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탕자의 귀환 (2)
차가 없는 남자 친구를 바래다줘야 한다며 따라 나간 딸의 모습을 떠올린 윤정숙은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기사야 뭐야?”
딸을 이용해 먹겠다는 것도 모자라 벌써부터 기사로 부려 먹고 있는 모습에 윤정숙은 화가 났다. 말끝마다 제 남자 친구 편만 드는 딸도 마음에 안 들었다. 두 사람을 어떻게 하면 떼어 놓을 수 있을까 궁리하던 그때, 그녀 앞으로 찻잔이 내밀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들어 보자 어느새 민 회장이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이게 뭐예요?”
“카모마일. 함양댁 아주머니께 여쭤 보니 당신이 그거 자주 마신다고 하더군.”
“당신이 어쩐 일이에요? 생전 안 그러던 사람이?”
“아무래도 당신, 심신 안정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오래 살고 보니 당신한테 이런 대접도 다 받아 보네요.”
“이럴 땐 그냥 고맙다고 하는 거야.”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아내의 눈빛에 민 회장은 민망함에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뭘요?”
“아까 그놈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긴 뭘 어떻게 생각해요? 내 딸을 이용하겠다고 하잖아요. 그런 놈 지선이 옆에 두는 거, 나 용납 못 해요. 당장 눈앞에서 치워 버려야겠어요. 차라리 외국으로 보내 버릴까 봐요.”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그거 무슨 뜻이에요? 그럼 둘이 결혼이라고 시키자는 거예요? 제정신이에요?”
“적어도 그놈, 솔직하잖아. 괜히 잘 보이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할 수도 있었어. 근데 안 그랬잖아. 겉 다르고 속 다른 놈은 아니란 거지.”
“난 그래서 더 싫어요. 지선이 마음 잡았다고 우리한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도 없는 거잖아요, 지금.”
“그렇진 않을 거야. 오히려 거짓말을 하는 게 기만일 수도 있잖아. 그리고 사내라면 그 정도의 욕심은 있어야지. 너무 욕심 없는 것도 흠이야.”
“당신 설마, 그놈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럴 리가.”
“그럼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어요. 뒤는 내가 알아서 해요.”
“지선이가 가만히 있겠어? 보나 마나 길길이 날뛸 텐데.”
“당신은 지금 누구 편이에요?”
“지금 네 편, 내 편이 어딨어? 나도 걱정되니까 이러는 거 아냐.”
“걱정되면 애가 바른길로 가도록 인도해야죠. 그놈 계속 만날 거면 대표직 해임시키겠다고 해요.”
“당신, 잊었어? 아버지가 지선이 물산 넘보지 못하게 한다고 적자만 나오는 유통 물려주셨지. 그러면서 계열 분리 확실히 했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선이가 대표직 맡아 흑자로 전환했고. 지선이 옆에서 일하는 사람들, 다 지선이 사람이야. 우리 마음대로 해임시킬 수 없어.”
“지선이가 결국 원하는 건 물산이에요. 유통에 만족할 아이가 아닌 거 당신이 잘 알잖아요. 그러니까 그걸로 뭐라도 해 봐요. 회사를 선택할지 그놈을 선택할지 결정하라고 해요!”
“우리가 막는다고 지선이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지금까지 온 애야. 그렇게 한다면 아마 다른 방법을 찾겠지.”
“그래서 어쩌라구요?”
윤정숙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해 본 것일 뿐.
“지선이 소원 들어주자구. 당신이나 나나 지선이가 원하는 거 해 준 적 없잖아.”
“그래서 그런 돼먹지 못한 놈을 지선이 짝으로 해 주자 그 말이에요? 당신, 아버지란 사람이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도 그놈 마음에 안 들어. 근데 우리 딸이 죽을 때 같이하고 싶은 사람이라잖아. 이번에 지선이 그놈하고 헤어지게 만들면 지선이 정말 결혼 안 할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누구한테 쉽게 마음 주는 애 아니잖아. 처녀 귀신으로 늙어 죽게 만들 순 없잖아. 안 그래?”
