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왕관의 무게 (1)
씩씩대며 국장실 문을 두드린 김은기는 들어오라는 소리에 문을 힘껏 열었다.
“아니, 국장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차분한 성격의 김은기가 다짜고짜 화부터 내자 김동권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야말로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청모가 새명 사위가 될 거라는 거 왜 미리 말 안 했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그럼 뭐가 중요한데?”
“분명 편성 잘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전 당연히 수목으로 편성 주실 거라 생각했다구요. 그런데 월화라니요?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난 거구만. 근데, 우리 김 PD가 언제 요일 따졌나? 예전엔 그런 거 안 따지더니.”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시절의 김은기가 아니니까요.”
그의 말에 김동권이 피식 웃었다.
월화나 수목이나 다를 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굉장한 차이가 있었다.
주말 동안 늘어져 있다 출근한 탓에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월요병에 시달려서 그런지 월요일엔 생각보다 시청률이 잘 나오지 않는 편에 속했다. 거기다 더한 복병이 있었으니 바로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KBC의 음악 프로 <월요무대>.
30년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시간을 고수한 <월요무대>는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프로그램. 차라리 월요일 드라마를 재방송으로 보는 한이 있더라도 <월요무대>는 꼭 챙겨 봐야 한다는 충성 팬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실제로 시청률이 높은 월화 드라마의 월요일과 화요일 시청률을 비교해 보면 화요일이 월등히 높았을 정도였다. 때문에 제작비 문제로 최소 24화 이상은 제작해야 하는 사극이나 특별 기획 드라마처럼 차라리 호흡이 긴 드라마는 월화에 배치하고 좀 더 트렌디한 소위 광고발을 끌어올 수 있는 미니시리즈는 수목에 배치했다.
그러니 수목 드라마라고 하면 방송국에서 어느 정도 밀어주는 드라마라고 보기도 했다.
김은기는 당연히 신도현과 하기로 한 드라마가 수목에 들어갈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수목이 아닌 월화에 편성이 잡히자 기대했던 탓인지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더 열이 받은 건 수목에 들어갈 드라마가 하필이면 사극.
“사극을 월화도 아니고 수목에 배치한다니요.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안 될 건 뭐야? 유행을 이끌어 가야 하는 자네 같은 사람이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되지.”
김동권의 말이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기에 김은기는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런 김은기의 모습에 김동권이 웃으며 말했다.
“나라고 김 PD가 싫은 것도 아닌데 김 PD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그랬겠어?”
“그럼요?”
“황성준이가 권창욱이를 물어 왔어.”
“권창욱이라면 예전에 <응급실> 쓰셨던 권창욱 작가님이요? 설마 이번에 복귀하시는 거예요?”
본격적인 의학 드라마의 시작을 알린 <응급실>.
권창욱 작가가 직접 병원에 찾아가 몇 달 동안 의사들과 먹고 자고 생활하며 사실적으로 그려낸 덕에 많은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였다.
자료 조사에 누구보다 철저했던 권창욱 작가는 작품 활동이 다소 뜸한 작가 중 하나였지만 그것 역시 장인 정신이라며 상당한 팬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권창욱 작가의 복귀작이란 소리에 김은기 또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래. 그러니 나도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 한동안 작품 활동 안 하셨어도 골수팬이 많아서 권창욱 작가 작품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황성준 그놈, 머리 잘 쓴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창욱 정도 되면 나도 어쩔 수 없다는 거 아는 거지.”
“그래서 시놉은 보셨어요? 무슨 내용인데요? 대본은 나왔어요?”
방금 전까지 화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김은기는 권창욱 작가의 작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그 역시 권창욱 작가의 팬이었으니 그 때문에 드라마 PD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김은기의 모습에 김동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하여간 드라마 귀신 아니랄까 봐. 그러고 싶냐?”
“궁금한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권창욱이 찾아가서 네가 연출하고 싶다고 말하지 그래?”
“안 됩니다. 신도현 작가 작품은 어쩌고요.”
