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3화 (163/250)
  • #163. 탕자의 귀환 (3)

    “원래 형제들은 다 저러나?”

    외동으로 자란 탓에 형제 많은 주변 친구들의 불만을 들어 왔던 안청모는 혼자인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혼자 지내다 보니 티격태격하면서도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차츰 부러워졌다. 평소엔 사이가 나빠도 무슨 일이 있을 때 결국 나서는 건 혈육이었으니까.

    하지만 경우와 민준호, 두 형제의 모습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얼굴은 웃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마치 냉동실에 들어온 것처럼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두 사람 사이에 그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S&Media로 돌아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잡아타려던 그는 그 앞 휴게실에서 혼자 앉아 있던 신도현을 발견했다. 회사를 옮긴 이후 그를 본 게 꽤 오랜만이라 반가웠던 안청모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손에 든 무언가를 보느라 집중한 탓에 그는 안청모가 다가오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작가님!”

    “아, PD님. 오랜만이네요. 회사 옮기고 나니까 얼굴 뵙기가 참 힘드네요.”

    “그러게요.”

    “회사 옮겨서 좋으셨나 봐요. 얼굴이 좋아지셨어요.”

    “그래요? 그런 건 아닌데…….”

    일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이었으니 안청모는 괜히 웃음이 났다. 그런 사정을 신도현이 알 리 없는데도 괜히 뜨끔한 안청모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일이라는 게 다 똑같죠. 그쪽도 거의 비슷해요. 대신 다른 방송국들보다는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 어차피 케이블 시청률이 높지 않아서 그런지 그렇게 부담은 없달까? 근데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가 대박 나는 바람에 다들 어깨에 뽕이 좀 들어가긴 했어요.”

    “그러시구나.”

    “근데 그건 뭐예요?”

    “그게…… 차기작을 써야 할 것 같아서 초안을 잡고 있었어요. 근데 결말 부분이 좀 막혀서 장소를 바꾸면 생각날까 싶어서 보고 있던 거예요.”

    신도현의 차기작이라니, 없던 관심도 생겨날 판이었다. 눈을 반짝인 안청모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 한번 봐도 돼요?”

    “그게…….”

    “에이, 그래도 우리가 정이 있는데 서운하게.”

    망설이는 신도현의 모습에 안청모가 일부러 엄살을 부렸다.

    신도현의 입봉작을 맡았던 사람이 다름 아닌 안청모. 결국 사고가 나 끝까지 함께 하진 못했지만 경우를 만나기 전 가장 의지했던 사람이 안청모였으니 그런 안청모의 반응에 신도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가뜩이나 사고 난 이후 그 일로 한동안 안청모가 제대로 일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게 된 신도현은 괜히 그에게 마음의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게 약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아직 민 작가님께도 안 보여 드린 건데…… PD님만 살짝 보여 드릴게요.”

    “진짜요? 어쩐지 두근두근하네요.”

    신도현에게 시놉시스를 받아 든 그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단막극 공모전에서 당선된 이후 인턴 작가 시절 남들이 단막극을 쓸 때 그는 미니시리즈 대본을 썼다. 덕분에 인턴 작가임에도 단막이 아닌 미니로 입봉했으니 그 작품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제로섬>.

    안청모의 사고로 중간에 결방을 했지만 신인 작가임에도 시청률 1위는 물론, 화제성까지 끌어모으며 신도현이라는 이름을 알렸다. 근래에 보기 드문 화려한 데뷔였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이었는지 차기작을 쓰지 못해 한동안 힘들어했다. 그러다 결국 경우의 도움으로 슬럼프를 극복하고 <뫼비우스>로 복귀에 성공, 당연히 그의 작품에 관심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세 번째 작품. 첫 작품만큼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건 아니었지만 훨씬 정돈되고 안정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거기에 신도현 특유의 기발한 발상도 번뜩이고 있었다.

    “좋은데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어서 민 작가한테 말해 봐요. 당장 제작하자고 할 텐데.”

    “좀 더 이따가요.”