처음 안청모와 만났을 때만 해도 민 회장의 마음은 탐탁지 않았다. 지선과 결혼까지는 생각 없다고 해 놓고 이제 와 거짓말을 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사람을 붙어 안청모의 뒤를 살펴본 민 회장은 솔직히 놀랐다. 딱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초반에 운이 좋지 않았던 것과 달리 방송국에서의 평판도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연출자로서의 능력도 괜찮았다.
특히나 놈을 만나고 난 이후 딸의 얼굴이 밝아진 게 무엇보다 마음이 쓰였다. 윤정숙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동안 관심 밖이라 딸이 뭘 원하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늘 다른 자식들에 비해 뒷전이었다. 그런 딸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한몫하고 있었다.
“분명히 후회할 거예요.”
“품 안의 자식이야. 다 큰 자식 감 놔라, 배 놔라 할 순 없어. 이제 지들 인생 알아서 살라고 내버려 둡시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 인생 살아야지.”
“…….”
“이제라도 당신이랑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윤정숙이 외국에 가 있는 동안 민 회장은 하루 세 번 꼬박 문자를 보냈다. 뭘 먹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아도, 답장을 하지 않아도 민 회장은 사진까지 찍어 자신의 안부를 보내왔다.
그런 남편의 정성 때문이었는지 윤정숙의 마음도 떠날 때보다는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우리 딸이 고른 놈이야. 그러니 그놈을 볼 게 아니라 지선이를 봅시다. 지선이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모습, 난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아.”
남편이 결국 이렇게 나오니 그녀도 더는 반대할 수 없었다.
그렇게 민지선의 결혼 문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수월하게 해결되었다.
둘째인 민지선의 결혼이 거의 확정되자 양가 상견례를 위해 인도로 보냈던 셋째 민준호 역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민 회장은 잠시 들어오라 이른 거였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이대로 또다시 인도에 처박힐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한국에서 버틸 생각이었다.
입국장을 나온 그를 발견한 조병배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오랜만이네, 우리 병배.”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상무님!”
“둘이 있을 땐 그럴 것 없다니까.”
“아닙니다. 이게 편합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고.”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던 경두열 실장의 배신으로 모든 것을 잃었던 그는 그렇게 인도로 쫓겨났다. 하지만 경두열 실장조차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같은 학교 후배인 조병배를 회사에 몰래 심어 두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새명이나 그의 가족에게 일어났던 일을 전해 준 것도 모두 그였다.
덕분에 민준호는 한국 소식에 빠삭할 수 있었다.
조병배는 민준호에게서 캐리어 하나를 건네받고는 물었다.
“짐은 이게 전붑니까?”
“어. 언제든 가방 하나면 돌아올 수 있게 그러고 살았다, 내가. 자그마치 6년이나.”
“앞으로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당연히 회사로 가야지. 일단 아버지 만나고 어머니도 만나야지. 그런 다음…… 하나뿐인 동생도 좀 만나고. 아무래도 바쁘겠지?”
“차 대기시켜 놨습니다.”
“오케이!”
민준호가 차에 오르자 차는 곧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이런 대박작은 빠뜨리면 안 되지.”
경우는 S&Media에서 보내온 시놉들을 하나씩 꼼꼼히 살폈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확실히 강점이었으니 다 비슷해 보이는 시놉시스 속에서 경우는 쏙쏙 대박작을 건져 냈다. 각기 다른 방송국에서 제작된 드라마였으나 이제는 모두 S&Media에서 제작할 계획이었으니 방송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진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로 그때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건 안청모였다.
“형님!”
“방해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이야기 들었어요. 결국 결혼 승낙 받아 내셨다면서요?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나도 지금 얼떨떨하네. 솔직히 반대하실 거라 생각했거든.”
“누나한테 들었어요. 아니, 어떻게 거기서 그런 대답을 하실 수 있어요?”
