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9화 (169/250)
  • #169. 왕관의 무게 (4)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

    간만에 술 한잔하자는 친구의 전화에 달려 나온 박지홍은 안주는 손도 대지 않고 술만 들이켜는 친구의 모습에 그의 잔을 빼앗았다.

    “야, 그렇게 마시다 체해. 술하고 웬수졌냐?”

    “취하기라도 해야 버틸 것 같으니까 그러지.”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무슨 일인데? ……설마 또 아버지 일이야?”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모기범은 술잔을 빼앗긴 탓에 아예 술병을 잡고 들이부었다. 그런 친구의 모습에 박지홍 역시 소주를 들이켰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그는 모기범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제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또 무슨 일이길래 애가 이 모양인 건지 이쯤 되면 가족이 아니라 원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안 가 테이블 위로 머리를 박고 쓰러진 그를 보며 박지홍은 읊조렸다.

    “이제 보니까 이 새끼, 이럴 걸 예상하고 나더러 수거해 가라고 부른 거구만. 하여간 약은 새끼. 그렇게 속상했으면 혼자 달릴 게 아니라 털어놓지 그랬냐? 아무리 속상해도 지 속에 있는 말은 안 하지, 나쁜 새끼.”

    쓰러진 모기범을 앞에 둔 채 그는 천천히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아줌마, 여기 얼마예요?”

    * * *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부신 모기범이 겨우 눈을 떴다.

    “아우, 머리야!”

    숙취에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겨우 생수병을 찾아 한 병 다 비우고 나자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근데, 여긴 어디야?”

    한참 둘러보니 친구의 집이었다. 그제야 전날 자신이 했던 짓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집안이 조용했다.

    얘가 씻나 싶어 휴대폰을 확인하려던 그때 휴대폰 위에 올려놓은 쪽지 하나.

    ‘이제 정신이 좀 드냐? 간만에 술 좀 마시자길래 좋다고 나갔더니 나를 네놈 수거하는 용도로 불러? 내가 너 데리고 오느라 죽는 줄 알았거든. 나만 당하기엔 좀 억울한 거 같아서 너한테도 선물을 준비했다. 알람 껐어. 운이 있다면 제시간에 일어날 테지. 나갈 때 문 잘 닫고 가라.’

    서둘러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9시가 훌쩍 지났다.

    “이런 젠장할!”

    기존에 하던 드라마에 새로 들어갈 드라마, 거기다 내일 프로덕션에서 제작할 드라마까지……. 안 그래도 일찍 출근해야 할 판이었는데 완전 늦어 버렸다. 그는 세수도 못 한 채 서둘러 옷만 껴입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그 시각, 경우는 김종수와 함께 엘리베이터 옆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미국에서 드라마 반응 좋다면서요? 다음 시즌 제작 오더 떨어졌다고 하던데요.”

    “네. 근데 제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반응이 조금 시원치 않았어요.”

    “첫 드라마 아닙니까? 첫술에 배부르려고 하면 안 되죠. 그러다 체합니다.”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안 그러네요.”

    “한국에선 안 그러시면서 미국 드라마만 시청률에 너무 연연해하시는 거 아닙니까?”

    “한국하고 미국은 시장이 다르잖아요. 100퍼센트 사전 제작하니 시청자 반응을 미리 볼 수도 없고, 여차하면 다음 시즌 제작도 불투명하잖아요. 그러니 그 시장에 맞춰야죠.”

    “하긴, 어떻게 보면 미국이 철저히 상업적이긴 하죠. 한국도 조기 종영이 있긴 하지만 일단 제작하면 어느 정도 보장은 된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어쨌든 다음 시즌 제작에 들어가면 작가님 또 미국으로 가시는 겁니까?”

    “아니요. 이번엔 스티븐한테 온전히 맡기려구요. 어차피 서 실장도 잘할 테고 이쪽에 벌여 놓은 일도 많잖아요. 일은 저질러 놓고 대표님께 다 맡기는 것 같아서 죄송해서 안 되겠더라구요.”

