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5화 (165/250)
  • #165. 탕자의 귀환 (5)

    인피니티 그랜드 호텔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새명 그룹의 딸 민지선의 결혼식 탓이었다. 소위 말하는 VVIP의 결혼식이었으니 호텔 측에서도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음에도 결혼식에 초대받은 하객들이 속속 호텔로 입장했다. 정재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연예인들의 등장에 시상식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따로 마련된 포토월에선 연신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다.

    “쯧, 결혼식이 무슨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작게 투덜대던 윤정숙의 옆구리를 남편인 민 회장이 살짝 찔렀다.

    “왜요? 내가 못할 소리 했어요?”

    “그러다 누가 들어.”

    “들으라면 들으라죠.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결혼식인데 이 정도도 못해요?”

    “그래봤자 우리 자식 흠밖에 더 돼? 이왕 결혼시키기로 한 거 좋은 마음으로 보내 줍시다.”

    뭐라고 더 하고 싶었지만 마침 다가온 손님에 윤정숙은 입을 닫고 한껏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사돈과 눈이 마주치자 더욱 짜증이 솟아났다. 지난 상견례 때의 일이 생각난 탓이었다.

    ‘예물이니 뭐니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혼집도 지선이 몫으로 준비된 게 있으니 거기서 시작하면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예물 정도는 해야…….’

    ‘그러실 것 없습니다. 안하느니만 못하는 것보단 차라리 저희가 준비하는 게 낫죠.’

    ‘여보!’

    ‘엄마!’

    ‘왜요? 내가 틀린 말했어요? 결혼 예물인데 아무거나 할 순 없잖아요. 우리 수준에 맞추려면 사돈댁에도 부담일 것 같아 생각해서 한 말인데 왜들 그래요?’

    안 그래도 경직된 분위기가 윤정숙의 발언으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때 분위기 수습을 위해 민지선이 나섰다.

    ‘어머니, 저, 보석이니 이런 거 필요 없어요. 다이아반지 같은 거 애초에 관심도 없고요. 대신 지난번에 저 보여 주신 금반지요, 저 그거 주세요. 할머니께서 물려주셨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이제 이 집안 며느리니까 그거면 적당할 것 같은데요.’

    ‘그건 당연한 거고. 그거 말고도 지선이한테 더 해 주고 싶어서 그러지…….’

    ‘아니에요, 어머니. 정말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원래 보석은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예물은 청모 씨와 커플링 하나만 맞추면 돼요. 그러니까 진짜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어머니.’

    언제 봤다고 어머니, 어머니. 생글생글 웃는 딸의 모습에 솔직히 기가 찼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가진 거라곤 쥐뿔도 없이 딸을 가로챈 놈보다 딸이 더 미웠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이라도 이 결혼, 때려 치우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니 그것 또한 고역이었다. 그때 민 회장이 그녀의 옆구리를 다시 툭 쳤다.

    “왜요? 웃고 있잖아요.”

    “그게 아니라, 저기 보라고.”

    남편이 턱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두 사람보다 더 바쁜 사람이 하나 보였다. 바로 막내 경우.

    새명 유통에서 세운 고정시 복합 쇼핑몰 덕분에 인연을 맺은 한석인 의원과 인사를 나눈 경우는 그의 소개로 다른 정계의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랑 측 하객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있었으니 어떻게 보면 결혼 당사자인 안청모나 혼주들보다 더 바쁜 게 경우였다.

    그런 경우의 모습에 민 회장은 물론 윤정숙도 조금은 놀라고 말았다.

    “일을 열심히 한다고는 들었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이었나 봐.”

    “그러게요.”

    역시나 그런 경우의 모습을 주시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첫째인 민정현 내외는 물론이고 셋째인 민준호 또한 예전과 달라진 경우의 모습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덕분에 경계심이 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연출한 것도 없지 않았다.

    재벌가 딸과 드라마 PD의 결혼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경우는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재벌가 딸을 차지한 평범한 남자에 대한 취재 열기가 높아질 것을 예상한 경우는 아예 호텔 측과 따로 이야기를 나눠 기자들을 위해 프레스 센터를 마련했다. 새명 홈쇼핑에서 인수한 S&Media, 그리고 소속 드라마 PD. 두 사람의 연결 고리나 다름없는 S&Media를 이참에 홍보하기로 한 거였다. 그것만큼 큰 광고도 없을 테니까.