“그게…… 내가 너무 강박적으로 네가 한 말을 되새기고 있었나 봐. 계속 그 생각을 했거든. 여긴 촬영장이다, 여긴 촬영장이다…….”
“이건 조언을 넘어선 거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누나를 이용하겠단 말을 해요? 아니다, 그 덕에 허락받은 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어. 네 생각 하니까 그때 일이 떠올랐지 뭐야.”
“어쨌든 큰 산 넘은 거 축하드립니다. 진짜 우리가 식구가 되네요.”
“그러게, 나도 실감이 잘 안 나.”
“아무리 식구가 돼도 봐주고 그러는 거 없습니다. 알죠? 사장님 되시려면 잘하셔야 할 겁니다.”
“사장이라니, 그럴 생각 없어.”
“왜요? 일만 잘하면 국장도 되는 거고, 사장도 충분히 될 수 있죠. 열심히만 하세요. 열심히만. 그럼 사장이 문제겠습니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렇다고 나도 슬렁슬렁할 생각 없어. 두고 봐, 내 진면목을 보여 줄 테니까.”
보지 않아도 안청모의 진면목은 잘 알고 있었으니 경우는 앞으로가 기대됐다.
“아, 이것 때문에 오셨죠? 정작 중요한 용건은 빠뜨리고 다른 소리만 했네요.”
“벌써 다 본 거야? 난 시간 좀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제가 누굽니까? 일은 확실히 하잖아요. 여기 이건 반드시 제작해야 한다고 하세요. 아무리 최태영 국장이 반대한다고 해도 형님이 밀어붙이셔야 합니다.”
“최 국장이라면 굳이 반대하진 않을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죠. 빨리빨리 작가들이랑 계약하고 편성 잡으라고 하세요. 꾸물거리다가 딴 방송국에 놓쳐서 후회합니다.”
“그럼 안 되지. 바로 편성 잡도록 해 볼게. 그리고 이번 구연하 작가 드라마 일본 쪽에서 리메이크 관련으로 문의가 들어왔는데 말이야.”
한창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들어오라는 소리가 없었는데도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의 얼굴을 보자 경우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안청모는 무슨 일인가 싶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오랜만이다. 인사하러 왔는데 손님이 계셨네?”
“그러게. 오랜만이네. 얼굴은 좋아 보이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 중요한 이야기는 얼추 끝난 것 같아 안청모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그만 가 볼게. 필요한 거 있으면 전화해.”
나가려는 안청모를 경우가 붙잡았다.
“……?”
“두 분 인사 나누세요. 이쪽은 저희 형, 지선 누나 동생이에요. 그리고 이쪽은 누나랑 결혼하실 분.”
“아, 처음 뵙겠습니다. 민준호라고 합니다.”
“네, 안청모라고 합니다.”
안청모는 재벌가 사람들이라고 해도 돈 쓸 때를 제외하곤 특별한 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경우는 물론이고 지선도 만나면 만날수록 소탈한 면에, 남매가 비슷한 게 집안 분위기 때문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안청모는 깨달았다. 같은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랐는데도 민준호는 두 사람과 전혀 다른 성향임이 확실했다. 그가 익히 알고 있었던 재벌가 사람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인사는 나중에 다시 하도록 하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 보세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거 잘 전해 주시고요.”
“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 ……다음에 봅시다.”
“네, 그럼.”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돌아 나오는 안청모는 형제간에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서둘러 나간 안청모가 문을 닫았다.
다시 만날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게 하필 지선의 결혼 때문에 지금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한 경우가 당황한 마음을 숨긴 채 형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앉아.”
“회사 좋네. 나 떠날 땐 이러지 않았던 걸로 아는데.”
“시간이 많이 흘렀잖아.”
“그랬지. 자그마치 6년이나 됐지.”
“언제 왔어?”
“오늘. 오자마자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너한테 바로 온 거야.”
“…….”
“너한테 할 말이 있었거든.”
자신을 바라보는 형의 눈빛에 경우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