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60화 (160/250)
  • #160.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5)

    잔뜩 충혈된 퀭한 눈,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 안 그래도 피곤에 절어 있는 설영선은 계속되는 전화 통화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저희가 이번에 새로 런칭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첫 게스트로 진세훈 씨를 초대하고 싶은 거죠.”

    “아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진세훈 씨야말로 한국 가요계에 빼놓을 수 없는 전설이잖아요. 당연히 저희 프로에 첫 번째 게스트로 진세훈 씨만 한 분이 없죠. 그래서 제일 먼저 연락드린 거구요.”

    “그럼요, 그럼요. 당연히 상의해 보셔야죠. 그럼 제가 주말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 한 통화에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쉰 설영선은 물 한 모금으로 마른 입을 적셨지만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막내! 진세훈 씨 섭외됐어?”

    “그게…… 방금 전에 매니저와 통화했는데요, 지금 진세훈 씨 콘서트 준비 중이라 바쁘다고 본인이랑 직접 상의해서 주말에 다시 연락하기로 했는데요.”

    “야! 장난해? 주말까지 어떻게 기다려? 지금 당장 출연할지 말지 결정해야 안 되면 다른 사람이라도 섭외할 거 아냐? 넌 일을 왜 그런 식으로 해? 다시 전화해서 확실히 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고 하더니 분명 주말까지 확정하라고 했던 건 서브 작가였다. 그런데 이제 와 당장 알아내라니, 설영선은 어디다 하소연하지도 못한 채 막내라는 설움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

    콘서트 연습 때문에 아무래도 출연이 어렵다는 진세훈 매니저와의 통화 결과를 알린 설영선은 또 한 번 서브 작가에게 깨진 뒤 지친 마음을 달래려 옥상으로 향했다.

    땡땡이쳤다고 또 구박당하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이대로 있다간 서브 작가한테 달려들 것 같았다.

    S&Media의 음악 전문 채널 Mcom의 막내 작가인 설영선은 사실 영화 전문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TV에서 우연히 보게 된 <로마의 휴일>에 매료된 그녀는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를 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녀는 영화 전문 기자가 되기 위해 시험에 매달렸지만 번번이 낙방. 재수에 삼수까지 해도 기자와는 연이 없었는지 자신감마저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방송 작가를 하는 게 어때?’

    ‘갑자기 방송 작가는 무슨.’

    ‘왜? 영화 전문 채널도 있고 영화 관련 프로그램도 많잖아. 그런 프로그램 작가가 됐다고 쳐. 오여리 기자도 TV 출연 자주 하던데, 혹시 알아? 방송 작가 하다 보면 오여리 작가랑 같이 일하게 될지?’

    자신이 좋아하는 기자 오여리에 혹한 그녀는 결국 방송 작가로 일하게 된다. 방송을 통해 인맥을 쌓고 친분도 쌓이다 보면 기자 시험 노하우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오만이었으니, 방송 작가는 생각보다 만만한 직업이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일을 시작한 영화 정보 프로그램이 하필 종영을 한 것. 결국 다른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신생 음악 파일럿 프로.

    새벽 5시에 교통편도 마땅치 않은 곳에서 촬영 시작하니까 오라고 소집하지 않나, 게스트 섭외는 물론 장소 섭외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 레귤러로 편성되었으나 서브 작가의 히스테리를 감당해야 했으니 일하는 게 죽을 맛이었다.

    기자 시험을 치느라 삼수까지 한 뒤 취업을 했던 탓에 보통 막내보다 나이가 많아 자신을 갈구는 건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당장 그만두고 싶었지만 카드값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그래, 나라도 나랑 비슷한 나이의 막내가 들어오면 껄끄럽긴 할 거야. 그래도 나는 너처럼은 안 한다! 너 어디 얼마나 잘되는지 두고 볼 거야, 내가!”

    그렇게 서러운 마음을 토해 낸 뒤 다시 자리로 돌아간 그녀는 진세훈을 대신해 다른 가수를 섭외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던 참이었다.

    마침 그녀의 노트북 화면에 뜬 광고 영상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으니, 그것은 드라마 <다잉 메시지>의 광고 영상.

    “요즘은 드라마 광고를 이렇게도 하네.”