“그런 놈이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잘 들어. 이건 단순히 그냥 드라마가 아냐. 경쟁이야. 이번 경쟁에서 이기는 쪽이 드라마국 국장 자리를 차지하는 거고. 황성준이는 이미 그런 것까지 다 계산해 놓고 들어간 거라고. 알아들어?”
“……네.”
“대답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지금 이 순간부터 김 PD의 경쟁 상대는 같은 시간대 다른 방송국 드라마가 아니라 황성준이 맡게 될 권창욱이 드라마야. 알았냐고?”
“알았다니까 그러시네요. 알았어요. 저도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압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어차피 결정된 거 편성은 이제와 바꿀 순 없어. 그러니 여기서 왈가왈부할 게 아니라 가서 드라마 준비 제대로 해. 알았냐?”
“네.”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한숨도 나왔지만 언제까지 코 빠뜨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자신만 믿고 대본을 열심히 쓰고 있을 신도현을 생각해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김은기는 곧장 전화를 들었다.
* * *
경우는 모기범이 가지고 온 서류에 사인을 하며 돌려줬다.
“그럼 제작은 내일 프로덕션에서 하는 거죠?”
“네.”
“근데 조금 서운하네요. 신도현 작가의 신작을 다들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 저만 쏙 빼고 말이죠.”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작가님 요즘 정말 바쁘셨잖아요. 그리고 저희도 MBS 측에서 연락이 와서 알았어요. 그때까지 신도현 작가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고 계셔서 얼마나 당황했다고요.”
“안 봐도 뻔하네요. 확실해지기 전에 작가님 함부로 입 열고 그런 분 아니시잖아요. 어쨌든 이렇게 또 한편 제작에 들어갔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죠?”
“그럼요. 작가님도 시놉 보셨죠?”
“네. 재밌더라구요.”
“근데 당연히 수목일 줄 알았는데 월화로 잡혔다고 하더라고요.”
“듣자하니 수목에 권창욱 작가님 작품,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이왕이면 권 작가님 작품 시놉 보고 싶은데 좀 구해다 주세요. 그리고 그 드라마 어느 제작사에서 맡기로 했는지도 좀 알아봐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근데 듣기론 황성준 CP가 직접 작품을 따왔다고 했으니까 아무래도 유니언 쪽에서 제작하지 않을까요? 그 조카가 유니언에 있다고 하던데요.”
“아, 그렇겠네요. 알았어요. 그만 나가 보세요.”
모기범이 나가자 경우는 책상 위에 보다가 놔둔 대본 하나를 챙겨 들었다. 아카데미 수업을 위해 교육생이 제출한 단막극이었다.
현재 아카데미의 수업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확실히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생들의 실력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당장 단막극으로 제작해도 될 만한 실력들이었다.
문제점을 체크하던 경우는 김명석에 대해 생각했다. 결국 그는 2차 과제물을 제출하지 못한 채 창작반을 그만두고 말았다. 해외 장기 출장이 잡혀 부득이하게 남은 수업 일정을 소화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다른 교육생들은 그의 중도 하차를 아쉬워했다. 그만큼 작품 분석을 잘하는 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경우는 열심히 하는 교육생들을 위해 지적받은 작품을 수정해 오면 개인적으로 피드백을 해 주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 직장인들이라 아카데미 시간도 겨우 맞춰서 오는 경우가 많았기에 실제로 수정해 가지고 오는 이는 드물었지만 아예 없진 않았다.
교육생 중 하나는 김명석이 지적해 준 부분을 수정해 작품을 제출했는데 확실히 처음보다 실력이 나아져 있었다. 그런 걸 봤을 때 김명석은 작가보다는 평론가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지금은 교육생의 작품에 집중을 해야 할 때.
교육생의 작품을 보던 경우는 책상 위에 놓아둔 또 다른 대본을 집어 들었다.
