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8화 (168/250)
  • #168. 왕관의 무게 (3)

    드라마국 사정에 빠삭하진 않더라도 최근 김은기와 황성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왕 이 세상에 태어난 거, 올라갈 수 있는 최대한으로 올라가 승진하는 것을 인생 최대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늘고 길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한진명은 후자에 속했다. 출세에 대한 큰 욕심 따위 없었다. 그저 본인이 하는 일, 열심히 하면서 어떻게든 방송국에 최대한 붙어 있자는 게 삶의 모토였다.

    그런 그에게 김은기의 제안은 고민을 불러일으켰으니.

    MBS 드라마 역사 중 드물게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신도현 작가의 신작은 연출자로서 맡아보고 싶은 작품임에 분명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맡는다면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김은기와 황성준 두 사람 사이의 알력 다툼에 끼게 되었다.

    만약 이번 작품의 성적이 좋아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김은기 라인이라는 소문이 돌 테고, 가늘고 길게 살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이루지 못할 희망 사항으로 끝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고민이 될 수밖에.

    그렇게 비주류와 주류의 경계선에 선 한진명은 한참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 * *

    마포의 스튜디오 글로리 사무실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어느 커피숍.

    미간에 잔뜩 힘을 준 채 김은기는 대본에 집중하고 있었다. 지문 한 줄, 대사 한 줄의 의미까지도 놓치지 않겠다는 그의 모습에 신도현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완성된 대본을 누군가한테 보이는 이 시간이 신도현은 가장 떨렸다. 어쨌든 작가로서 평가 받는 순간이었으니까. 거기다 상대는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연출자. 바싹바싹 목이 타들어 가자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물 마시듯 들이켰다.

    그곳엔 사락사락 대본 넘기는 소리만 가득할 뿐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대본의 마지막 장을 넘긴 김은기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신도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작가님, 역시 대본 좋은데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숨에 읽었어요.”

    “저, 정말요?”

    “그럼요. 몇 군데 조금 손봐야 할 곳이 있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너무 좋습니다.”

    김은기의 웃는 얼굴에 신도현 역시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난 암만 봐도 작가들 이해를 못 하겠어요. 그렇게 쥐어짜 내면서도 매번 어떻게 이렇게 새로운 이야기를 써 대는지. 솔직히 나보고 하라고 하면 전 못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거 알면서도 기분은 좋네요.”

    “아니에요,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어쨌거나 이번에 정말 잘해 봅시다, 작가님. 대박 터트려 보자구요.”

    “네.”

    “아 참, 나만 잘하면 되는 거구나. 작가님은 늘 잘해 오셨으니 저만 잘하면 될 것 같네요.”

    “아니에요. 저도 솔직히 긴장 많이 됐어요. 지난번 작품은 솔직히 민 작가님이랑 같이 한 거잖아요. 다시 혼자 할 수 있을까 걱정 많았는데, 그나마 PD님이 좋게 봐 주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 걱정 안 했습니다. 작가님 워낙 실력 있는 분이시니 금방 털고 일어날 거라 생각했죠. 참, 중요한 말씀 드릴 거 있었는데 깜빡할 뻔했네요.”

    “뭔데요?”

    “담당 PD 말입니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새로운 드라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느라 그들 주변에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 *

    신도현 작가의 신작 <페르소나>.

    이 드라마는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유명 여배우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기이한 죽음.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그녀 주변 사람들의 관계는 물론이고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숨겨진 사생활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게 전체 스토리였다.

    김은기와 약속 장소로 나가기 전 신도현은 이제 막 완성된 1~2부 대본을 경우에게 건넸다. 받은 즉시 대본에 집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대사와 빠른 전개, 등장인물들 간의 심리 묘사가 일품이었다. 지난번 드라마 <뫼비우스>를 같이 작업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이전 생의 경우가 알고 있던 신도현의 스타일로 이젠 완전히 돌아온 것 같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창 대본에 집중하고 있는데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제작부 PD 모기범이었다.

    “작가님,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네, 들어오세요.”

    “내일 쪽에서 연락이 왔거든요.”

    제작사에 소속된 작가들의 작품을 소속 제작사가 다 제작할 것 같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여기도 복잡한 사정이 있다 보니 이렇게 상황의 여의치 않은 경우엔 다른 제작사의 손을 빌리기도 했다.

    내일 프로덕션은 그런 면에서 좋은 파트너였다. 초반 껄끄러웠던 관계를 개선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발돋움한 게 주효했다. 덕분에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내일 프로덕션의 손을 빌려 드라마를 제작하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주로 공동 제작이라는 형식을 빌렸는데 직접 제작하는 건 내일 프로덕션이었지만 제작비 같은 문제는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해결했다.

    물론 남의 손을 빌려야 했으니 스튜디오 글로리 입장에선 번거로운 것도 사실. 그렇다고 해도 좋은 드라마를 제작할 수 있다면 그런 불편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참, 제가 깜빡했네요. 이번에 새명 유통 쪽에서 제작 지원을 하기로 했으니까 내일 쪽 PPL 담당자한테 이야기 좀 잘해 주세요. 곧 새명 쪽에서 연락이 갈 겁니다. 나머지 PPL도 전처럼 하시면 된다고 전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신 작가님께도 이미 말씀드렸지만 스타 플래닛에서 한두 컷 정도 촬영을 진행해야 할 거예요. 그것도 미리 이야기해 두세요. 물론 촬영은 그쪽 담당자가 편의를 다 봐주기로 이야기되어 있으니까 모 PD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겁니다.”

    “신경이라니요. 일인데 당연히 해야죠. 처음도 아니고 나머진 제가 처리할 테니까 작가님은 너무 걱정 마세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고요.”