    그러니 경우는 민지선에게만 집중될 수 있는 시선이 고루 분포되도록 신랑 측 하객으로 아는 연예인을 총동원했다. 덕분에 취재하는 기자들을 챙기는 것은 물론 하객들까지 맞이하느라 솔직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다들 정신없는 사이 한 남자가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곧장 신부 측 부모를 찾아 인사를 나눴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장 전무,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 그래, 회장님께선 미국에 가셨다고?”

    “네. 대신 축하 인사 전해 드리라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

    “바쁠 텐데 정말 고마워. 회장님께도 고맙다는 말씀 꼭 전해드리구. 안으로 들어가지.”

    “네.”

    그렇게 인사를 나눈 남자는 식장 안으로 향하려던 발길을 돌려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마침 친구들과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하는 민지선의 모습이 보였다. 말없이 지켜보던 남자의 시선에 민지선의 친구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식장 안으로 들어가 있을게.”

    “그래.”

    그렇게 다들 자리를 비워 주자 남자가 민지선 앞으로 다가갔다. 웃던 민지선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삐딱해졌다.

    “웬일이야, 여기까지?”

    “너 결혼하는데 내가 당연히 와야지.”

    “굳이? 안 와도 되는데?”

    “하여간 너는. 그래도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은 아니잖아.”

    “선 한 번 본 걸 가지고 인연 운운하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 쇼핑몰 문제도 있었고─.”

    “그러고 보니 남다른 인연이긴 하네. 악연도 보통 악연이야 말이지.”

    그러니까 민지선이 앞에 나타난 이 남자는 지선과 맞선을 봤던 경음 그룹의 둘째 장석제였다. 경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을 보게 되었지만 그녀는 장석제를 단 한 번도 결혼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딱 싫어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지금만 해도 그랬다. 아버지인 장 회장을 대신해 결혼식에 왔으면 그냥 결혼식이나 볼 것이지 굳이 신부 대기실까지 쫓아와 친구들을 내쫓은 건 무슨 심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좋은 날 괜히 언성 높이고 싶지 않아 잠자코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석제와 맞선을 보던 그날 안청모를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 안청모가 들고 있던 커피를 가로채 장석제의 얼굴에 뿌렸던 일을 떠올린 민지선은 피식 웃었다.

    “왜?”

    “아니, 옛날 생각 나서. 인연이라는 게 참 특별하기는 해.”

    그를 두고 한 소리가 아니었는데도 장석제는 웨딩드레스를 입은 민지선의 모습에 새삼 기분이 이상해져 혼자 감상에 젖은 채 아련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난 너 결혼 안 할 줄 알았다.”

    “그럴 수도 있지.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거든.”

    “네 옆엔 내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래? 결혼식 구경 왔으면 조용히 구경만 하다 가지. 괜히 주접떨지 말고.”

    “넌 아쉽지 않아? 이대로 결혼해서 다른 기회를 놓쳐 버린다는 사실이?”

    “야, 장석제! 너 결혼 후회하냐? 지난 연말에 네 결혼식 가서 축하해 줬던 게 아직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데?”

    “그렇겠지. 내가 먼저 결혼해서 아쉬웠을 거야. 그렇다고 자기 인생을 포기하듯 아무나하고─.”

    “스톱! 거기까지. 한 번만 더 헛소리 지껄이면 그 혓바닥을 확 뽑아 버릴 줄 알아!”

    “야, 넌 웨딩드레스까지 입어 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

    “응, 나와. 그러니까 좀 가라!”

    훠이훠이 손을 내젓는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상하려던 그때 신부 대기실 안으로 오늘의 또 다른 주인공 안청모가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민지선의 얼굴이 환하게 변하자 장석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선 씨! 혹시 목 마르지 않아요? 물, 갖다줄까요?”

    “아니요. 괜찮아요.”

    “그런데 이분은…….”

    그렇게 웃던 그녀의 시선이 장석제에게로 향했으니 순간 얼굴은 굳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신경 쓸 거 없어요. 너, 아직 안 나갔니?”

    “간다, 가!”

