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70화 (170/250)

#170. 왕관의 무게 (5)

“사람들은 드라마는 재미만 있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드라마야말로 지금 이 시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인문학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작가 정신이라고 보고요.”

경우의 말에 교육생들이 집중하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이 너무 쉬운 길로 가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삶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자신의 철학을 드라마 속에 녹이는, 그런 작가가 되시길 바랍니다. 물론 저보고 그런 작가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지 못하겠지만 항상 고민하고 있거든요. 그러니 여러분도 그러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아카데미의 마지막 강의가 끝이 났다.

강의라고 해 봐야 교육생들이 낸 드라마를 합평하는 게 다였지만 경우는 물론 여기 있는 교육생들 모두 함께한 시간 덕분에 전보다 조금은 더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아카데미 근처 식당으로 옮긴 이들은 그동안 바쁜 일정 탓에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길고 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식사까지 끝나자 하나하나 악수를 나누며 방송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덕담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둘 돌아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경우 역시 대리를 부르려던 참에 누군가 그의 앞으로 나타났다. S&Media에서 막내 작가로 일하고 있는 설영선이었다.

“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지난번에 단막극 한 편 더 제출하라고 하셔서요. 시간에 쫓기다 보니 이제야 겨우 완성했거든요.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대본만 달랑 주고는 설영선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다행히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경우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설영선이 주고 간 대본을 살피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겼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 듯 한 번 더 퇴고를 거쳤으면 좋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전체적인 이야기는 꽤 괜찮았다. 오랜만에 재기 발랄한 신인 작가의 작품을 본 것 같아 경우는 흡족했다.

* * *

<페르소나> 문제도 있고 해서 오랜만에 MBS를 찾은 경우는 김동권을 만나고 난 뒤 김은기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진명이라고 합니다.”

“스튜디오 글로리, 민경우라고 합니다.”

“알죠.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치고 작가님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자, 그만 자리에 앉죠.”

그렇게 세 사람은 작은 회의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아,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 페스타, 거기다 단막극 연출 맡으셨죠?”

한진명의 시선이 자연스레 김은기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김은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난 말 안 했어.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 소개하는 거라고.”

분명 김은기가 말해 줘서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인기 작가이자 드라마 제작사 대표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한진명은 놀랐다.

“제가 드라마 페스타 좋아하거든요. 일 년에 딱 10주만 하는 거잖아요. 아무래도 신인 작가의 창구다 보니 꼭 챙겨 보는 편입니다. 작가만 관심 갖는 게 아니라 연출을 누가 맡았는지도 보죠. 작가한테 연출자는 중요한 사람이잖아요. 이번엔 <너와 만날 수 없는 101가지 이유>가 가장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바로 한진명이 연출한 드라마였다. 한진명은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 같았다. 잘했다는 주변 선배들의 말도 들었지만 그건 후배를 격려하기 위한 말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러니 선배가 아닌 업계 사람이 하는 말에는 훨씬 힘이 느껴졌다. 바로 이런 순간, 누군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봐 줄 때 그는 보람을 느꼈다.

“이제 담당 PD님도 정해졌으니 일정이 바빠지겠네요.”

“네, 안 그래도 신 작가님과 상의해서 일정부터 잡아야죠. 오디션부터 할 거 많습니다.”

“저기 근데…… 민 작가님은 드라마 안 쓰십니까?”

“안 쓰긴요. 실은 그동안 아카데미 강의를 좀 맡고 있었거든요.”

“아, 저도 들었습니다.”

“교육생들이 내는 작품 분석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거든요. 근데 이제 막 끝났습니다.”

“하긴 그런 거 하나 맡으면 시간이 참 잘 가요, 그쵸?”

“네. 이제 아카데미 일도 끝났으니 저도 드라마 써야죠. 이 일, 저 일 다 해도 본업은 드라마 작가니까요.”

“혹시 정해 두신 소재라도 있으신 겁니까?”

“정해 둔 거야, 많죠. 시놉 써 놓은 것만 해도 여러 편 되는 걸요.”

그렇게 바쁘게 일하면서도 앞으로도 쓸 드라마가 많다는 말에 한진명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김은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PD, 어째 신 작가보다도 민 작가한테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네. 사실은 신 작가가 아니라 민 작가랑 하고 싶었던 거 아냐?”

“아니, 선배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만나 뵙게 된 것도 처음이고 신기하고 그러니까…….”

“어째 내 귀엔 다 변명처럼 들리네.”

“하긴, 제가 좀 잘나긴 했어요. 그쵸?”

경우의 너스레에 두 사람은 그만 웃고 말았다.

“참, 주인공 말인데요. 오디션 없이 갈까 하는데 신 작가님이 괜찮다고 할까요?”

“누구 생각해 둔 사람이 있나 보죠?”

한진명의 말에 경우가 물었다.

“전승현 씨가 어떨까 해서요?”

“전승현이라…… 생각해 보니까 이미지에 완전 딱이긴 하네. 전승현 씨 자체가 잘나가는 여배우잖아.”

“시놉도 그렇지만 대본을 봐도 주인공의 연기가 상당히 필요한 역할이라서요. 오디션을 하면 아무래도 신인 배우들이 많이 참여할 텐데 다른 역이라면 모를까 주인공은 이왕이면 싱크로율이 맞는 사람이 어떨까 해서요. 물론 그쪽에서 좋다고 해야겠지만.”

“신 작가님이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이네요. 제가 말씀드려 볼까요?”

“아니요, 안 그래도 신 작가님과 상의할 일도 있으니 제가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좋다, 좋아. 뭔가 이제야 제대로 일이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네요.”

“어쨌든 드라마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제작은 저희 쪽에서 안 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거 있으면 지원은 아끼지 않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그런 게 있으면 사양 않고 저희가 먼저 말씀드릴 테니까.”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경우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있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그가 현재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 강희주였다.

