왕관의 무게 (6)

    “저…… 작가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오랜 고민 끝에 모기범은 마침내 경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긴장되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은 모기범은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제가 괜한 오지랖인지도 모르겠는데요, 사실 며칠 전에 신 작가님하고 이 부장님하고 같이 있는 걸 봤거든요.”

    “신 작가님하고 이 부장님…… 이요?”

    “네, 그때가 하필이면 세무조사가 있기 직전이라…….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그…… 이번 세무조사가 이 부장님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솔직히 이 부장님, 그때부터 지금까지 출근 안 하고 계시잖아요.”

    “…….”

    “물론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까 괜히 걱정이 돼서요. 그렇다고 신 작가님을 의심한다거나 그렇다기보다 혼자만 알고 넘어가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

    잔뜩 굳어진 경우의 얼굴에 모기범은 괜한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금세 표정을 바꾼 경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 문제라면 걱정 마세요. 신 작가 고료 때문에 제가 세금 상담 좀 해 달라고 한 거거든요.”

    “아, 세금. 그렇죠. 신 작가님 정도 되면 아무래도 세금 문제가 있겠군요. 세금…….”

    어두웠던 모기범의 얼굴이 서서히 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괜한 의심을 한 건가 싶어 부끄러워졌다.

    “제가 괜한 오지랖을 떨었네요.”

    “이게 다 회사가 걱정되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래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앞으로도 혹시나 이상한 점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씀해 주세요. 이번은 별일 아니었지만 다음은 그렇지 않을 수 있잖아요?”

    “알겠습니다, 작가님.”

    그렇게 모기범이 나가자 경우는 미간에 주름이 졌다.

    사실 방금 건 그가 그냥 한 소리였다.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있는 말, 없는 말 보탤 수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신 작가가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렇지만 별일 아닌 일로 괜한 오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특히나 신 작가가 그런 사람도 아니었고.

    그런데 신 작가는 왜 하필 그때 이 부장을 만났던 거였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경우가 밖으로 나갔다.

    차를 몰고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새명 유통.

    경우는 곧장 민지선의 사무실로 쳐들어갔다. 막 통화를 끝낸 민지선이 경우의 얼굴을 보자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김강철 과장, 내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남매가 아무런 말도 없이 서로의 눈치만 살피던 중 마침내 김강철이 들어왔다.

    “어떻게 됐어?”

    “그게…… 벌써 해외로 나간 것 같습니다.”

    김강철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예 작정을 했구만. 간도 크지. 우리가 가만 안 있을 거란 생각은 못 하나?”

    “이 부장이 그럴 줄 몰랐어.”

    “그럼 이제 스튜디오 글로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혹시 회사 문 닫는 건…….”

    “그건 아냐!”

    “회사 문 닫기가 그렇게 쉽냐?”

    성난 두 사람의 대답에 김강철은 그만 꼬리 만 강아지처럼 기가 팍 죽었다. 그런 김강철의 모습에 한숨을 쉰 민지선이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총동원해서 알아봤는데, 어느 정도 탈세 정황이 포착됐다고 하더라고. 혐의를 피하긴 어려울 것 같아.”

    스튜디오 글로리 역시 세무조사가 있고 난 후 자체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감사팀 이 부장이 이중장부를 사용해 횡령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떻게든 벌금형 선에서 끝내도록 해 볼게. 아무리 이 부장 개인 일탈이라고 해도 그쪽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해. 그쪽에선 이 부장이 총대 메고 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거니까.”

    “너, 괜찮겠냐?”

    “모르긴 몰라도 탈세분에다 가산세까지 내야 할 거야…….”

    걱정 어린 김강철은 물론, 경우의 눈치를 보던 민지선 역시 결국 입을 다물었다.

    시시비비야 가릴 테지만 이 부장의 잘못으로 판명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게 분명했다. 그사이 탈세 혐의가 인정된 스튜디오 글로리엔 어마어마한 징수금이 내려질 테니 스튜디오 글로리로서는 회사 기둥이 흔들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일단 S&Media 주식을 좀 내놓는 건 어때? 잘잘못은 나중에 가리더라도 회사가 흔들리는 건 막아야지. 그나마 다행이야. 요즘 S&Media에서 내놓는 드라마들 성적이 괜찮아서 주식이 많이 올랐더라.”

    그녀의 말에 경우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주식을 왜 내놔? 그깟 세금 몇 푼이나 한다고.”

    “그깟…… 세금?”

    “돈 때문에 걱정이었어? 돈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 정도 여력은 있으니까 걱정 마.”

    자신만만한 경우의 모습에 쟤가 뭘 믿고 저러나 싶은 민지선은 고개를 끄덕이는 김강철의 모습에 더욱 의아해졌다.

    S&Media를 인수한 게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인수하면서 가진 돈 다 쓴 줄 알았는데 돈 걱정 말라니. 도대체 돈이 얼마나 많이 있으면 저런 소리가 나오나 싶을 정도였다.

    그때 경우가 말했을 때 그 투자를 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쯤 경우가 입을 열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사람이 작정하고 나쁜 짓 하는데 이상할 게 뭐 있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잖아”

    “내 말은, 어떻게 세무조사가 나올 걸 알고 해외로 도망을 쳤냐는 거지? 이 부장 가족들은 알아봤어?”

    “어머니는 예전에 돌아가셨고, 시골에 아버지가 살고 계시는데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나 봐. 작년 제사 때 대판 싸우고 연락을 끊었대. 부인이랑 자식들은 교육 문제로 진작 해외로 나간 상태고.”

    “뭐야, 설마 신고한 사람이 이 부장이라고 의심하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너무 비약 아냐?”

