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1화 (161/250)

#161. 탕자의 귀환 (1)

늘 듣던 벨소리였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그 소리가 불길하게 들렸다. 마치 뭔가가 다가오는 듯한 느낌에 서둘러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김예신이었다.

“예, 누나, 어쩐 일이에요? ……네? 어머니가요?”

어머니란 소리에 곁에 서 있던 안청모가 화들짝 놀랐다. 전화를 끊은 경우가 안청모를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한 걸음 다가갔다.

“설마, 어머니가 오신다는 게 형님 때문이에요?”

대답도 못 한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 있는 안청모의 모습에 경우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뭔데요? 아무렴 누나랑 결혼하는 건 아닐 테고……?”

“…….”

“뭐야? 진짜 누나랑 결혼해요?”

“아잇, 깜짝이야! 목소리 낮춰!”

“진짜? 진짜 형님이 우리 누나랑 결혼한다고요?”

“그렇게 됐어…….”

“아니, 내가 미국 다녀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나도 이럴 생각까지는 아니었는데 사람 마음이라는 게, 생각대로 되는 건 아닌 것 같아. 그래도 너한테 미리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온다고 왔는데 그나마도 늦은 것 같다……. 아무튼 미안하다. 내가 지선 씨 짝으로 많이 부족하겠지만―.”

“형!”

경우가 성큼성큼 다가가 안청모의 어깨를 딱 잡으며 물었다.

“혹시 우리 누나한테 약점 잡힌 거 있어요?”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네. 형님 인생도 있는 거잖아요.”

진지하게 걱정하는 경우의 얼굴에 안청모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사귄다고 할 때도 응원한다고 했지만 결혼은 엄연히 별개의 문제였으니 그는 경우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내 편 들어 주는 건 고마운데, 너 솔직히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이럴 땐 누나 걱정을 해야지.”

“내가 왜요? 형님이 우리 누나를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우리 누나요, 사막에 떨궈 놔도 거기서 옥장판을 팔 사람입니다, 우리 누나가.”

“그렇지 않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여린 사람이야.”

“그거야 형님 눈에나 그런 거죠. 쯧쯧쯧,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경우가 장난기는 거두고 진지하게 물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우리 누나가 그렇게 좋아요?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수줍어 대답도 못 하는 안청모의 모습에 경우는 그만 아찔해졌다.

그래, 사람 좋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전 생에 결혼도 하지 않았던 그가 결혼까지 결심한 걸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될지 짐작이 갔다.

옆에서 지켜봤으니 안청모의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는 경우는 지선을 위해서라도 두 사람이 결혼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식이 된 자신도 만만치 않은 집안이었다. 이런 곳에 평범하게 살아온 그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도 아버지였지만 이 집안의 최종 보스는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가 돌아왔다. 안청모를 보기 위해서.

“형님,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해요.”

“응?”

“아버지는 만나 보셨으니 아실 테고…… 자식으로서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저희 어머니, 보통 분 아닙니다.”

“지선 씨한테 물어도 별 얘기 못 들어서 그러는데 어머니는 어떤 분이셔?”

안청모의 질문은 경우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어떤 분이셨더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식의 행복 따위는 내던질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단순히 그런 말로 어머니를 표현할 순 없단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어머니와 우여곡절이 많았던 경우 입장에선.

“글쎄요. 누나가 대답 못 한 이유를 저는 알 것 같네요. 저희 어머니지만 솔직히 저도 어렵거든요. 아버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거란 거만 알고 계세요.”

경우의 말에 안 그래도 걱정 가득한 안청모의 얼굴에 그늘졌다. 촬영장에선 훨훨 날아다니던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걱정이 되기도 했다.

“형님, 이거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절대 주눅 들지 마세요. 결혼 허락받으러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차라리 드라마 촬영장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드라마 촬영이라고 생각을 해?”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이요. 제가 봤을 때 형님은 드라마 촬영장에서 제일 멋있거든요. 촬영장에선 연출자 말이 곧 법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시라구요.”