    “왜요? 제가 보기엔 작품 괜찮은데? 곧바로 제작 들어가도 손색이 없겠어요.”

    “그렇다기보다 작가님 미국에서 돌아오신 지도 얼마 안 됐고, 거기다 지금 아카데미 일까지 맡으셔서 바쁘시거든요. PD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제작 대기 중인 작품도 꽤 되잖아요.”

    “그런 걸 왜 작가님이 걱정하고 있어요? 작가는 글만 쓰면 되는 거지. 정 그러면 김 대표님께 말씀드려요.”

    “조금 더 정리하고요. 솔직히 말하면 다른 건 핑계고, 제가 아직 자신이 없달까? 그래도 PD님 덕분에 자신감이 조금 생긴 것 같아요.”

    “하여간 작가님은 이게 문제야. 본인 실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니까. 작가님은 민 작가가 인정한 천재예요.”

    “아휴, 그러지 마세요. 저 진짜 부끄럽게.”

    “그러니까 걱정 마시라구요. 시놉만 봐도 진짜 재밌어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화를 마친 안청모는 겨우 스튜디오 글로리를 빠져나왔다.

    “그나저나 우리 쪽도 편성 스케줄 꽉 차서 바쁜데.”

    안 봤으면 모를까 이대로 놓치기 아쉬운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제작하기엔 솔직히 버거운 것도 사실. 방금 전 경우에게서 S&Media에 들어온 시놉 중에서 꼭 편성해야 한다고 목록을 받아온 참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작품들도 다 때가 있는 건데 계속 기다리게 하는 것도 영 아니었다.

    마침 다가온 택시를 잡아탄 안청모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 선배. 접니다. ……왜긴요. 할 말이 있으니까 전화했죠.”

    그렇게 달리는 택시 안에서 그는 통화를 이어 나갔다.

    * * *

    “뜬금없이 전화해선 갑자기 뭔 소리야?”

    다짜고짜 전화한 안청모 탓에 김은기는 어리둥절했다. 앞뒤 말 다 잘라먹고 신도현 작가 신작이 좋다니.

    좋으니까 좋다고 한 거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경쟁사 사람인데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좋으면 자기 쪽에서 편성하면 될 걸 굳이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전화까지 한 걸 보면 챙겨 주려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이대로 넘겨 버리기에도 그랬으니 김은기는 일단 신도현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최근 MBS 드라마에 대박작이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만약 신도현 작가의 작품으로 대박을 칠 수 있다면 그동안 밀려났던 MBS 드라마국의 자존심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김은기는 서둘러 신도현에게 전화해 차기작 문제로 상의하고 싶다며 일단 약속을 잡았다.

    * * *

    햇볕에 잘 그을린 탓인지 전보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전체적으로 병약한 이미지를 날려 버렸다. 운동도 열심히 한 건지 몸도 좋아진 게 민준호는 상남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경우가 살짝 긴장했음을 알아차린 민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 풀어. 선전포고 하러 온 거 아니니까.”

    “긴장하긴. 그냥…… 형이랑은 오랜만이니까 좀 어색해서 그러지. 나 일하는 데서 형 보는 거 처음이잖아.”

    “그러게. 형인데도 내가 그동안 너한테 형 노릇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 너한테 미안했다는 소리를 하고 싶었어. 그 말 하려고 부모님 다음으로 제일 먼저 너 찾아온 거고.”

    “갑자기?”

    “너한테 갑자기일지 몰라도 난 아냐. 떠나 있는 동안 나한텐 6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잖아. 그 시간 동안 생각 많이 했다. 처음엔 내가 왜 그런 곳으로 가야 하나 원망 많이 했는데, 돌이켜 보면 형인데 내가 너한테 잘해 준 게 하나도 없더라.”

    “…….”

    “네 말이 맞아. 널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고립시키려 했어. 그래서 내 마음대로 널 휘두르려고 했지. 그래서 너한테 상처 줬고. 너한테 사과를 하고 싶었는데, 차마 그럴 용기도 없었어.”