    “…….”

    “하긴, 회삿돈 횡령할 때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닌 건데 나도 충격이 너무 커서 그래. 이 부장이 그럴 줄 몰랐으니까.”

    사실 이 부장은 경우가 스튜디오 글로리의 대표직을 맡을 때 공교롭게도 누나인 민지선이 회사 운영에 도움을 줄 거라며 붙여 준 회계사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일이 벌어지자 가장 미안해하는 건 누나인 민지선이었다.

    “어쨌든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 이 부장, 고발해야지. 그래야 여권이 무효화될 거 아냐. 뭐, 위조 여권을 가진 거면 할 수 없지만 일단 혐의라도 벗으려면 이 방법밖에 더 있어?”

    “그래, 어쨌든 나도 더 알아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진 마.”

    “이런 일이 처음이다 보니까 좀 화가 나서 그러는 거지 회사 문제는 걱정 안 해.”

    “그럼 다행이고.”

    경우는 그렇게 누나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긴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는데 어느새 나온 김강철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야, 너 정말 괜찮냐?”

    “안 괜찮을 건 뭐야?”

    “괜찮을 건 또 뭔데?”

    김강철의 말에 걸음을 멈춰선 경우가 돌아봤다.

    “왜 그래?”

    “힘들면 힘들다, 안 괜찮으면 안 괜찮다, 말을 해. 네가 아무 말을 않고 그렇게 입 꾹 닫아 버리면 사람들은 몰라. 네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근데…… 내 눈엔 네가 좀 힘들어 보이거든?”

    “…….”

    “내가 너한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거 알아. 그래도 혼자서 다 짊어지고 가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네가 슈퍼맨이야? 아이언맨이라도 돼?”

    “강철 슈트는 없어도 김강철은 있네.”

    “아, 뭐래. 이 와중에 농담이 나와?”

    “고맙다고. 솔직히 내가 뭐가 힘드냐? 이렇게 내 걱정을 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빈말이 아니라 나 정말 괜찮아. 솔직히 대표 자리에 있으면서 이런 일 처음이라 당황스럽고 그렇긴 한데 이 정도는 이겨 내야지. 솔직히 그동안 순조롭긴 했잖아.”

    “그래. 하고 싶은 거 원도, 한도 없이 다 하긴 했지. 그만큼 일이 잘 풀리기도 했고.”

    “그러니까. 어쨌든 너무 걱정 마.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할게.”

    경우는 그제야 돌아섰다. 누나의 방에서 처음 나올 때보다는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 덕분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그는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갔다.

    * * *

    결국 <페르소나>의 주인공 자리는 전승현에게 돌아갔다.

    전승현이 맡은 역할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 윤혜성.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그녀, 자살인지 타살인지 가려지지 않은 채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윤혜성의 동생은 누나가 살아생전 자주 만나 왔던 사람들에게 추모식에 오라고 문자를 보낸다.

    한때는 친하게 지내던 이들이지만 이젠 달라져 버린 그들은 더는 엮이고 싶지 않단 생각에 윤혜성의 동생이 보낸 문자를 무시한다.

    하지만 그런 결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윤혜성의 남동생은 그녀의 팬 카페에 추모식에 참석할 사람들이라며 그들의 명단을 공개해 버린다.

    결국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추모식에 가기로 한 이들은 당일 아침 약속 장소인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은 임시 모임 장소였을 뿐 진짜 추모식은 근처의 섬에서 진행된다는 소식에 아연실색한다.

    이제라도 돌아서고 싶지만 어느새 항까지 쫓아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기자들 탓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그렇게 섬에 도착하고 나자 연이어 불행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사실 그들 모두를 엮고 있는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 번째 행방불명자가 생기자 사람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한다. 당장 이 섬을 떠나야겠다고 말하지만 하필이면 바다엔 폭풍이 불고 있었으니 배를 띄울 수 없어 그들은 꼼짝없이 섬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만다.

    이다음 부분을 써야 했는데 신도현은 아까부터 깜박이는 커서만 볼 뿐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캐스팅까지 끝났으니 정말 대본이 급해졌다. 대본 리딩 전까지는 못해도 8부까지 끝내기로 계획한 신도현은 어떻게든 드라마 집필에 몰두하려 했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회사 어디를 가도 이 부장에 대한 이야기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세무조사가 있었으니 뒤숭숭한 건 사실.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그는 결국 경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드라마 집필은 잘되고 있으세요? 안 그래도 여쭤볼 것도 있었는데 마침 잘됐네요.”

    경우는 모기범한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하니 그를 따로 부를 참이었다. 대본 진행 상황을 물으면서 은근슬쩍 이 부장에 대한 이야기를 물으려 했던 경우는 갑자기 훅 들어온 신도현의 발언에 당황하고 말았다.

    “실은 저 이 부장님이 횡령하고 있었다는 거 알고 있었습니다.”

    “예?”

    “물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고…… 저도 어쩌다 엿들은 거예요. 이 부장님, 그 문제로 누군가한테 협박을 받고 있었거든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경우는 무척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그의 생각과 상관없이 해야 할 말을 하는 신도현의 입장에선 거침이 없었다.

    “저는 이 부장님이 솔직히 털어놓고 잘 해결되길 바랐어요.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저도 모르게 겁이 나서 그동안 입 다물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아니, 잠깐만…… 이 부장이 협박을 받았다니? 작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 부장님이 회삿돈에 손을 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어요. 그 사람이 그 문제를 가지고 협박했고요. 그것 때문에 결국 이 부장님은 잠적한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군데요?”

    “이세길 부장님이요.”

    아내의 병간호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경우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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