“어쨌든 고맙다. 반대하진 않을까 걱정했던 게 다 우스워졌어.”

“그 마음 변치 마세요. 나중에 저 원망하지 마시고.”

“내가? 왜?”

“형님 생각하면 반대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우리 누나 생각해서 찬성하는 거거든요. 어쨌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결혼, 형님이 손해야.”

“뭐야? 하하하. 그래도 네 덕분에 웃는다.”

“진짠데…… 어쨌거나 맹수 같은 사람들입니다. 상대가 약점을 보이면 바로 달려들어 물어뜯는다구요. 아셨죠? 그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그래, 기억하마.”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경우는 영 미덥지 못했다.

촬영장에서 했던 것 반만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솔직히 지난번 아버지인 민 회장과의 독대를 몰래 엿들었던 경우는 그가 어떻게 할지 안 봐도 보이는 것 같았다.

그저 어머니가 내뱉는 말에 그가 상처받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어쨌거나 안청모는 경우가 해 준 충고를 마음속에 새기며 민지선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입성했다.

높은 담벼락, 관리가 잘된 정원과 대궐 같은 집.

둘이 만날 땐 자꾸만 그 사실을 잊어버렸지만 안청모는 이제야 자신이 결혼을 결심한 여자가 새삼 대단한 집안의 사람임을 깨달았다. 크게 심호흡을 한 안청모에게 민지선이 물었다.

“준비됐어요?”

“네, 준비됐어요!”

“그럼 들어갑시다.”

두 사람은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반가워요. 나, 지선이 엄마예요.”

“안청모라고 합니다.”

지선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엄마를 빼닮은 모습에 안청모는 속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윤정숙이 걱정했던 것만큼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분명 한 소리 들을 거라 생각했는데 못마땅한 얼굴에 비해 민 회장은 별말 하지 않았다. 그렇게 민 회장과도 인사를 나눈 그는 윤정숙의 안내에 따라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어차피 저녁 시간이라 우리 먹는 밥상에 숟가락만 하나 더 놨어요. 어서 들어요.”

“네. 잘 먹겠습니다.”

안청모가 막 밥을 한술 떠먹으려는 순간.

“그래, 우리 딸이랑 결혼하고 싶다고요?”

숟가락을 내려놓은 안청모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근데 어머니, 말씀 편히 하세요.”

“그럴 수야 있나요. 진짜 가족이 된 것도 아니고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엄마!”

“목소리 낮춰! 언제 어디서건 예의를 지키라 하지 않았니?”

“그럼 엄마도 예의를 지켜 주세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뭐?”

“그리고 엄마가 뭐라고 하든 전 이 사람이랑 결혼할 거예요.”

“결혼이 너 혼자 좋다고 하면 되는 거라니?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야. 네가 생떼를 부린다고 선물 사 주듯이 승낙할 순 없는 법이란다.”

“엄마가 말씀하시는 건 결혼이 아니라 합병이잖아요. 철저한 비즈니스. 전 비즈니스가 아니라 결혼이 하고 싶은 거라고요. 죽을 때 내 곁을 지켜 줄, 내가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랑 하는 거요.”

“그래서 잘난 남자들 다 마다하고 네가 고른 남자가 이 사람이니?”

“네, 엄마가 골라 준 남자들보단 이 남자가 저한테 더 가치 있으니까요.”

“도대체 어디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없는데!”

“모르시잖아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으시잖아요.”

“이미 알아봤어!”

“그건 엄마의 기준에나 그런 거죠! 한 번이라도 제 입장에서 이 사람을 봐 주실 순 없어요? 엄마가 들이민 남자들 다 마다하고 딸이 결혼하고 싶다고 처음 느낀 사람이라고요!”

주눅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안청모는 자신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민지선의 모습에 뭉클했다.