    제작부를 진두지휘하던 이세길이 아내의 병환으로 그만둔 후 경우나 김종수는 제작부를 이끌어 갈 새로운 수장을 뽑지 않았다. 아내가 쾌차하면 언제라도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덕분에 스튜디오 글로리가 세워지고 알바생으로 처음 들어왔던 모기범이 그의 일을 대신하고 있었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이세길의 빈자리를 잘 메꿔 주고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경우와 <페르소나>에 관련된 몇 가지 일들을 상의한 모기범이 경우의 방을 나왔다. 서류를 살피며 경우와 한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고 있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무심코 전화를 받으려던 그는 발신자를 보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기범아, 큰일 났다. 글쎄 네 아버지가…….]

    “아버지 일이라면 전 몰라요, 고모.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러다 꼼짝없이 감옥 가게 생겼어. 네 아버지 호적에 빨간 줄 생기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니?]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 정도 하셨으면 이제 그만하실 때도 됐잖아요. 저 아버지 없는 셈 치고 살 거예요. 그러니까 고모도 신경 쓰지 마세요.”

    [하지만 기범아─.]

    고모가 뭐라고 더 하기 전에 모기범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버지의 ‘아’ 자만 들려도 경기가 날 것 같았다. 분명 좋았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 속 그는 아버지 노릇조차 제대로 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앓다 돌아가신 것도 다 아버지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기범이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집을 나갔다. 하던 사업이 망한 탓이었다. 결국 도망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빚쟁이한테 시달려야 했으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적어도 빚만 아니었다면, 아버지가 자신이 벌인 일에 나 몰라라 도망치지만 않았더라도 어머니가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뜨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고모가 그를 보살펴 줬지만 아버지 탓에 고모네 사정도 어려웠으니, 함께 사는 내내 그는 고모에게 미안해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버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은 모친상을 치른 지 두 해가 지난 후였다. 돌아온 아버지는 매일 술만 마셨다. 처음엔 죄책감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날 자신을 붙잡고 신세 한탄을 하던 아버지를 보며 그는 깨달았다. 아버지의 머릿속엔 예전에 사업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만 가득하다는 걸.

    다시 그때로 돌아가겠다며 일을 벌였지만 결국 되는 일 없이 빚만 늘어 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의 이름으로 보증까지 섰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 깨달았다.

    결국 그는 집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쫓기듯 군대로 가 버렸다. 제대하고 난 이후엔 숙식 제공이 되는 일자리를 찾아 돈을 벌었다. 그렇게 빚을 갚고 복학하고 다시 휴학하고 복학하기를 반복.

    덕분에 남들은 군 복무를 제외하고 4년 걸려 졸업하는 학교를 그는 8년 만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다행히 좋은 사람들이 있는 스튜디오 글로리에 온 이후론 부정적이었던 그의 성격도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아버지 문제라니…….

    그는 혈연으로 얽힌 아버지란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됐다, 그만 생각하자. 감옥을 가든 뭘 하든 이제 관심 끄자. 더는 받아 주면 안 돼!’

    모기범은 그렇게 애써 외면하려 애썼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했던 이야기가 자꾸만 명치에 걸렸다.

    ‘아버지 미워하지 마. 아버지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셨겠니? 예전엔 널 누구보다 사랑하셨어. 이 엄마를 봐서 아버지 미워하지 마.’

    그놈의 가족이 뭐라고, 천륜이 뭐라고.

    차라리 남이었으면 아예 연 끊고 안 보고 살면 그만이었을 것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모기범은 그 자리에 서서 거칠게 머리를 긁어 대고 있었다.

    * * *

    “모병갑 씨, 나오세요.”

    유치장의 문이 열리고 경찰의 고갯짓에 어리둥절한 모병갑이 꾸무럭꾸무럭 자리에서 일어났다. 죽네, 사네 하더니 결국 별일도 아니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풀어 주었을 테지.

    유치장에 누워 있느라 까치집이 된 머리를 매만지며 나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들 기범이 유치장 앞 복도에 서 있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이제 할 짓이 없어서 술 먹고 사람 패고 다닙니까?”

    “자식 놈이 돼서 말하는 본새가 그게 뭐야?”

    “아버지가 이러고 다니시는데 그 밑에서 제가 뭘 더 배우겠어요?”

    “아무리 터진 입이라지만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도대체 네 엄마는 자식 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

    “제발 좀 그만하세요! 엄마 탓이 아니라 아버지 탓이에요. 우리 집이 이렇게 된 것도, 엄마가 그렇게 된 것도, 제가 이런 것도 다 아버지 탓이라고요!”

    “그 소리 하려고 여기까지 왔냐? 서로 없는 셈 치며 살기로 했으면 신경 끌 것이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남의 속을 긁어, 긁길?”

    “그러게요. 제가 뭣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저도 모르겠네요. 차라리 아예 신경 끄고 남처럼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더니 팩 돌아서 가 버렸다.

    “저놈이!”

    뭐 하러 여기까지 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나 싶은 생각이 들 무렵에야 자신을 붙잡아 가둔 경찰이 다가왔다. 씩씩대던 그가 순간 표정을 바꾸고 경찰을 향해 비굴하게 미소 지었다.

    “모병갑 씨. 우리 다시는 보지 맙시다. 괜한 일로 경찰서 들락날락해 봐야 좋은 거 없습니다.”

    “그러믄요, 그러믄요.”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요. 그래도 아들은 참 잘 두셨네요. 사고 친 아버지 대신 합의도 다 해 주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별일이 아니라 풀어 준 게 아닙니까……?”

    “모병갑 씨가 휘두른 주먹에 상대방 이빨이 나갔어요. 합의한 덕에 지금 집으로 돌아가시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경찰이 자리를 뜨자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는 아들이 사라진 쪽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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