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라마 쓰는 재벌가 막내-159화 (159/250)
  • #159.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4)

    “<위대한 개츠비>를 오마주했다면서 개츠비의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을 헤아리기보다 오로지 열등감만 들춘 건 소설을 편협하게 본 거 아닙니까?”

    “나이가 들었다고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의 몸만 집착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자신이 일군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며 현실에 만족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노인 혐오가 왜 생기겠습니까?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오해를 키울 수 있다는 생각 안 해 봤습니까?”

    “이건 미니시리즈에나 허용되는 이야기죠. 그것도 남자, 여자 주인공이 만날 때요. 근데 미니시리즈가 아니라 단막극이잖아요. 두 사람이 만나 사랑할 것도 아닌데 만나러 가는 과정이 왜 이렇게 복잡합니까? 과정은 짧게 끊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창작반의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자 김명석은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뼈 아픈 소리를 해 댔으니 당하는 입장에선 달갑지 않았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오류까지 찾아내자 자신의 작품이 도마 위에 오르면 교육생들은 제일 먼저 김명석의 반응부터 살폈다.

    그가 오늘은 제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길 바라면서.

    불행하게도 매 수업 시간, 김명석은 쉬지 않았다.

    대본을 잘 쓰는 것도 중요했지만 남의 작품을 잘 분석하는 능력도 중요하게 생각했으니 어떻게든 자신의 능력을 보이고 싶은 교육생이라면 자기 작품을 쓰는 것만큼 남의 작품 분석하는 것도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그러니 김명석은 교육생의 본분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그에게 작품을 난도질당한 교육생들은 그의 순서가 오길 기다렸다. 받은 만큼 되돌려 주기 위해.

    하지만 김명석은 그들의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당사자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심했다, 드라마가 정말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 부분만 손보면 좋은 드라마가 될 것 같단 생각에 더 몰아붙였다,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는데 복수 어쩌고 했던 마음이 사라지는 건 당연지사.

    이래서 사람은 관록을 무시할 수 없었으니 그는 창작반이 다 끝나고 난 이후의 일도 고려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십 년 후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무조건 적을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앞에선 경우의 눈에 들기 위해 있는 말, 없는 말까지 보태며 작품을 씹어 댔지만 뒤에선 이런 식으로 응어리를 풀어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경우 역시 감탄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교육생으로서 김명석은 흠잡을 데 없었다. 그가 지적하는 것들이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경우가 더하고 뺄 것도 없을 정도.

    영화사에 오래 근무하면서 그가 봐 온 영화 시나리오 양만 해도 어마어마했다. 거기다 해외 영화까지 봤을 테니 창작반의 그 누구도 그만큼 영화를 본 사람은 없을 거란 게 경우의 생각이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많이 보지 않았을까?

    그러다 보니 그가 낼 단막극이 더욱 기대되었다. 이만한 말발에 이 정도로 볼 수 있는 통찰력이라면 분명 그가 쓰는 작품도 다른 교육생들의 수준을 뛰어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길지 않을까 생각했던 3시간의 수업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애초 2시간에서 3시간으로 늘린 이유도 이해할 것 같았다.

    덕분에 힘은 들었지만 경우는 수업 시간이 기다려졌다. 특히 작품이 카페 공개되는 화요일이 가장 설렜다. 교육생들의 작품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날도 퇴근을 미룬 채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아직 퇴근 안 하셨네요.”

    회사에 남아 있던 김종수가 경우의 방으로 들어왔다.

    “네. 봐야 할 게 좀 있어서요.”

    “안 그래도 이기숙 원장에게 들었습니다. 수업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신다구요?”

    “별로 그렇진 않은데요. 대표님 말씀대로 다들 자기들이 알아서 잘하더라구요.”

    “말로만 그런 거 다 압니다. 작가님 성격, 제가 모르겠습니까? 이미 맡은 일 뭐든 확실히 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래서 더 걱정이구요.”

    “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솔직히 재미있어요. 저는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런지 하나 같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그래, 눈에 띄는 사람은 있습니까? 애초에 실력 괜찮은 사람 있으면 데려오려고 시작한 일이잖아요?”

    “글쎄요, 아직까지는 그렇게 욕심나는 사람은 없네요.”