평소 민지선은 표현을 잘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반대하는 부모님 앞에서 자신을 위해 이렇게 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동안 표현하진 않았지만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하자는 말도 그녀가 먼저 했다는 깨달음에 더는 이 여자의 보호를 받으며 온실 속 화초처럼 그렇게 있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경우의 충고도 있었으니.

“어머님!”

안청모의 목소리에 불이 붙었던 두 여자의 시선은 물론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던 민 회장의 시선까지 그에게 향했다.

“어머님 보시기에 제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거 잘 압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지선 씨 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되지도 못할 거구요. 그래서 지선 씨를 떠나는 게 지선 씨를 위하는 일이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지금 지선 씨한테 필요한 건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보다 지선 씨가 무엇을 하든 지선 씨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하고 지선 씨를 믿어 주는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지선 씨 곁에 있기로 결심한 거고요.”

능력이 있었음에도 딸이라서 언제나 밀려나야 했다. 뭘 하든 늘 관심 밖이었다. 그래서 형제들보다 다른 재벌 자식들보다 더 노력했고, 독하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하지만 안청모에겐 한없이 여리고 가여운 사람이었다.

“그 말은 가족인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는 뜻인가요?”

“네.”

망설임 없는 안청모의 대답에 윤정숙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사람들은 두 사람을 어떻게 볼까요? S&Media의 일개 PD와 대표이사, 안청모 씨의 생각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안청모 씨가 출세를 위해 내 딸에게 일부러 접근했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서 뒤에서 있는 말, 없는 말 지어낼 테고요. 그럼 두 사람은 상처를 받겠죠. 사랑으로 모든 걸 극복한다고요? 글쎄? 그런 게 가능하기는 할까요?”

“그럼 지선 씨 능력을 이용해 출세하죠, 뭐.”

“뭐, 뭐라구요?”

의외의 답변에 윤정숙과 민 회장이 놀란 것과 별개로 민지선은 풉 하고 웃어 버렸다.

어머니의 날카로운 시선에 곧 웃음을 거둬야 했지만.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 땐 그 소문을 진짜로 이용하는 것도 방법이라고요.”

경우와 안청모가 작가와 조연출로 처음 일하던 시절, 경우가 재벌을 등에 업고 돈으로 작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경제적 지원으로 그 소문을 사실로 만들어 버린 일화를 알고 있던 민지선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바꾸려 노력하는 대신 지선 씨 덕 좀 보죠. S&Media의 사장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허!”

제법 뻔뻔스러운 태도에 윤정숙은 물론 민 회장도 어이가 없었다. 분명 저번에 만났을 때는 저런 뻔뻔한 놈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싶었다. 그때 들어오는 딸의 웃는 얼굴.

결국 이놈을 이렇게 바꾼 건 딸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말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부러워하겠죠. 그 사람들한테는 지선 씨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결국 내 딸의 배경을 보고 결혼까지 하겠다 이 말이에요, 지금?”

“아니요, 그럴 리가요. 지선 씨의 배경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 지선 씨의 배경을 이용할 생각은 있다, 이 말씀입니다.”

예상치 못한 일격을 당한 윤정숙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뭐라 반격을 해야 했지만 쉽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저희 부모님은 제가 뭘 하든 항상 믿고 응원해 주십니다. 저도 지선 씨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줄 겁니다. 지선 씨가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애정 가득한 눈으로 안청모를 바라보고 있는 딸의 모습이 부부는 낯설었다. 한 번도 저런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독신을 고집했던 딸이 드디어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하지만 마음에 차지 않는 상대. 딸의 성격을 알기에 무조건 반대를 할 수도, 그렇다고 찬성을 할 수도 없는 상황에 놓여 버렸다.

* * *

그로부터 한 달 뒤, 인천 국제 공항 입국장으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음, 이 신선한 공기! 역시 한국이 제일이야.”

인도로 쫓겨났던 민준호가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쫓겨난 지 6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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