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4화 (164/250)
  • #164. 탕자의 귀환 (4)

    보는 순간 신도현 작가의 새 작품에 매료된 김은기는 자신과 작품을 같이하자고 애원했다. 결국 신도현의 승낙을 받아낸 그는 편성을 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김동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아주 우연이었다.

    하필이면 사람 많은 엘리베이터 안, 몇 사람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렸다. 아는 이름이 들리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야기에 집중하고 말았다.

    “이번에 제작 본부를 신설한다면서요?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지금 하던 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방송 환경이 점점 달라지고 있잖아. 예전엔 TV 말고는 별다른 매체가 없었는데, 요즘은 핸드폰 들고 다니면서 보니까 시청률도 많이 떨어졌고, 위기의식을 느낀 거지. 부서를 새로 만든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긴 한데, 어쨌든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낫다는 위안이라도 얻으려는 거 아니겠어?”

    “그럼 초대 제작 본부장은 누가 될 것 같아요?”

    “어차피 보도부는 빠질 테니까 예능국이나 드라마국 국장 중 하나겠죠?”

    “이건 내 생각인데, 김동권 국장이 되지 않겠냐?”

    “김 국장님이요? 그래도 뚜껑은 열어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예능5국 안재호 PD님도 활약 대단했잖아요.”

    “으음, 김 국장이라면 몰라도 안 PD는 승진에 관심 없어.”

    “에이, 세상에 승진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딨어요? 안 그런 척하면서 속으로 다 하는 거죠.”

    “아니, 안 PD는 예능 프로 만드는 거 말고는 다 관심 밖이야. 예능 5국을 따로 만든 것도 그 이유잖아. 성과가 있으니까 승진은 시켜 줘야겠는데, 제작에서 손 떼게 할 순 없으니 예능 5국 만들어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응? 그래서 국장이라고 안 하고 계속 PD라고 부르잖아. 그리고 요즘 안 PD 프로가 MBS 예능 다 먹여 살리고 있는데, 그런 사람 제작에서 손 떼게 하겠냐?”

    “그런가?”

    “선배님 생각엔 김동권 국장님의 승진이 확실하다는 거죠?”

    “확실까지는 몰라도 유력하다는 거지. 예능국은 5개나 있어서 그중 하나 누구 올리기도 힘들잖아. 그리고 아무리 예능 시청률이 좋아도 대박 난 드라마 하나만 못하고. 요즘 들어서 대박작은 없는데, 반대로 생각하면 시청률이 망한 것도 없어. 거기다 처음 김 국장이 맡았을 때 드라마국 사정이 별로였는데 수습한 거 보면 명분은 충분하지.”

    “듣고 보니 그러네요. 라인 없는 김 국장님이 어쩌다 국장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별일이라고 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런 사람이 본부장이라니…… 진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요.”

    “그럼, 김 국장님이 제작 본부장이 된다 치고 공석이 된 드라마국 국장은 누가 차지할까요?”

    “황성준 CP가 그렇게 이사진들 만나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황 CP가 국장이 되는 건 아닐까요?”

    “아무리 그래도 황 CP는 아니지 않냐? 요즘 별다른 활약도 못 하고 있잖아.”

    “확실히 김 국장님이 국장 된 뒤로는 이렇다 할 게 없긴 했어요.”

    “전 그 산적 같은 PD 그분…… 아, 이름이 뭐였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김은기 PD?”

    “맞아요, 김은기 PD님! 그분이 되지 않을까요?”

    “확실히 요즘 김 PD, 나쁘지 않지.”

    “아, 김 PD가 김 국장님 라인이었죠? 맞네, 맞아. 차기 국장은 김 PD가 확실해요!”

    마침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떠들던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자 한쪽 구석에서 몸을 구기고 있던 김은기가 다시 층수를 눌렀다. 김동권의 등장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하필 거기서 자신의 이름까지 나오자 내리지도 못하고 몸을 구긴 채 서 있어야 했다.

    그나저나 드라마만 신경 쓰느라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던 그는 편성 문제도 있고 하니 내친김에 국장실로 향했다.

    “어쩐 일이야? 평소엔 코빼기도 안 보이면서.”

    “편성 좀 받으려고요. 신도현 작가 작품, 보시면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그래? 이번엔 신도현 작가 단독이야? 아님 공동이야? 그쪽은 여럿이 하는 거 선호하잖아.”

    “단독이에요. 국장님 좋아하시는 작품성에 상업성 다 있으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도 용케 신 작가 잡았네.”