지난번 설영선이 제출한 작품이었다. 첫 작품을 낼 때는 솔직히 창작반에 어울리지 않는 무척 아쉬운 솜씨였는데 그 사이 성장을 한 것인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사람이 단시간에 이렇게 좋아질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후 경우는 그녀를 따로 불러 물었다. 필력이 늘 수만 있다면 자신의 영혼이라도 팔 족속이 바로 작가라는 사람들이었다. 기성 작가 역시 마찬가지.
머리를 긁적이는 설영선은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그게, 사실 제가 요즘 새로 프로그램 시작했거든요. 막내 작가라…… 솔직히 밥 먹을 시간도 부족해서 지난번 제출했던 그 단막극은 예전에 연수반 때 써 놓았던……’
‘예?’
‘죄송합니다. 그러려고 뽑은 게 아니실 텐데 저도 먹고살려고 보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이번엔 제대로 확실히 쓴 겁니다, 네!’
이번엔 확실하다며 믿어 달라는 그녀의 모습에 경우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래, 그 정도나 되었기에 이렇게 실력이 는 거지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으니 잠시 생각에 잠긴 경우는 설영선에게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으면 나중에 저한테 단막극 대본 한 편만 더 써서 제출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창작반에서 단막극을 2편 정도 제출하라고 했던 건 한 편으로는 실력을 검증하기 어려워서 그래요.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제대로 해 보는 게 낫지 않아요? 결과에 따라선 드라마 작가로 입봉도 가능할 것 같은데.’
‘하, 할게요. 하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당연히 해야죠!’
만약 추가로 낸 작품도 이 정도 수준이라면 스튜디오 글로리의 소속 작가로 계약을 하고 싶을 만큼 괜찮은 실력이었다.
하지만 찾아온 기회를 낚아채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과제물도 결국 시간에 쫓겨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추가 제출을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지난 생각을 하며 다시 교육생의 작품에 집중하고 있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김강철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평소엔 퇴근 후에 부르지 말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냥. 너 어떻게 지내나 감시하러 왔다.”
“감시할 게 뭐 있어? 어제나 오늘이나 매일이 똑같은데.”
“그렇긴 하지.”
“지금 퇴근한 거야?”
“어.”
“많이 바쁜가 보다?”
“쇼핑몰 완공이 얼마 안 남았잖아. 오픈에 맞춰서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지. 안 그래도 네가 지난번에 대표님한테 써 준 스토리텔링 때문에 우리 완전 비상이잖아.”
“비상은 무슨. 하여간 우리 누나도 못 말려. 결국 쇼핑몰 때문에 평생에 한 번 있는 신혼여행을 포기한 거 아냐.”
“신혼여행 보다는 회사일이 더 중요하다는 거겠지.”
“그러다 소박맞으면 어쩌려고.”
“아무리 그래도 누님이 소박맞을 사람은 아니지 않냐?”
“그래, 내가 실언했다. 이제 그만하면 됐으니 용건이나 꺼내시지?”
“알고 있었냐?”
“퇴근 후엔 찾지 말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놈이 괜히 여기 왔겠어? 뜸 들이는 거 보니까 심각한 것 같은데, 뭐야?”
“준호 형이…… 경 실장을 만났어.”
“뭐?”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경 실장을 만나 봤는데 제대로 겁 먹었더라고. 이제 자기 찾아오지 말래.”
한동안 잠자코 지내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누나의 결혼식 준비로 본의 아니게 바쁜 동안 경 실장을 찾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다른 건? 그 외에 별다른 건 없었어?”
“어.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왜? 걱정돼?”
“걱정은 무슨.”
“그래, 걱정할 거 없어. 이미 우리가 예상하고 있던 걸 눈으로 확인한 것밖에 더 돼? 이미 정현이 형이나 누나로 기울어진 상태인데도 형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형이 누굴 만나고 다니는지 잘 살펴. 이제부터 형이 만나는 사람이 진짜일 테니까.”
“알았다.”
김강철에게는 괜히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으나 경우 또한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