    “그래요, 작가님 없으니까 힘들더라구요. 그나저나 요즘은 외국에서 한국 드라마 인기가 좋잖아요. 웹플릭스에 들어간 우리 드라마 조회수도 많이 늘었는데 한국 드라마 잘 만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굳이 작가님이 그런 고생을 하면서 미국 드라마를 고집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어요. 혹시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한국 드라마는 미국 사회 내에서 비주류잖아요.”

    한국 배우가 다른 나라에서 인기를 얻으면 월드 스타라 칭한다. 반면 미국 배우는 그런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 자체로 월드 스타니까.

    그런 것처럼 미국 드라마는 세계에 통했다.

    지금은 한국 드라마가 아시아에서만 인기가 있지만 앞으론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사랑을 받게 될 날이 올 터였다. 그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라고.

    과거 홍콩 영화가 반짝 인기를 끌다 사라졌던 것처럼 한국 드라마의 인기 또한 반짝했다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경우는 잠시 인기를 얻고 사라지는 그런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콘텐츠로 자리를 잡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 시장에 익숙해져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다. 비록 지금은 미국 작가에게 맡기는 현실이지만 언젠간 그의 꿈이 실현될 날이 오도록.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미국 문화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뭐,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나저나 오늘 모 PD가 늦네요.”

    “그래요? 한 번도 늦은 적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죠?”

    두 사람이 그렇게 걱정하고 있던 그 시각, 모기범은 스튜디오 글로리 앞에서 서둘러 뛰고 있었다. 그때 그러다 문득 멈춰 선 그.

    “어? 신도현 작가님……. 저 사람은 감사팀 이 부장님 아닌가?”

    신도현 작가가 어떤 사람을 뒤따라가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감사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 부장인 것 같아 모기범은 의아했다. 두 사람의 접점이 전혀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늦어도 왕창 늦었다고!”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나서야 숨을 고르던 그는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러 내렸다. 그러자.

    “이제 출근합니까?”

    갑자기 들리는 대표님의 목소리. 망했다 싶은 순간 평소엔 오후가 돼야 출근하는 경우까지 있었으니 그는 그만 사색이 되고 말았다. 꿀 먹은 벙어리마냥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으니 경우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사람이 살다 보면 늦게 출근할 수도 있고 그런 거죠.”

    대표가 괜찮다고 말해도 진짜로 괜찮으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 하필이면 출근한 이후로 처음 지각했는데 두 대표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이런 걸 두고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근데 모 PD님, 혹시 무슨 일 있습니까?”

    “네?”

    “안색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요.”

    경우의 말에 김종수 역시 모기범을 찬찬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안 좋네. 모 PD,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아무 일 없습니다. 어제 오랜만에 친구랑 좀 달리느라……. 죄송합니다. 다음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술도 한잔하고 그럴 수 있죠. 저는 요즘 회사 일이 많아서 혹시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물어봤던 건데…… 오지랖이 과했네요. 이해하세요.”

    “아유, 아닙니다.”

    “그래도 술은 적당히 드시는 걸로.”

    “네.”

    여기서 그쳤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부끄러움에 얼굴이 터져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사무실로 돌아가려던 그때 김종수의 목소리가 그를 붙잡았다.

    “그러고 보니 신 작가님 대본 나왔다면서요? 어떻습니까?”

    “우리 쪽에서 제작 못 한 게 아쉬울 정도로 대본 잘 나왔어요.”

    “그래요? 저도 좀 보고 싶은데.”

    “제가 가지고 있으니까 드릴게요.”

    “아니요, 그럴 수야 있나요. 괜히 대본 돌리다 신 작가 신경 쓰게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당사자한테 직접 받아 봐야죠. 근데 신 작가도 아직 안 나왔죠?”

    “네.”

    “아, 작가님─.”

    말을 하던 모기범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왜요? 신 작가님,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요. 제가 말이 헛 나왔어요.”