평소 낮 시간에는 업무 때문에 서로 전화를 하지 않는데 웬일로 걸려 온 전화에 경우는 살짝 미소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검사님?”

[지금 어디세요?]

“저요? 방송국 갔다가 지금 막 사무실로 들어왔어요. 검사님 바쁘지 않아요?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작가님 혹시 누구한테 책잡힌 일 있어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국세청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들었거든요. 스튜디오 글로리, 세무조사 나간다고 하던데요?]

“세무…… 조사요?”

[이렇게 예고도 없이 받아 본 적 없죠?]

“네, 세금은 잘 낸 것 같은데……?”

[그러실 것 같아 전화드렸어요. 알잖아요? 이런 건 보통 누군가 작정하고 찔렀다는 건데, 사람 일이라는 게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렇게 털다 보면 먼지도 나올 수 있는 거구요. 아마 그런 걸 노리고 한 걸 테지만 말이에요. 제가 생각하기엔 누군가 작가님을 노린 것 같은데 혹시 누가 그랬는지 짐작 갈 만한 사람 없어요?]

있다. 다만 적으로 돌린 사람이 많아서 누군지 특정하지 못할 뿐.

당장 생각해 봐도 ‘유니언 스튜디오’가 있고 ‘드라마 제작사 협회’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차피 피장파장이라 그쪽에서 건드린 거라면 이쪽에서도 가만히 있진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강희주까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을 거예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추징금 때리면 회사 문 닫을 수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휘청한 기업 여럿 봤다고요.]

“우리 스튜디오 글로리,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제가 잘 알아서 할 테니까 검사님은 걱정 마시고 일 보세요. 어쨌든 알려 줘서 고마워요.”

난데없는 세무조사라니…….

다른 건 몰라도 돈 문제는 철저하게 처리해 왔다. 처음 대표직을 맡을 때 누나인 민지선이 추천한 회계사를 고용한 것도 그 이유였고.

문제 될 건 없다고 해도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었으니 자리로 돌아온 경우는 전화를 들었다.

“감사팀 이 부장님 제 방으로 오라고 전해 주세요.”

[이 부장님 오늘 출근 안 하셨는데요.]

“네?”

[병가 내셨어요. 며칠 출근 못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어쩐지 느낌이 싸한 게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경우의 방문이 열리고 다급한 표정의 김종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저 작가님, 지금─.”

“저도 들었습니다. 세무조사 건 말이죠?”

“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어차피 엎질러진 일입니다. 일단 침착하게 대처해 봐야죠.”

경우는 그 즉시 감사팀이 있는 4층으로 내려갔다.

* * *

국세청 직원들이 들이닥쳐 회계 장부는 물론 전산 자료까지 털어 가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난 스튜디오 글로리는 어딘가 뒤숭숭했다. 특히나 제작부에서 돈과 관련된 업무를 보고 있던 모기범이 심란한 얼굴로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마음이 뒤숭숭하기만 했다.

그때 옆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휴, 요즘 회사 분위기 영 그렇네요.”

“뭐,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있는 거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못 들으셨어요? 이런 일 겪으면 추징금 때문에 회사 문 닫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요?”

“그거야 조그만 중소기업 이야기고, 여긴 스튜디오 글로리야. 새명 그룹 막내아들이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 아무렴 돈 몇 푼에 회사가 휘청이기야 하겠냐?”

“하긴. 근데 갑자기 웬 세무조사래요? 저 예전에 다른 제작사에서 일할 때도 세무조사 나오는 건 거의 없었는데.”

그러자 그중 한 명이 주변을 살피더니 몸을 낮추고 은밀히 말하기 시작했다.

“듣기론 누군가 국세청에 고발했다는 모양이야?”

“고발이요? 누가? 아니, 왜요?”

“낸들 아냐? 요즘 우리 회사 잘나가는 건 사실이잖아. 다른 쪽에선 아니꼬워 보였을 수 있지.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뭔데요?”

“요즘 감사팀 이 부장 출근 안 하는 거 알고 있어?”

“예?”

“아, 목소리 낮춰. 누가 듣겠네.”

“너무 놀라서 그렇죠. 혹시 이번 일 이 부장이랑 관계있는 거예요?”

“다들 쉬쉬하는데 이미 대표님도 아는 눈친 것 같더라니까.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병가를 내고 안 나온 뒤로 세무조사가 나왔어.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찝찝하잖아, 안 그래?”

“확실히 수상하긴 하네요.”

“그럼 혹시 국세청에 고발했다는 사람이 이 부장일까요?”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숨은 거겠지. 아무렴 새명 유통에서 건너온 사람이 새명 그룹 막내아들 등에 칼 꽂기야 했을까?”

“왜?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속으론 앙심을 품었을 수도 있지.”

“누구한테? 설마 민 작가님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그건 너무 비약 아니냐?”

“자자, 이야기는 거기까지. 좀 더 확실해지기 전까진 괜히 없는 소리까지 지어내진 말자고. 말 한 번 잘못 말했다가 안 좋게 엮일 수도 있으니 입단속하고.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쑥덕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던 모기범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드라마 예산을 짜고 돈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이 부장과 알게 모르게 자주 만나고 이야기도 해 봤는데 평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 앞을 지나는 신도현의 어두운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일이 생기기 며칠 전 신 작가님, 회사 밖에서 이 부장님을 따로 만났는데…….’

술 마시고 처음으로 지각했던 날 아침, 두 사람이 가는 것을 봤던 기억이 생각났다.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나누던 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이상하게 그날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평소 두 사람이 친하게 지냈다면 모를까 회사 안에서도 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

모기범은 마음속에 든 생각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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