    “그래요?”

    “대신 싸움닭 하나가 있어서 관전하는 재미는 쏠쏠합니다.”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네요. 확실히 그런 친구 하나 있으면 수업 분위기 더 불타오르고 좋죠. 근데 그렇게 하는 게 자기를 위하는 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제 살 깎아 먹는 거잖아요.”

    “시간 지나면 곧 알게 되겠죠.”

    합평을 할 때 지적을 잘하면 좋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것보다는 수정 방향을 잡아 주는 게 더 중요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수정하면 어떨까? 저걸 저런 식으로 했다면 결과가 훨씬 더 좋겠다, 이런 식으로.

    방송이라는 게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없으니 만약 위기의 상황이 벌어졌을 때 대본 수정이 용이한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경험이 부족한 교육생들은 거기까지 알지 못했지만.

    “참, 미국에서 서 실장이 연락이 왔더라구요. 작가님 바쁜 것 같아 제가 대신 받았습니다.”

    “그래요? 뭐라 하던가요?”

    “<뷰티풀 라이프> 방송 날짜가 정해졌답니다. 다음 달 두 번째 주 일요일이요.”

    “벌써 그렇게 됐군요?”

    “긴장 좀 됩니까?”

    “조금요. 잘 나와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잘 나올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야죠.”

    드디어 미국 전역에 ‘스튜디오 글로리’에서 제작한 드라마가 방송된다니 김종수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경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잘돼서 시즌 2는 물론 다른 드라마도 제작을 이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 *

    “당신 아직도 안 자?”

    “어, 좀 봐야 할 게 있어서.”

    “또 수업 준비해? 무슨 수업 준비를 그렇게 열심히 해? 적당히 쉬엄쉬엄해.”

    “다 했으니까 당신 먼저 얼른 자.”

    “하여간 애들이 아빠는 안 닮고 누굴 닮았는지.”

    “날 안 닮았으면 당신 닮은 거 아냐?”

    “이이는!”

    “농담이야, 농담.”

    “하여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고 있으니 내가 속이 탄다니까.”

    “애들 너무 잡지 마. 저 나이 때는 다 놀고 싶은 거지.”

    “이게 다 당신 때문이잖아. 그러게 누가 그렇게 열심히 하래?”

    “이왕이면 당선 돼야 한다고 했던 건 당신이야. 그래서 열심히 하는데 왜 그래?”

    “당신은 나이도 있으면서 뒤늦게 공부한다고 이 난린데 애들은 놀고만 있으니 내 눈이 높아져서 그렇잖아. 하여간 저놈의 자식들 꼴 보기 싫어 죽겠어!”

    “너무 그러지 마. 다 지들도 때 되면 하겠지.”

    “어느 세월에.”

    “1절만 하자. 그래야 나도 이거 얼른 보고 잘 거 아니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너무 무리하진 마. 내일 또 출근해야 하잖아.”

    “내 몸은 내가 챙기니까 걱정 말래두.”

    그렇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 아내를 서재에서 쫓아낸 김명석은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이 되자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컴퓨터 화면엔 그가 전부터 기록해 놓았던 영화 분석 자료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처음 영화를 수입하러 갔을 때부터 해 왔던 일이었다. 그땐 팔리는 영화가 될지 아닐지 나중에라도 판단하기 용이하게 하려 적어 놓았던 것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다.

    두 달 뒤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순서였으니 지금부터 차근차근 단막극을 써야 했다. 남들은 건들지 못할 완벽한 단막극으로.

    운이 있는 편이었는지 뽑기를 잘한 덕분에 그는 자신의 합평 순서를 딱 원하는 때로 맞출 수 있었다. 바로 공모전 직전.

    합평에서 작품을 미리 점검 받은 후 공모전에 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당선될 확률이 더 높아질 거란 계산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공모전엔 꼭 당선이 돼야 했다. 김명석은 재작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해외 영화제에 다녀온 지 며칠 되지 않아 공모전 결과 발표가 있던 날이었다. 살짝 기대했지만 결과는 낙방. 알고 보니 2차 통과도 하지 못했다.

    에라이, 그렇게 열심히 썼는데 안 되는 거면 이쯤하고 때려 치자 생각하고 있던 그때 그를 대표가 불렀다.