    “청모한테 소스 좀 얻었죠. 신 작가 새 작품 좋다고요.”

    “청모 그놈, 요즘 어떻게 지내? 어째 그놈은 나간 뒤로 통 소식이 없어?”

    “원래도 국장님하고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잖습니까?”

    “옛날에 그렇다고 지금도 그럴 거 뭐 있어? 지금은 회사 나갔으니 우리랑 아예 상관없을 것 같아도 사회생활이라는 게 어디 그래? 무 자르듯 딱 잘라지고 그런 거냐고? 자네도 알 거 아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 기회에 친분도 쌓고 그러면 저도 좋고 나도 좋고 그런 거지. 안 그래?”

    김동권의 말에 김은기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보고 있었다.

    “뭘 또 그렇게 봐?”

    “아닙니다. 그냥 누가 누구한테 해야 할 소리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뭔 소리야?”

    “차차 아시게 될 겁니다.”

    “어쨌든 청모 그놈, 그래도 나가서 잘된 거 보면 그쪽이 잘 맞나 봐?”

    “듣자 하니 제약이 별로 없더라고요. 스튜디오 글로리가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제작비가 좀 들어도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 왔잖아요. 그러니 실험적이어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면 시도하는 편이라 하더라고요. S&Media도 거의 비슷한 분위기라고 하구요.”

    “그래? 어쨌든 잘됐어. 그래도 둘이 사이좋은가 봐. 어떻게 보면 서로 경쟁 상대 아냐? 그런데도 신도현 작가 작품 이야기해 주는 거 보면 신기하단 말이야.”

    “요즘 그쪽에 시놉 몰리고 있는 건 우리도 알고 있잖아요. 어쨌든 제작할 수 있는 편 수는 정해져 있는데 작품은 밀려 있으니 마냥 기다리라고 하긴 그랬겠죠. 덕분에 저한테도 기회가 온 거구요. 다행히 민 작가도 여건만 된다면 제작사든 방송국이든 가리지 않고 밀어준다니 잘됐죠.”

    “그러고 보면 경우가 일은 참 잘해. 이거 따지고 저거 따지다 결국 엎어진 작품이 어디 한둘이야? 그러다 제작 시기 놓쳐서 세상 구경 한 번 못 해 보고 아예 묻혀 버린 경우도 허다하잖아. 어쨌든 그때 경우랑 같이 일한 건 진짜 신의 한 수였지.”

    고개를 끄덕이던 김은기는 김동권의 눈치를 살피다 슬쩍 말문을 열었다.

    “승진하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그런 소문이 돌아? 어디서? 누구한테 들었는데?”

    “아닙…… 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김동권이 입을 열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냐. 그냥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뿐이지.”

    “정말요? 국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면 거의 확정 아닙니까?”

    “아직은 아니라니까 그러네. 괜히 어디 가서 입방정 떨지 마. 그러다가 될 일도 안 된다.”

    “이미 뒤에서 다 떠들던데요? 그 정도면 거의 확정이나 다름없습니다. 솔직히 국장님 말고 거론될 만한 사람도 없잖아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긴 하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전임 국장이 자기 뒤를 맡으라고 할 때는 이 양반이 나한테 독이 든 성배를 주려고 하는구나 생각했지. 얼마 못 하고 쫓겨날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더 위로 올라가시게 됐네요.”

    “그러게나 말이다. 열심히 산 보람이 있다.”

    잠시 옛 생각에 미소 짓던 김동권은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는 김은기에게 말했다.

    “김 PD, 편성 내줄 테니까 이번 드라마 잘해 봐. 다행히 신도현 작가 작품인 거 보면 김 PD도 운이 없진 않은 모양이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이긴, 내가 승진하면 내 자리 빌 거 아니야. 내 후임으로 김 PD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 그 소리지. 이왕이면 난 김 PD가 됐으면 좋겠거든.”

    “혹시 저한테 독이 든 성배를 건네시려는 건?”

    “그럴 리가 있냐? 내가 너 끌어 주겠다는 거잖아.”

    “됐습니다. 제 주제에 무슨. 안 그래도 사람들이 제가 국장님 라인이라고 쑥덕거려요.”

    “맞잖아, 뭘 새삼스럽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가 이끌어 줄 테니 너도 나 좀 밀어주고 서로서로 돕고 살아 보자. 밑에서 단단히 받쳐 주는 사람 있어야 위에서도 오래 버티는 법이다. 나 아직 그만둘 생각 없어.”