    “지금은? 없던 용기가 생긴 거야?”

    “아직도 내 원망 많이 하는구나? 어릴 때 철모르고 한 잘못이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되겠니? 그땐 다른 생각 못 했어. 너도 알다시피 어머닌 새명에 집착하고 계셨잖아. 어머니를 위해서 내가 새명의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 근데 아버지는 형만 보니까 그래서 불안했던 것 같아.”

    “…….”

    “물론 변명처럼 들린다는 거 알아. 근데 그 모든 게 나한텐 스트레스였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네가 어리니까, 네가 만만하니까, 그 스트레스를 너한테 다 풀려고 그랬나 봐. 진짜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하고 싶었어.”

    “됐어, 다 지난 일인데 뭐.”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

    “형 말대로 난 형한텐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잖아.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믿고 의지하는 건 형제밖에 없다는데 나도 형 그렇게 인도로 가서 마음 편치 않았어.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제라도 좋게 지내자. 다른 형제들처럼.”

    “그래, 그러자. 바쁜 것 같은데 그럼 이만 가 볼게. 이따가 술이나 한잔하자.”

    “좋지. 뭐 예전처럼 그렇게 놀지는 못하겠지만.”

    경우의 말에 민준호가 피식 웃었다. 웃음 가득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민준호가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던 순간 경우의 얼굴에 희미하게 어린 미소가 사라졌다.

    미안해? 용서?

    경우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자고로 할머니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렇게 말씀하셨지.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반성했다고? 달라졌다고? 천하의 민준호가?

    분명 그의 얼굴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경우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람에 따라 가면을 바꿔 쓰면서 다르게 대했다. 그러니 하나뿐인 제 동생에게 세상 좋은 형인 척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스스로 쳐 내도록 만들었던 거겠지.

    그게 안 먹히니까 방법을 바꾼 것일 뿐, 그는 민준호가 달라졌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두고 보면 알게 될 일.

    경우는 일단 전화부터 걸었다.

    “나야, 퇴근하고 별일 없으면 여기로 좀 와 줘. 할 일이 있어.”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투덜대며 김강철이 들어왔다.

    “뭔데? 뭔데 사람을 오라 가라야?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형이 왔어.”

    “형? 누구? ……설마 준호 형? 아니, 왜? 회장님이 용서하신 거야?”

    “그게 아니라 누나가 결혼하거든. 아무래도 상견례도 있고, 결혼식도 누나 성격상 오래 끌진 않을 테니까 겸사겸사 온 거겠지.”

    “뭐? 지선 누나 결혼해?”

    “야, 귀청 떨어지겠다!”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지선 누나가 결혼한다는데? 야, 난 지선 누나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는데 지선 누나가 결혼이라니…… 지선 누나가…….”

    “너, 너무한 거 아니냐? 우리 누나도 알고 보면 평범한 여자야.”

    “…….”

    “왜?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 해. 지선 누나 독하다고 험담하고 다닌 건 너거든? 네가 그러니까 너무 이상하다.”

    “크흠. 어쨌든 형한테 사람 좀 붙여. 어딜 가서 누굴 만나는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알아봐야겠어. 어설프게 하는 사람 말고 제대로 하는 사람으로 안 들키게 조심껏. 알지?”

    “준호 형, 아직도 그 모양이야?”

    “모르겠어. 근데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는 건 아니잖아?”

    “오케이. 일 제대로 하는 사람 붙여 놓을 테니까 걱정 붙들어 매셔!”

    “그리고 또 하나, 인도에서 형이 뭘 하고 지냈는지 그것도 알 수 있을까?”

    “그거야 식은 죽 먹기지. 인도에 형만 간 게 아니잖아.”

    인도의 인프라 건설을 위해 새명 건설 사람들이 상당수 건너갔다. 그런 사람 중 하나를 매수하면 된다는 이야기였으니 경우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돌아온 민준호 탓에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경우는 절대 방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시각, 차를 타고 이동하는 민준호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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