    그래도 회사 사람을 밖에서 따로 만나는 거 보면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 텐데 괜히 입으로 옮기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모기범은 우선 화장실에 들러 간단히 세수만 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위해 컴퓨터를 켜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다름 아닌 아버지.

    잠시 망설이던 그는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버지 탓에 당장 이사 갈 집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이 떠오른 탓이었다. 괜히 원망하고 안 좋은 소리를 하느라 차라리 전화를 받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겼다.

    계약 기간이 다 끝나 가자 집주인이 보증금을 올려 달라고 진작부터 이야기한 상태였다. 보증금을 올리기 힘들면 월세를 더 내라고 하는데 안 그래도 부담되는 월세를 여기서 더 늘릴 수는 없는 일. 다행히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이 있으니 그걸로 보증금을 올려 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합의금으로 쓰고 말았으니 자신의 형편에 맞는 월셋집을 다시 찾아야 했다.

    진작 이사를 결심했다면 모를까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신이 없었다.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틈나는 대로 인터넷을 뒤져야겠다 생각했다.

    “참, 이거 오늘까지 입금해야 했지?”

    드라마 촬영 때문에 섭외한 장소의 비용을 처리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던 모기범은 괜히 한숨이 나왔다.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 회당 못해도 몇 십억이 들어가는 상황.

    본인은 돈 몇백이 없어서 이사 갈 집을 구해야 하는데 회사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몇백씩 결재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고 돈을 보내다 보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PPL에 사용되는 제품을 한번 노출하는 조건으로 몇백이 들어오다 보니 다른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오늘따라 괜히 그의 신경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정신 차려, 모기범. 일해야지, 일. 근데, 어디 눈먼 돈 없냐? 하늘에서 그냥 돈이 뚝 떨어졌으면 좋겠네. 그나저나 신 작가님 고료 많이 올랐네. 부럽다.”

    <페르소나> 예산안도 짜야 했기에 지난 드라마 예산안을 보던 모기범은 지난 드라마에 비해 이번 드라마에서 신도현의 고료가 많이 오른 걸 보고 부러워하던 참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모기범은 마침 복도를 지나가는 신도현의 모습에 서둘러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신 작가님!”

    “아, 네.”

    “혹시 들으셨어요? ‘스타 플래닛’에서 촬영 한 번 하셔야 한다는 거요.”

    “아, 그래요? 제작비 때문에 그러는 거죠?”

    “네. 아까 들어 보니까 2부까지 대본이 나왔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미리 알고 계셔야 수정하기 용이하잖아요.”

    “네, 알겠습니다. 미리 말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그렇게 돌아서는 신도현의 모습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모기범은 살짝 걱정이 되었다.

    “에휴,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할 때냐. 네 걱정이나 해라.”

    그렇게 중얼거리던 모기범은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 * *

    “왜? 안 받아?”

    “그놈이 언제 제 전화 받는 거 봤어요? 누님도 다신 그놈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어떻게 그래? 자식이 둘도 아니고 걔 하난데. 그래도 기범이 아니었으면 너 꼼짝없이 감옥 갔을 거 아냐?”

    “감옥이 뭐 대수라고. 가면 삼시 세끼 밥도 주고 좋죠, 뭘.”

    그러자 기범의 고모가 그의 등짝을 내려쳤다.

    “도대체 언제 철들 거야? 아버지가 돼서 자식보다 못해서야 쓰겠어? 기범이 불쌍하지도 않아?”

    “저 혼자 잘살자고 집 버리고 나간 놈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요?”

    “어째 말을 해도 그렇게 해? 그 어린놈이 그 많은 돈이 어디서 났겠어? 그리고 기범이가 괜히 나갔어?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제발 부탁이니까 자식 등골 빼는 부모는 되지 마, 응?”

    “…….”

    그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열심히 하려고 해도 되는 일은 없고 미안한 마음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고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들에게 화가 나면서 사이가 멀어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달라지고 싶은데 자꾸만 마음과는 다른 행동에 그 역시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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