    ‘김실장이 정우일 작가 좀 만나 봐. 차기작 우리랑 하는 거 어떻겠냐고.’

    ‘제가요?’

    ‘둘이 친구라며? 요즘 정우일 작가가 쓴 시나리오 연이어 빵빵 터지고 있는 거 알지? 그래도 첫 작은 우리 제작사랑 했으니까 인연도 이야기하면서, 응? 친구 좋다는 게 뭐야? 다음 작품 꼭 우리랑 하자고 설득 좀 해 봐.’

    솔직히 제작사로 들어온 시나리오도 많은데 굳이 친구의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하는 대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는 해도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월급받고 사는 그도 어쩔 수 없었으니 결국 친구와 약속을 잡게 되었다.

    첫작이 대박난 이후 다시 만난 친구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수줍어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감에 똘똘 차 있는 게 딴사람 같았다.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내냐?’

    ‘나야 뭐 잘 지내지.’

    ‘그래? 여전히 그 제작사에 있는 거고?’

    ‘그렇……지.’

    ‘근데 통 연락도 없다가 어쩐 일이야? 설마 차기작 너네랑 하자고 온 건 아니지?’

    ‘응? ……무슨 소리야. 우리도 제작 대기 중인 영화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 다행이다. 안 그래도 나 차기작 계약 했거든. 고료를 엄청 빵빵하게 주더라. 확실히 제작사가 크니까 시원시원한 거 있지.’

    친구가 말한 제작사는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으니 자신의 제작사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말을 꺼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겼다. 한동안 대표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지만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를 떠올린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드시 내년 공모전에 당선 되기로.

    그날 이후 김명석은 수험생처럼 드라마 공부에 매달렸다.

    지금까지의 당선작들을 모조리 분석하는 것은 물론 방송국이 선호하는 작품 방향이라든가 심사 위원이 어떻게 구성되는지까지 다 찾아봤다.

    그렇게 분석을 끝내고 보니 한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로카르노 영화제에 갔다가 본 헝가리 영화.

    묘하게 우리나라 분위기와 맞는 그 영화가 떠오른 건 단순한 우연이었는지 신의 계시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니 김명석은 자신이 정리한 영화 파일 속에서 그 영화를 찾아내 영화에 쓰인 플롯으로 단막극을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한 대본을 공모전에 응모한 지 몇 달 뒤 방송국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3차 심사에 통과했으니 추가작 한 편을 더 내라고.

    한편 더 써 두었으면 좋았을 걸.

    3차 통과자는 추가로 1편 더 제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른 게 화근이었다. 결국 그는 이전에 써 놓은 습작 하나를 추가로 제출했다. 결과는 낙방.

    미리 준비만 해 뒀으면 합격이 됐을 거란 생각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번엔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영화 파일을 뒤지고 뒤져 마침내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작품 하나를 찾아냈다. 이탈리아 영화였다.

    그는 밤이 늦은 줄도 모르고 단막극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 * *

    마침내 벼르고 벼른 김명석의 작품을 합평할 시간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으니.

    “아무도 할 말 없어요?”

    경우가 채근하자 교육생 하나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전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어요. 일단 구성 자체가 노말했는데 형식이 특이하다고 할까? 전개 시점을 달리한 게 이 드라마의 강점 같아요.”

    “맞아요. 시간의 순서대로 흐름이 나왔다면 지루했을 법한 이야긴데 결말이 중간이 나오니까 어떻게 이렇게 된 건지 추리하게 되잖아요. 주인공이 왜 죽었는지 이유를 찾아보게 만드는 게 긴장감을 끌고 갔던 것 같아요.”

    “거기다 다른 등장인물을 통해서 드라마의 메시지도 분명히 전하고 있어요.”

    단단히 벼르고 나왔던 교육생들의 입에서 힘없는 칭찬의 소리가 나오자 김명석은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붙잡느라 애를 써야 했다. 이대로 자신의 승리가 확정되었다고 생각하는 가운데 누군가 손을 들었다.

    경우조차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은 존재감이 희미한 교육생이었다.

    “네, 거기…… 설영선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놀란 설영선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 이탈리아 영화 중에 <우산을 든 여인>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설영선의 말에 김명석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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