    “그 정도면 욕심이 너무 과한 거 아니십니까?”

    “내가 나 좋자고 이러는 거 같아? 드라마국도 좀 변해야지. 경우는 하루아침에 바꿔 버렸는데 우리 MBS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그러니까 김 PD가 도와주라 이 말이야. 힘 좀 보태 줘라, 응?”

    그렇게까지 말하자 결국 김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안심이 된다는 듯 김동권이 웃었다.

    “신도현 작가가 슬럼프 극복해서 다행이야. 난 그때 청모 사고 났을 때 신 작가 절필하는 줄 알았어. 스튜디오 글로리로 간 뒤로도 소식이 뜸해서 걱정했잖아. 차기작 대박 나긴 했어도 경우랑 공동 집필이었잖아. 이번 드라마는 어때?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걱정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그럼 됐어. 잘만 해. 그럼 뒤는 내가 봐줄 테니까.”

    안청모가 장난스럽게 국장이 되라 할 때만 해도 그냥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뭔가 김은기는 복잡미묘해졌다.

    * * *

    “고정시? 형이 고정시에 갔다고?”

    “응.”

    “거길 왜? 이제 와 복합 쇼핑몰에 숟가락 얹을 리도 없을 텐데?”

    새명 유통에서 추진하는 가장 큰 사업인 복합 쇼핑몰은 3년 전 사업권을 따내 착공을 시작했다.

    성장에 한계가 있는 새명 유통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였기 때문에 민지선은 복합 쇼핑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쏟고 있었다.

    착공이 시작되기 전부터 매일 건설사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며 직접 발로 뛰어 복합 쇼핑몰의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챙겼다. 거기다 자신이 모르는 것은 배워서라도 임하는 그녀의 열정에 모래밥 먹으며 임원까지 오른 자존심 센 중역들 또한 민지선에게 마음을 열어 갔다.

    그런 이들의 열정 덕분에 이제 완공을 앞두고 있었으니 아무리 민준호가 관심을 갖는다고 해도 그가 끼어들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래도 궁금했겠지. 명색이 새명 건설 상무잖아. 귀국한 이후로는 새명 건설로 매일 출근하는데 복합 쇼핑몰이 그냥 그런 프로젝트는 아니잖아. 우리도 가서 보고 얼마나 놀랐냐? 클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커서 말이야. 완공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거겠지. 뭐 내 생각은 그렇다고.”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거 말곤 다른 거 없었어?”

    “어. 정시 출근해서 정시 퇴근. 회사에서도 업무에 집중하는 모양이더라고.”

    “인도에선? 어땠는지 들었어?”

    “생각했던 것보다 모범생이야. 완전 일만 했더라고. 인도에서 따낸 사업권이 제법 되잖아. 그 덕에 회사 내에서도 입지가 괜찮은 모양이고.”

    경우는 이번 기회에 누나가 건설까지 장악하길 바랐는데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준호 형이 인도까지 가서 일에만 파묻혀 있었을 줄은 누가 알았냐?”

    “그러게, 형은 항상 내 예상을 뛰어넘네. 다른 건 더 없어?”

    “어, 별로 특별한 건 없어. 퇴근 후엔 주로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 만나서면 그렇게 지내더라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그렇게 노는 건 아니고. 준호 형 친구들 중에 결혼 안 한 사람 준호 형밖에 없으니까 다들 눈치 보고 사는 거지.”

    “그렇다고 못 노는 거 아니잖아. 안 보이는 데서 놀 텐데.”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 입장에서 요란하게 놀면 되겠냐? 몸 사리지. 지금은 좀 밀렸어도 한때는 후계자로 거론되는 사람 중 하나였는데 어쨌든 지켜보고 있는 눈이 많잖아.”

    “하긴. 우리 형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지. 어쨌든 계속 지켜봐 줘.”

    “알았다. 참, 상견례 날짜는 잡혔어?”

    “어, 다음 주.”

    “준비해야 할 건 없어?”

    “내가 결혼하냐? 준비는 무슨.”

    “그런가? 근데 지선 누나 결혼하고 나면 이제 준호 형이나 네 차례도 오는 거 아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기는. 나도 집에서 결혼은 안 할 거냐, 선은 안 보냐, 얼마나 눈치 주는데? 그동안은 누나가 방패막이가 돼 줬지만 누나 결혼하고 나면 이제 네 차례일걸?”

    김강철의 말에 경우는 그제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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