    민지선의 성화에 할 수 없이 돌아선 장석제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오늘 따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민지선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탓이었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결혼하지 않았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이미 안청모와 둘만의 세계에 빠진 민지선은 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만 장석제는 그런 민지선을 향해 비련의 남주인공이 된 듯 낮게 읊조렸다.

    “잘 살아라.”

    그가 쓸쓸히 신부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결혼식 시간이 임박해지자 뒤늦게 도착한 사람들로 더욱 붐볐다. 경우는 식장 안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그의 어깨를 김강철이 툭 쳤다.

    “왜?”

    “저기.”

    호텔 안, 사람들과 섞여 있는 박현호의 모습이 보였다.

    “저 놈은 왜 온 거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청첩장 확인했어?”

    “응. 신부 측 하객이 아니라 신랑 측 하객이던데?”

    “뭐?”

    안청모가 그에게까지 청첩장을 보냈을 리는 없었다. 경우가 뿌린 청첩장을 챙겨 일부러 왔겠지. 어쨌든 이런 결혼식은 결혼식 자체로만 끝이 아니라 같은 업계의 여러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였으니 안 오면 자기만 손해라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박현호는 여기저기 다니며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

    “그냥 내버려 둬.”

    저도 먹고살자고 저러는 모양인데 그냥 내버려 두자고 생각하려던 그때 경우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게 있었으니 다름 아닌 형 민준호. 박현호가 악수를 나누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사람이 그의 형인 민준호였다.

    “어, 형!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이야기는 들었어. 채널 DBN의 전무가 되었다면서?”

    “사람들 많이 안 보는 종편일 뿐이에요.”

    “괜히 그럴 것 없어. 직책이 전무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대표나 다름없다는 거 다 아니까. 그만큼 회장님께 믿음을 줬다는 거 아니겠냐? 참, 무슨 드라마 제작사도 하고 있다고 했지?”

    “네, 뭐. 그냥 드라마 몇 편 제작하는 수준이에요.”

    “아무래도 동생이 그쪽 일을 하다 보니 없던 관심도 생기네.”

    민준호의 말에 박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안부 인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었다. 하지만 동생이 자신을 주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민준호는 일부러 보란 듯이 동생의 경쟁 상대나 다름없는 박현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지난 주말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6년 동안 인도에 나가 있으면서 조병배에게 시켰던 중요한 임무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경 실장의 행방. 일이 벌어지고 난 직후 외국으로 나가 자취를 감췄던 경 실장이 얼마 전에야 한국에 돌아왔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경 실장의 소재지를 알아냈다는 조병배의 말에 그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경우에게 받은 돈으로 지방에서 떵떵거리며 유지 생활을 하고 있던 경 실장은 민준호의 등장에 저승사자를 만난 듯 하얗게 질렸다.

    ‘경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이, 이사님. 여, 여긴 어떻게……?’

    ‘내가, 그동안, 경 실장님이 어디 있었는지 몰랐을 것 같습니까?’

    ‘…….’

    ‘그리고 나 이제 이사 아닙니다. 상무로 승진했거든요. 사람 죽인 것도 아닌데 아무렴 우리 아버지가 저를 내치기야 하겠습니까?’

    당장이라도 서릿발이 내릴 것 같은 기세에 경 실장은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황급히 민준호에게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제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세요. 누가 보면 사람 잡는 줄 알겠네. 됐습니다. 뭐, 그때야 사정이 있었던 거겠죠.’

    ‘…….’

    ‘우리한테는 시간이 많잖아요? 종종 만나서 차나 한잔합시다. 이번엔 숨고 그러는 거 하지 말고요. 애들이 있는 애틀란타까지 가서 만날 순 없잖아요. 안 그래요?’

    어디 있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인도로 떠나며 그가 결심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다시는 자신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는 일 따위는 없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자신을 향해 몸을 떠는 경 실장의 모습에 그는 목표를 달성한 것 같아 흡족했다.

    지금을 위해 6년을 숨죽이고 살아왔다. 이번에는 좀 더 제대로 동생을 교육시킬 참이었다. 6년도 기다렸는데 몇 달이야 못 기다리겠는가. 천천히 당한 것 이상으로 갚아 주겠노라고 다짐했다.

    멀리 자신을 보고 있는 동생을 향해 손을 들었다. 굳어진 동생의 얼굴이 참 볼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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