    사실 영화 덕후였던 탓에 드라마는 별로 보지 않았던 그녀는 포털 사이트 배너 광고를 자신도 모르게 누른 탓에 플레이된 영상에 매료되고 말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다잉 메시지> 전편을 봐 버리고 말았으니 꼬박 날을 샌 그녀는 옛날과 달리 요즘 드라마는 영화에 버금간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런 그녀에게 충격을 주는 사건이 있었다. 프로그램 기획만 하고 나머지는 서브 작가에게 맡겨 버린 메인 작가가 프로그램을 그만둔다는 거였다. 메인 작가가 어서 돌아와 서브 작가의 못된 기강을 잡아 주길 바랐건만 그녀는 끝내 루비콘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젠 서브와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싸워야 하나 싶은 그때.

    “축하드려요,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네요.”

    ‘축하? 소원? 이것들이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설영선은 잠자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트콤인데, 뭘.”

    “시트콤은 드라마 아닌가요?”

    “그런가? 뭐, 운이 좋았지. QVN에서도 드라마를 만들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자기 말대로 기획안을 내길 잘한 것 같아.”

    그러니까 그동안 메인 작가를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게 QVN에서 시트콤을 제작하겠다는 소리에 그 기획안을 만드느라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다 방송 작가 출신 드라마 작가가 많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같은 작가라도 방송 작가보단 드라마 작가 대우가 좋긴 했으니까.

    그날부로 설영선은 꿈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 역시 드라마 작가가 돼서 서브 작가의 코를 납작하게 해 주겠다고. 어차피 기자는 진즉 물 건너갔으니 드라마 작가라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 보리라.

    물론 영화 전문 기자만큼 드라마 작가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건 아니었다. 단지 이 엿 같은 현실을 버티기 위한 일종의 부적 같은 거였다.

    드라마 아카데미를 등록한 것 역시 일종의 자기 위안일 뿐, 실제로 자신이 작가가 될 거란 기대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영화 덕후였던 탓에 또래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봐 왔다는 점이었다. 드라마 작가 지망생을 능가할 정도로.

    겨우 출석만 했지, 제대로 수업을 따라가지 못했다고 느낀 그녀는 어떻게 자신이 창작반까지 갔는지 의아했지만 사실 그녀가 과제로 낸 단막극은 꽤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녀 머릿속에 저장된 수많은 영화 덕분에.

    역시나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던 그녀는 뒤늦게 수업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하마터면 오늘도 빈손으로 갈 뻔했네.”

    작가실에서 뽑아낸 대본을 지하철 안에서 서둘러 읽던 그녀는 평소엔 대본조차 읽지 못하고 갔는데, 오늘은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바삐 대본을 넘겼다.

    창작반은 수업료가 없다고 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절대 창작반까진 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던 그녀는 공교롭게도 새로 바뀐 오너가 창작반 강사였다는 사실에 감사해하며 중간에 그만두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열심히 대본을 보던 그녀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 * *

    저런 교육생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뿔테 안경이 얼굴의 반을 가린 설영선은 남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의견을 조곤조곤 내고 있었다.

    “이탈리아 영화 중에 <우산을 든 여인>이라는 영화가 있어요. 3개월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자가 나오죠. 남편은 딴 여자랑 바람이 났고 자식들도 엄마한테 관심이 없어요. 시시각각 죽음의 공포는 찾아오는데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어 차라리 죽자 마음먹고 비 오는 거리로 뛰쳐나가죠. 그때 빗속에서 버려진 채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해요.”

    피곤에 절은 목소리였지만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으니 설영선의 목소리를 제외하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영화가 떠오르네요. 사실 그 영화도 전개에 변주를 줬거든요. 그 덕에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가 드라마틱해졌죠. 빗속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한 여자가 다음 씬에선 죽는 걸로 나오거든요. 중간 과정을 과감하게 삭제해서 역으로 추리하는 방식으로요. 더 궁금해지게.”

    설영선의 설명에 교육생들의 시선이 김명석에게로 향했다. 대답을 재촉하는 시선에 김명석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은 그 영화를 오마주한 겁니다. 역시 알아보시네요. 저도 그 영화 참 인상 깊게 봤거든요. 시점을 달리하면 단조로운 구성도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네, 이야기의 구조에 변화를 주는 것도 극적 변화를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죠. 보통은 기승전결에 너무 집착하게 되는데, 일반적인 이야기의 흐름에 이처럼 변화를 주면 색다른 극적 효과를 줄 수 있습니다.”

    경우의 말에 교육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기본에 익숙해져 있어야 변주를 주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괜히 어설프게 따라 하는 거 비추합니다.”

    “네.”

    “혹시 이 영화 알고 계신 분 있으실까요?”

    경우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여러분도 한번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남편으로 나오는 레오나르도 다르미안의 연기가 일품이거든요. 이탈리아 남자들이 잘생겼잖아요. 얼굴값 한다고 바람난 남편의 연기를 어찌나 잘하던지 저절로 욕이 나오더라구요.”

    경우의 말에 교육생들이 웃었다. 하지만 웃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김명석이었다.

    ‘도대체 뭐지? 쟤는 그렇다 치고, 저 여자는 뭐 하는 여자야?’

    이 영화는 최근 영화가 아니었다. 오래된 영화로 우연히 발견해 마음에 들었던 탓에 파일에 정리해 두었던 건데 그런 영화를 경우는 물론이고 저 안경잡이 애송이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 탓에 어쩐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잘난 척하길래 얼마나 잘난 건가 싶었는데 결국 다른 영화 참고나 하는 수준이었다고 험담하는 것만 같았다.

    * * *

    “아, 그래요? 확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경우의 얼굴은 한결 개운해져 있었다. 드라마 공모전 접수가 마감되길 기다렸던 경우는 MBS의 김은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동쪽 경계선>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접수되었는지 확인해 달라고.

    다름 아닌 김명석이 공모전에 당선되는 작품의 제목이었다.

    <동쪽 경계선>은 물론 그 비슷한 제목의 작품도 접수되지 않았다는 말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창작반에서 처음 그를 만난 이후 기억을 떠올린 경우가 표절 의혹이 일었던 작품들을 일부러 찾아보았다.

    교묘하게 피해 가긴 했지만 경우는 표절이라 확신했다. 다른 건 몰라도 창작하는 사람이 남의 작품을 베끼는 일은 하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 교육생이 아니었다고 해도 경우가 원작을 들먹이며 유도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김명석은 공모전을 포기하는 쪽을 택한 것 같았다.

    “설영선이라…….”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영화였다. 기억을 더듬어 겨우 떠올린 덕분에 영화를 미리 볼 수 있었는데 관련된 일을 하는 김명석이라면 모를까 나이도 어린 설영선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된 영화를 알고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전생에 저런 작가가 있나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설영선이란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해서 수업이 끝난 뒤 우연을 가장해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그런 그녀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잉 메시지>를 봤거든요. 재밌더라구요. 그리고 복수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요?’

    작가가 되는 일이 복수라니, 뜬금없기는 했지만 어쨌든 자신이 기획한 <다잉 메시지> 덕분에 드라마 작가가 될 결심을 했다는 그녀 말에 자신이 변화를 일으킨 게 아닌가 싶은 경우는 신기하기만 했다.

    “드라마 쓰는 실력만 더 좋았으면 딱이었는데…….”

    합평을 위해 제출한 그녀의 작품은 중하. 당한 게 있었던 김명석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보였지만 괜히 눈치를 보느라 평소와는 다르게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아쉬움이 컸다.

    어쨌든 그녀 덕분에 김명석의 문제를 의외로 쉽게 해결한 셈이 되었다. 그렇다고 김명석의 일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었으니 그건 차차 두고 볼 일.

    “경우? 아까부터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아, 미안.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나저나 드디어 미국으로 돌아가는구나?”

    “왜? 내가 가니까 좋아? 좀 섭섭한걸.”

    “그럴 리가 있나. 내가 미국에 다녀오느라 신경 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니까 그러지.”

    “걱정 마. 또 올 테니까.”

    “설마 또 우리 드라마 하겠다고 나서는 건 아니지?”

    “글쎄, 대본이 마음에 들면 그럴지도.”

    그렇게 경우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제임스를 배웅했다.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돌아오는 사람도 있기 마련.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보니 안청모가 그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이 이 시간엔 어쩐 일입니까?”

    “그게…….”

    안청모가 머뭇거리는 순간, 경우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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